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gShin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SungShin ] in KIDS
글 쓴 이(By): styi (이 승택)
날 짜 (Date): 1994년09월04일(일) 22시39분30초 KDT
제 목(Title): 초인적인 의지 뒤에 남은 눈물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1946년 최초의 디지탈 컴퓨터 ENIAC이
군에서 쓰일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이 지나면서
이제는, 그보다 수십배의 성능을 자랑하는 "노트북" 컴퓨터가 개인의
손에 올려지게 되었다.

컴퓨터, 막연하게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해주었고 앞으로도
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그 하나의 기능을 위해서도 그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괴로운) 노력과 열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한 사람이 고생해서 수많은 사람 돕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늘 새벽에 프로그램 설치 작업을 매듭지으면서, 그간의
삶을 한번 돌이켜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난 이번 작업에서 놀란 것이 3가지 있다.

첫째, 그렇게 밤을 새고도 별 무리를 느끼지 않는 자신에게서이다.
사실 난 대학 입학할 때까지 공부한답시고 밤을 새본 적이 한번도
없다. 밤을 새 본 것은 대학 1학년때 중간 고사전에 당일 치기할
때와 3학년때 설악산에 친구들과 놀러갔을 때 뿐이다. 앗, 크리스마스
이브에 새벽송 나가기 전에 샌 것도 여러번 있구나...

오늘까지 지난 일주일간 잤던 시간은 전부 12시간쯤 되는 거 같다.
하루만 6시간을 잤고 대부분 그냥 새거나 1-2시간을 잤다. 그렇다고
아침이나 낮에 졸아본 적도 없다. 참, 희한하다. 나는 원래 밤새는
체질이 아닌 줄 알았는데 ...

두번째, 프로그램을 짜면서 어떻게 하면 요걸 보다 예쁘게 코딩하고
또 잘 돌아가게 만들까에 골몰했던 것이 나의 주된 프로그래밍
행태(行態)였는데 ...

이번에는 말로만 듣던, 남이 짜놓은 소스(최종본)를 짧은 시간내에
고치는 거였다. 평소에 한번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하던 차에 
호기심 반으로 맡아서 해보았다.

난, 프로그래밍은 효율좋은 알고리즘+자료구조와 보기 좋고 다소
loose한 코딩(이건 사실 정신적 막노동이니까)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내가 맡은 것은 전형적으로 그 반대의 케이스였다.
언뜻 보기엔 상당히 그럴듯하게 코딩되어있고 설계도 이것 저것
감안되어 있는 것 같았으나 ... 소스 코드의 복잡성이라는 것은
거의 상상을 초월했다.

전부 6,000라인에 불과한 소스를 파악하는데에만 한달이 더 걸렸다.
사실, 여긴에 내가 그동안 몰랐던 기능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거야
블랙 박스 식으로 해서 입출력쪽만 맞추면 되니까 문제가 없는데
제어의 흐름 잡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었다.

한달 반이 지나 이제 마감이 된 시점에 와서야 그 흐름이 잡혔으니
(그나마 밤새면서 해서...) 어찌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그래서 느낀 건데, 프로그래밍을 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남의 소스를
보게 된다면, 그 소스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걸로 프로그래밍 언어
공부를 하는게 아니라면,  가능한 요점 정리 식으로 보고, 자기가 
설계부터 다시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

셋째, 회사 선배들의 경륜이다. 나보다 나이가 8년 많으신 과장님의
프로그래밍 능력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Unix의 별의별
명령어와 시스템 콜을 거의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뭐 ... 하지만
나도 그 나이 되면 그만큼 하겠지.

오늘 오전 프로그램 설치 장소를 떠나 집으로 오면서 - 몸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인지 - 자꾸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건 일종의
"분노심"이기도 했다. 마음 깊은 속 한가운데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자리잡아온 이것은 그간 눌려있다가 조금씩 끓기 시작했다. 난 그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결과에 비해 너무 많이 소모된 나의 의지와 시간,
그리고 젊음이 억울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좋지 않은 소스, 부족한 시간, 나의 능력 부재)을
떠올릴수록 그런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소리지르고 빈정거리는
과장들을 볼 때, 그러면서도 내가 죄인인양 행동해야 했던 시간때문이었다.

오늘 오전에 친구 차를 타고 오는데 온 몸이 아팠다. 아니 아픈 것보다는
몸 구석 여기저기의 세포들이 불편함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난 다른 사람들 모르게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집에 와서도 마음을
달래느라 한참 걸렸다. 사람들이 다 싫어졌기 때문이다.

난,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기억해두어야겠다. 그것이 그 사람의
고의가 아니므로 탓할 이유는 없다. 단지 내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또
내가 반대의 입장에 섰을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도록 ... 
그래서 기억해두기를 원한다.

젊은 시절, 피곤과 싸워가며 초인적 의지(?)로 잉태시킨 눈물이라 ....
그 소중함을 잘 기억하고 싶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