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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 bubble (석 용호)
Date   : Fri Sep 18 13:28:41 1992
Subject: 유리병 안에서.I

아래의 글은 보글이가 쓴 글이 아님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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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리병 안에서 ..PART 1 --

그와 나는 하얗게 김이 오르는 포장마차에 쭈그리고 앉아, 퍽이나 오랫동안 
서로의 앞에 놓여있는 소주잔 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다... 매섭게 불어닥
친 바람으로 포장마차는 가볍게 흔들리고, 잠시후 등 뒤로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백차가 한 대 지나갔다.
    "그래서...?"
    훈은 그 무뚝뚝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가느다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두툼한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섬세한 미성.... 언젠가 나는 이 
목소리 때문에 웃음을 터트린 적도 있었지.... '형.. 형은 내유외강 이었군
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웃을수 만은 없다. 훈의 풀기없는 와이셔츠가 
왠지 더욱 후근줄한 무엇으로 다가오는 지금에 말이다.
    "그래서... 라니요 ?"
    나는 재차 반문 하였다. 그의 놀란 눈동자, 곧 이어 가늘게 말려  올라
간 속눈섭에 덮혀버리는 충혈된 눈동자... 나는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아직도 정리해야 할 감정이 남았다는 건가요 ? 전 충분하다고 생각 하
는데요. 아니, 지금 제가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도  너무  과한 
감정의 사치가 아닌가 생각 해요..."
    나는 어쩌면 이렇게 잔인한 계집애 일까.... 어쩌면 이런 말을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걸까... 
    훈의 투박한 손가락 사이로 푸른 담배 연기가 천천히 날아오르고  있었
다. 이사람은 숨도 쉬지 않는 것일까 ? 눈도 깜빡이질  않는다.  그때였다. 
훈의 때묻은 와이셔츠 앞섶으로 물방울이 하나 떨어진 것은....
    "훈....."

    '그렇다 시간은 직선으로 나아가고 사랑은 수직으로 나아가니,  시간과 
사랑은 두 토막이 나거나 영원히 만나지를 않고, 세찬 바람이 불어친 다음, 
방 안은 모래와 거미와 문턱 바깥이나 마찬가지.... ' 
    훈이 보내온 첫 편지에는 분명 이렇게 씌여 있었다. 그래... 시인 오디
세다스 엘리티스의 싯귀... 어쩌면 그는 이렇게 끝나버릴 우리들의  이야기
를 먼저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마치 잘못 맞춘 첫 단추처럼 우리
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얼클어져 있었는지도 몰라....
    훈아..... 
    나는 당신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 봅니다. 당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틈으로 그렇게 걸어 가셨지요. 나는 철 없는  계집아
이처럼 그렇게 망연자실 당신의 뒷 모습만 눈으로 �물� 있었습니다. 왜  부
르지 않았느냐고요 ? 왜 그리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었느냐고요 ?   알  수 
없어요..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의 만남이 말로 표현되지  못
하는 검은 운명의 별의 인도를 받았듯이 말이에요... 나는  잔인한  아이가 
되어 당신을 보내고... 이렇게 깊은 밤이면 당신을 향한 길고 긴 편지를 쓰
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꺽어버린 꽃에 대한 연민처럼... 논리없는  슬픔
에 잠기는 것입니다...
    당신에게서 첫 편지가 오던 날을 기억 합니다. 늦은 강의가 있던  목요
일 오후... 집으로 돌아와 제 방 문을 열었을때, 책상위에 비스듬히 놓여져 
있던 하얀 봉투를 보았어요.. 발신인도 씌여있지 않은 머쓱한 봉투인  탓에 
전 아마도 정란이 그 아이의 장난이려니 생각했었지요. 왜 있잖아요,  얼굴
이 동그랗고 우스운 소리를 잘하는 아이.... 하지만 겉봉을 열고 종이를 펼
쳐 보았을때, 그것은 첫 눈에도 훈아의 편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생은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회한... 모든 후회는 결국 존재의 후회로 
귀결한다. 처절하다면 처절하다고 할 수 있는 전혜린의  이러한  절규(?)를 
접어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생은 슬픈 것인지도 모르지.. 태어
난 이의 비극.... 
    전 후 사정은 접어두고, 다시는 편지를 쓴다든가, 다른 이들과 웃고 떠
든다든가 할 수 없을것만 같았는데 나는  또  이렇게  살고  있다.  이상하
지.....?
    나는 너무 쉽게 잊고... 너무 쉽게 포기하는 성질을 가지고 태어난  걸
까 ? 아마도 그런 모양이야.. 일주일.... 그래, 내게 있어서 모든 일은  그
놈의 일주일이 문제야.. 일주일만 슬퍼하고  나면  곧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그런데 사실 그럴까 ?  나  혼자서 
상처받고 그러는 걸까 ? 요지는.. 그도.. 아니, 그야말로 진정한  '피해자' 
가 아닐까 한다는 것이야... 
    태어남의 비극... 생의 드라마틱한, 그 흥미 진진한 전개... 차라리 만
나지 않았다면... 그를 알지 못했다면 생기지 않았을런지도 모르는 크고 작
은 회한들.. 불면들... 제각기 자신의 길을 걸어와서, 근 이십년간의  길을 
걸어와서 그와 내가 만났다는 사실... 그렇게 생각한 다면  만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는 기뻐해야 할텐데... 
    마치 길을 걷는 것처럼, 혹은 좁고 긴 줄을 따라 가다가  문득  겹쳐진 
좁고 긴 줄... 같은것... 어느날, 비 몹시 내리는 날.. 열린  창문  틈으로 
뛰어든 야생의 새처럼 언젠가는 날려 보내야 하는... 그런것 ? 
    "그렇다... 시간은 직선으로 나아가고 사랑은 수직으로 나아가니, 시간
과 사랑은 두 토막이 나거나 영원히 만나지를 않고, 세찬 바람이 불어친 다
음, 방 안은 모래와 거미와 문턱 바깥이나 마찬가지.....">

    훈은 그때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  누군가도 
지금의 저처럼 당신을 떠난 것이었겠지요...
    훈아... 난 당신의 이러한 편지를 받아들고는 많은 생각에  잠겼었습니
다. 내게 있어서 당신의 편지는 난파된 배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구조신호
처럼, 비에 흠뻑 젖어버린 들새의 창문 두드림처럼, 슬픔과 약함속에서  나
를 향해 흔드는 조난자의 하얀 손수건으로 여겨졌던 탓이지요.  난  당신이 
가여워서 그 밤새 잠 한 숨도 이루지 못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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