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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fasbet (지하생활자�)
날 짜 (Date): 1996년10월14일(월) 20시52분12초 KST
제 목(Title): [바둑] 반상의 신경전 I


정용진의 바둑수첩-반상의 신경전(1회)

  바둑판의 규격은 정사각형같지만 가로 42cm, 세로 45cm로 약간의 차가  있
다.

  바둑판을 세로로 놓아 그 양끝에 마주하고 앉아 두는 것이 올바르다.즉 그
때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45cm,사람과 사람이 가장 친밀감을 갖는 거리라는
과학적 통계가 있었다.그토록 친밀감을 불러 일으키는 거리를 마주하고도 바
둑이 승부이다보니 45cm의 간격이 피차 서부개척시대의 총잡이들이 맞대결을
벌이는 황야의 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조훈현9단과 서봉수9단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유명한 맞수이다. 지금은 이
창호 유창혁9단 같은 후배들에 밀려 옛날보다 많이 식은밥(?)을 먹고 있지만
여전히 두 사람의 대결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올 1월초 제35기 최고위전 도
전권을 놓고 양웅이 실로 오랜만에 맞붙은 적이 있다.

  3전 2선승제의 도전자 결정전에서 1:1로 팽팽히 맞선 두 사람은 최종  3국
에서 날카롭게 신경을 돋운 채 다시 만났다.여기서 서9단은 중반무렵까지 필
승지세를 구축해 승리를 눈앞에 둔 듯했다. 그런데 이때 예기치 않은 신경전
이 벌어졌다.

  서9단은 무아지경에 빠져 수읽기를 할 때 저도 모르게 돌 몇개를 손아귀에
쥐고 스님이 염주알 굴리듯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는 버릇이 있다.가뜩이나
바둑이 불리한 조9단은 신경이 거슬린듯 참다못해 가볍게 한마디 했다."이봐
,서명인.

  돌소리 좀 내지 말게." 뜬금없이 상대에게 지적을 받은 서9단은 이를 핀잔
으로 받아들여 즉각 맞받아쳤다.  "그렇다면 조국수도 제발 중얼중얼 혼잣말
소리 좀 내지 말게.  " 의외의 반응에 조9단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횅하니
대국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승부는 여기서 반전됐다.  잠시 후 되돌아온 조9단은 어금니를 사려물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독수로 상대의 발목을 잡아버렸다.그날 서9단의 패착은 `반
상'에서가 아니라 `반외'에서 나왔던 것이다.


죽음을 향한 도제수업. 모든 방향으로의 우회. 제자리에서의 끝없는 유랑.
                                                 진눈깨비의 연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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