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portsLeisure ] in KIDS 글 쓴 이(By): Param (luv Mika) 날 짜 (Date): 2009년 05월 08일 (금) 오후 10시 21분 45초 제 목(Title): 펌/ 일본의 리버풀, 한신 타이거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38&issue_item_id=8456&office_id=295&article_id=0000000248 [매거진S] 오사카는 그들을 ‘한국 타이거즈’라 부른다 [박동희 칼럼 2009-05-07 23:56] 한신 타이거스는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일본프로야구 4년 연속 최다 관중을 기록했다. 74년 역사에 빛나는 명문구단 한신은 그래서 일본프로야구를 이해하는데 적격인 구단이다. 여기다 한신은 우리와도 특별한 관계가 있다. <스포츠춘추>가 2년에 걸쳐 서울과 오사카를 오가며 한신을 밀착 취재했다. 일본야구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자는 의도다. 지난해 8월 17일 인천공항에서 일본 오사카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날 잠을 설친 까닭일까.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눈을 떴다. 취재준비로 마음이 급한 까닭이었다. 졸음을 쫓을 요량으로 파일을 꺼냈다. <도톤보리의 호랑이들>. 파일 제목은 그랬다. ‘제목치고는 너무 촌스럽지 않아?’ 자신에게 묻지만, 답을 하지 못한다. 어쩌면 유년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은 까닭인지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5년 가을. 스포츠뉴스의 외국토픽에서 일본 야구선수들이 얼싸 안고 관중석에서 폭죽이 터지는 장면이 나왔다. 그리고 다음 장면으로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강으로 떨어지는 게 카메라에 잡혔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아나운서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1935년 창단 이후 처음으로 한신 타이거스가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하자, 감격한 한신 팬들이 오사카 도톤보리강에 뛰어들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어떻습니까. 보기만 해도 멋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당시 야구소년이었던 기자는 한신이란 일본야구팀의 유니폼도,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다고 강물에 뛰어드는 이웃나라 야구팬들도 전혀 멋지지 않았다. 되레 초등학교 운동복을 빼닮은 줄무늬 유니폼과 강물에 뛰어들고서 허우적거리는 철딱서니 없는 어른들이 촌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그때부터 한신과 오사카에 대한 기억은 ‘촌스러움’ 그 자체였다. 1985년 한신의 센트럴리그 우승 당시 흥분한 한신팬들은 오사카 도톤보리강으로 뛰어들었다. 여기다 실물크기의 KFC 상징 조형물인 코넬 샌더스 할아버지를 강으로 내던지기까지 했다. 이해 한신은 여세를 몰아 창단 이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뒤 한신은 약체로 전락했고 일부 팬들은 이 모든 불행이 '코넬의 저주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3월 코넬 할아버지는 14년 만에 도톤보리강에서 건져졌다(사진=하세가와 쇼이치) 일본야구의 성지, ‘고시엔구장’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고시엔구장 교통편을 찾았다. 이날 예정된 한신과 주니치 드래건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아, 고시엔규조(구장)?” 오사카는 친절했다. 길을 묻는 이방인에게 손가락 끝으로 길을 알려주는 도쿄와는 달리 오사카는 늘 목적지까지 앞장서 갔다. 그날도 공항에서 500m나 떨어진 버스정류장까지 안내를 받았다. 이윽고 도착한 고시엔구장에서 만난 재일동포 윤노박 씨는 “오사카에서 그 정도 친절은 놀랄 일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윤 씨는 “오사카는 한국처럼 인심이 좋은 곳”이라며 “오자마자 오사카의 특산품을 모두 경험하게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오사카 특산품을 ‘모두’ 경험하게 된 셈이라, 인심은 이해가 가는데 다른 건 또 무엇일까. 한신은 4만6천233명이 관전할 수 있는 일본 최고의 야외 구장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기든 지든 한결 같이 고시엔구장을 찾는 최고의 팬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최고의 야외구장에서 최고의 팬이 지켜보는 앞에서 최악의 플레이를 보여주곤 한다. 한국 부산을 연고로 하는 팀과 쌍둥이처럼 닮은 점이 많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고시엔구장이다. 과거 한국에서 ‘갑자원(甲子園)구장’으로 불리던 곳이 바로 이 구장이다. 고시엔구장은 오사카의 ‘랜드 마크’이자 일본야구의 ‘성지(聖地)’이며 일본 최고의 ‘매머드 야구장’이다. 그도 그럴 게 수용인원 4만 6천233명의 옥외 야구장은 세계에서도 드물다. 그것도 지은 지 85년이 된 야구장이라면 미 메이저리그에서도 흔치 않다. 기자를 마중 나온 한신 타이거스의 광보부(홍보부) 나가요시 도모야 씨는 “흔히 고시엔구장이라 하지만 1964년부터 정식명칭은 한신고시엔 구장”이라며 구장 명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1924년은 십간, 십이지의 각각 첫 번째라 할 수 있는 ‘갑(甲)’과 ‘子(자)’가 60년 만에 만나는 ‘갑자년’이었다. 일본에서 이 같은 조합은 행운을 상징한다. 이해 야구장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무사고와 행운을 비는 마음으로 구장 일대를 ‘고시엔’이라 불렀고 야구장은 아예 ‘고시엔구장’으로 이름 붙였다.” 1935년 창단 이후 한신은 줄곧 고시엔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예외가 있다면 패전 후 미군정이 주둔지로 쓰려고 고시엔구장을 접수한 1946년 한해뿐이다. 어쨌거나 창단 때 홈구장을 변경 없이 계속 쓰는 구단은 한신이 유일하다. ‘한신=고시엔구장’은 한신에게 큰 이익을 안겼다. 단연 관중수입이다. 한신의 성적과 크게 상관없이 예나 지금이나 경기당 4만 명 이상이 고시엔구장을 찾는다. 전적으로 대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매머드 구장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홈 관중수입을 제외하곤 별 이득이 없었다. 왜냐? 고시엔구장을 쓰려면 많은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옥의 원정’이 대표적이다. 봄 고시엔 대회가 열리는 3월 하순부터 4월 초는 센트럴리그 정규시즌이 열릴 때다. 여름 고시엔 대회가 개최되는 한여름은 프로선수들의 체력이 바닥일 때다. 한신은 한시즌 팀의 운명이 걸린 봄과 여름에 홈구장을 쓰지 못했다. 고교야구팀에게 고시엔구장을 양보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동거리가 길다'거나 '왜 우리만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느냐'며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나가요시 씨는 “1924년 고시엔구장이 개장하자마자 전국중등학교 야구대회(전국고등학교선수권대회의 전신)가 열렸고 그 뒤 84년 동안 고시엔구장은 한신뿐만 아니라 일본 고교야구선수들의 환호와 눈물이 엇갈리는 청춘의 장(場)이 됐다”며 “일본야구의 성지로 불리는 만큼 프로보단 아마추어 야구를 우선한다는 게 고시엔구장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고시엔구장에선 일명 ‘고시엔대회’로 불리는 두 번의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열린다. 봄에 열리는 전국선발고교야구선수권대회(봄 고시엔)과 여름에 펼쳐지는 전국중등학교 야구대회(여름 고시엔)가 그것이다. 봄 고시엔은 센트럴리그 정규시즌이 시작하는 3월 말이나 4월초에 열리기 마련이라, 한신은 전해 A클래스(1~3위) 성적을 내고도 다음해 홈경기를 B클래스(4~6위)팀의 홈에서 치르는 불이익을 감수하게 마련이었다. (주: 2003년부터 센트럴리그는 A클래스팀에게 다음해 개막전 홈구장 사용권을 준다.) 더 심각한 건 여름 고시엔이었다. 하계방학 때 열리는 여름 고시엔은 대회 기간만 1달가량이라 한신은 이 시기 눈물을 머금고 장기 원정, 즉 ‘지옥의 원정’을 떠나야만 했다. 과거 한신이 정규시즌 초반 좋은 성적을 내고도 여름에 급격하게 성적이 떨어져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한 것도 ‘지옥의 원정’ 탓이 컸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신은 지금껏 이와 관련돼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거나 고시엔구장에서 고교야구대회를 축출하기 위해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는 늘 우승에 목말라 하던 한신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간명하다. 그것이 고시엔구장의 정신이고 그런 난관을 뚫는 것이야말로 프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간에는 여름 고시엔 기간 중 오사카 교세라돔을 활용하기 때문에 ‘지옥의 원정’은 예전의 추억이 되고 있다.” 나가요시 씨의 말처럼 이제 한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지옥의 원정’은 사라졌다. 그러나 어쩌면 한신의 부진을 감싸주던 중요한 보호막이자 변명이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 고시엔구장의 외야 통로. 이 길을 따라 투수교체 때마다 투수를 태운 전기차가 마운드까지 간다. 통로 좌우를 잘 보면 2차 대전 당시 박힌 총알자국이 무척 많다. 고시엔구장은 낡고 오래됐지만 리모델링으로 유지되고 있다. 역사를 보존해 후대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이것을 '디자인'이라 한다. 허물고 무너뜨려 새것을 만드는 것만이 '디자인'이라 철썩같이 믿는 이들에게 시시하는 바가 크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74년 전통의 전국구 구단, 한신 오사카의 아침인사는 색다르다. 남성들 사이에서 그렇다. 그들은 “오하이오 고자이마스(안녕하세요.)” 대신 다음과 같은 말로 아침인사를 나눈다. “어제 한신 경기 봤어?” 거짓말 같지만, 오사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오사카의 남자들은 아침이면 일터에서 조간신문을 펼쳐놓고 전날 한신 경기를 복기하고 그걸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퇴근 뒤 고시엔구장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그러나 한신의 인기가 오사카에만 집중됐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신은 일본프로야구에서 요미우리와 함께 유이한 전국구 구단이다. 연고지인 효고현과 전통의 텃밭 오사카부를 포함 위로는 홋카이도, 아래로는 오키나와까지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한신의 인기는 요미우리를 능가한다. 2006년 이후엔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 한신 팬 가운데는 반골 혹은 마이너 기질을 가진 이들이 많다. 과거에는 극성 팬들 때문에 고시엔구장엔 사고가 끊일 날이 없었다. 장난감 칼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총까지 구장으로 반입했던 적이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한신이 이처럼 일본야구팬들의 사랑을 받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전통이다. 한신은 일본프로야구사에서 요미우리와 함께 역사와 전통이 가장 깊은 팀이다. 1935년 ‘오사카 타이거스’이란 이름으로 창단했으니 올해로 구단 나이가 74살이다. 1년 앞서 창단한 도쿄 자이언츠(요미우리의 전신) 다음으로 역사가 깊다. 오사카의 창단은 순전히 요미우리신문 덕분이었다.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보다 세가 약했던 요미우리신문은 부수 확장을 목적으로 도쿄 자이언츠를 창단했다. 그러나 안정적인 구단 운영과 홍보를 위해선 여러 팀이 필요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도쿄, 오사카, 나고야 3대 대도시를 돌며 경기를 치르는 리그제를 생각해냈고 파트너로 오사카 근교에 고시엔구장을 보유한 한신전기철도를 점찍었다. 여기서 잠시 출발부터 다른 한국과 일본의 야구 인프라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문화체육관광부가 펴낸 ‘2009 전국공공체육시설현황’에 따르면 한국에는 총 53개의 야구장이 있다. 일본 오키나와섬 안에 있는 야구장보다 적은 수다. 문제는 53개 야구장 가운데 관중을 불러 정식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정상적인 구장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가 있다. 과거 대부분의 국내 야구장이 프로야구가 아니라 전국체육대회나 국제대회 등 이벤트성 대회를 치를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장 건설 시 경기력 향상, 관중의 편의, 수익창출 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일본도 ‘야구’ 자체를 위해 야구장을 지은 건 아니었다. 그보단 야구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속셈이 강했다. 한신전철이 좋은 예다. 일본프로야구의 특징은 탄생 때부터 매우 상업적이었다는 것이다. 야구장은 상업부지 내의 랜드 마크 성격이 강했다. 사진은 고시엔 일대 개발과 함께 건설된 고시엔역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장면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22년 한신전철은 효고현 폐천 부지를 산 뒤 곧장 전철 레인을 깔았다.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해 막대한 개발이익을 노릴 참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입주를 하겠다는 이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주택단지와 전철만 완벽하게 갖추면 입주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리라 예상했던 한신전철은 결국 입주자들의 관심을 끌려면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한신전철의 눈에 띄인 게 있었다. 야구장이다. 당시 붐이 일던 야구를 주택가 근처, 그것도 교통이 편리한 곳에서 볼 수 있게 한다면 입주자들이 늘어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냈다. 한신전철은 곧바로 미 메이저리그 뉴욕 자이언츠의 홈구장 폴로그라운드를 본떠 대규모 옥외 구장을 짓기에 이르렀다. 그곳이 지금의 고시엔구장이다. 한신뿐만 아니라 일본프로야구사에 니시테쓰, 한큐, 긴테쓰, 세이부 등 전철회사가 유독 많았던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지금도 도쿄돔 이전에 지은 일본 내 구장은 주택가에 둘러싸여 있거나 지하철이 구장 바로 옆에 있는 경우가 많다. 각설하고. 한신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은 한국 롯데 자이언츠와 비교할 만 하다. 하지만 두 나라 응원은 약간 다른 점이 있다. 누가 응원을 주도하는가다. 한국의 경우 구단이 응원단장, 치어리더 등과 계약을 맺고 이들에게 응원의 주도를 맡기지만 일본은 별도의 계약없이 자원 응원자들에 의해 주도된다. 단, 일본에서도 구단기를 흔들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구단 복장을 입은 채로 응원을 주도하려면 사전 구단에 '응원단장' 승인을 받아야 한다. 요미우리신문의 제안을 받아들인 한신전철은 고교야구 스타들과 유명 실업선수들을 모아 1935년 ‘주식회사 오사카 야구클럽’을 만들고 사내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구단명을 ‘오사카 타이거스’로 정한다. 미 메이저리그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거였다. 물론 유니폼도 디트로이트 것과 똑같이 제작했다. 이후 ‘오사카 타이거스’는 1961년 ‘한신 타이거스’로 구단명을 교체했다. 모그룹이 한신전철인데다 고시엔구장이 오사카(大阪)와 고베(神?)사이에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자씩을 따 '한신(阪神)'으로 지었다. 그 뒤 한신은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 모기업이 바뀌지 않은 채 전통을 잇는 몇 안 되는 구단이 됐고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명문구단으로 성장했다. '반(反)도쿄’ 대항의 상징 일본야구팬들이 한신을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간사이의 자존심이자 ‘반(反)도쿄’의 선봉이기 때문이다. 한신의 누마자와 쇼지 본부장은 “창단 당시부터 한신은 간사히 지방의 대표로 간토(관동)지방의 요미우리와 대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며 한신과 요미우리의 관계를 “미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맞수 관계 이상”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신과 요미우리는 전통의 맞수다. 두 팀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일본프로야구 초창기였던 1930년대 중반. 한신 타자 가게우라 마사루와 요미우리 투수 사와무라 에이지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투타 맞수로 맹활약했다. 한신과 요미우리가 맞수가 된 데는 이들의 대결이 큰 영향을 끼쳤다. 릿교대을 중퇴하고 한신 창단구성원으로 뛰어든 가게우라는 ‘신이 내린 스윙’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타격이 뛰어났다. 이에 반해 요미우리 사와무라는 1934년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일·미 친선경기에 출전해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를 연달아 삼진으로 잡으며 “당장 메이저리그에 진출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투수였다. 두 선수의 진검승부가 어찌나 대단했는지 당시 일본야구팬들은 ‘서쪽의 가게우라, 동쪽의 사와무라’라고 부르며 야구의 묘미에 흠뻑 빠졌다. 한신 마스코트 트락키(호랑이)와 주니치 마스코트 도아라(코알라)가 고시엔구장을 찾은 어린이 팬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두 마스코트는 CD를 내고 책 주인공이 될 만큼 일본에서 인기가 좋다. 한신과 주니치는 팬 마케팅에 가장 적극적인 구단이다. 팬 마케팅에 미흡했던 요미우리는 2000년 이후 관중이 감소하며 지난해부터 공격적인 팬 마케팅에 나섰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이후 한신과 요미우리 선수 간의 라이벌전은 계속 이어졌다. ‘미스터 타이거스’ 무라야마 이노루와 ‘미스터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탈삼진왕’ 에나쓰 유타카와 ‘세계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의 대결은 일본 야구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들이다. 두 팀의 맞수 의식엔 지역감정도 한몫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해 그 이유가 가장 컸다. 한신은 센트럴리그 유일의 간사이 지역의 구단이다. 요미우리는 간토 지역을 대표한다. 간사이와 간토는 억양과 음식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의식 등 여러 면에서 차이가 크다. 우선 간사이인들은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인들에게 역사적으로 불만이 많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으며 천 년 이상 수도였던 간사이 지역의 교토를 뒤로 하고 간토 지역의 도쿄로 수도를 이전한 게 화근이었다. 간사이인들이 보기엔 당시만 해도 도쿄는 시골이었다. 지금도 간사인들은 도쿄를 ‘졸부’ 대하듯 한다. 여기다 많은 간사이인들이 근대 이후 도쿄 정치인들이 침략전쟁을 벌이는 통에 무고한 국민이 희생됐다고 믿는다. 그런 이유인지 간사이는 간토보다 반(反)군국주의, 평화주의 색채가 짙다.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신문인 ‘아사히신문’도 오사카가 원류다. 반대로 간토인들은 간사이인들을 ‘시끄럽고 불만이 많은 촌사람’ 취급한다. 일본 TV에서 간사이 사투리를 희화하는 건 전혀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특히나 오사카 출신이라면 사정은 더 하다. 하지만, 일본에선 지역감정이 아무리 심해도 이를 정치에 이용하지 않는다. ‘묻지 마 투표’나 유력 정치인의 비전이 아니라 출생지를 따져 정당을 지지하는 촌극도 빚어지지 않다. 대신 프로야구를 통해 지역색을 발산한다. 오사카 취재 중에 만난 많은 간사이인들은 요미우리를 ‘도쿄’와 ‘권력’을 뜻하는 상징으로 봤다. 그래서인가 한신과 요미우리전을 ‘약자가 강자에게 도전’하는, 혹은 ‘권력에 맞서는 투쟁’ 정도로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두 팀이 맞설 때마다 불꽃이 튀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한신의 최대 라이벌 요미우리.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만든 요미우리신문사의 쇼리키 마쓰타로 회장은 경시청 간부로 재직하던 1932년 간토(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 폭동 소문’을 유포해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경찰과 자경단이 휘두른 죽창에 희생되도록 배후 조종했다. 한신의 구단 노래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아이들'이라는 반전 노래를 개사한 것에 비춰보면 두 구단이 태생부터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74년 구단 역사 이래 우승은 고작 1회 마지막으로 일본야구팬들이 한신에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평범한 서민의 상징이자 일상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한신 프런트 가운데 어느 이는 자신의 팀을 가리켜 “일본의 리버풀”이라고 했다. 여기서 리버풀은 EPL(잉글랜드프로축구협회) 프로축구팀을 의미했다. 어째서 한신과 리버풀이 흡사한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홈 관중 다수가 평범한 서민, 근로자이니까.” 지난 2년간 고시엔구장을 방문할 때마다 느낀 것도 그랬다. 내야석은 한눈에도 방금 업무를 마치고 퇴근한 직장인들로 가득했다. 외야석은 작업복 차림의 근로자가 눈에 띄게 많았다. 본부석은 가족단위 관중이 많았는데, 특히나 부자(父子) 관중이 많았다.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문화평론가 이시가와 후다치 씨는 한신 팬들의 야구문화를 가리켜 “미국식 야구문화와 유럽식 축구문화를 그대로 이식한 듯한 전형적인 기층문화”라고 표현했다. 이시가와 씨는 한신과 고시엔구장을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소외된 오사카 노동자들과 소시민들이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 대상이자 억압된 감정을 배출할 수 있는 저렴하고 공개적인 장소”라고 일컫었는데 그것이야말로 리버풀의 축구문화와 1cm의 차이도 없는 공통점이었다. 리버풀 팬인 아버지의 뒤를 따라 아들이 "리버풀"을 외칠 확률이 90%를 웃돌듯 한신도 대를 이어 한신의 팬이 되는 게 자연스런 수순이라고 한다. 불행히도 부자의 사회적 위치가 그대로 이어질 확률이 그만큼 높다는 게 문제지만. 유전자가 되물림되듯 한신에 대한 열정과 애정도 대물림된다. 이 아이들이 커서 고시엔구장의 주인이 될 것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7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신은 일본시리즈 우승이 고작 1회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와 전통 그리고 이 팀을 스쳐간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를 떠올리면 믿기 어렵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한신 팬들의 충성도를 높이는 것일지 모른다. 이시가와 씨는 “한신 팬들이 자주 쓰는 말 가운데 ‘한신은 인생이다’란 것이 있다”며 “져도 다음을 기대하는 일이 버릇이 된 한신 팬들은 일희일비하지 않고 언젠가 일본시리즈 우승이 재현되리란 희망 하나로 버티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이러한 희망은 단순히 야구를 떠나 불행하고 고된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실제로 고시엔야구장을 찾는 많은 이들은 승패를 떠나 그날 경기를 지켜보며 휴식과 안정 그리고 일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받길 원한다. 지난해 한신은 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들의 우승을 애타게 기다리던 팬들에게 일본시리즈 우승을 선사할 기회를 잡았다. 정규시즌에서 요미우리에게 13경기 차로 앞서며 7월 22일 우승을 위한 매직 번호를 점등시킨 것이다. 당시 오사카 야구팬들은 ‘한국 타이거스’가 우승의 선봉이 되리라 예상했다. ‘한국 타이거스’라 불리는 사나이들 “한신 타이거스? 우리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재일동포 윤노박 씨가 고개를 흔들었다. 뼛속부터 한신 팬인 윤 씨가 말하는 ‘우리’의 정체와 ‘우리’라고 불리는 이들은 대체 한신을 어떻게 부르는지 궁금했다. “재일동포 뿐만이 아니라 일본인들도 자기들끼리 있으면 한신을….” 여기서 잠시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이후 2002년까지 무려 17년 동안 침체기를 맞았던 한신이 2003년부터 어떻게 강해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6년 센트럴리그 3위로 겨우 A 클래스를 기록한 한신은 이후 2002년까지 1992년 2위를 거둔 걸 빼고 전부 B 클래스에 머물렀다. 꼴찌만 10회를 기록했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는 아예 4년 연속 꼴찌를 도맡았다. 특히나 4년 연속 꼴찌를 기록할 때 이 가운데 3년은 일본판 ‘야구의 신’으로 불리는 노무라 가쓰야(라쿠텐) 감독이 재임하던 시절이다. 한신의 4번 타자 가네모토 도모아키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야구선수다.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지역에선 일본수상보다 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가네모토가 '김박성'이라는 이름의 재일동포 3세라고 해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예찬하는 사례로 쓰이는 건 철지난 우생학이다. 가네모토는 재일동포이나 법적으로 일본인이며, 일본이 생활의 터전이다. 가네모토라는 대선수를 판단하는 주요 기준은 국적과 피부색이 아니라 성적과 성실함이다. 사진은 지난해 개인통산 2천 안타를 돌파한 가네모토가 기자회견장에서 환하게 웃는 장면(사진=가네모토 HP) 천하의 노무라 감독도 어쩌지 못할 만큼 당시 한신은 구제불능이었고 엉망이었다. 그러나 2003년 호시노 센이치 신임 감독이 등장하며 모든 게 바뀌었다. 무엇보다 히로시마 도요카프에서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린 가네모토 도모아키의 영입이 큰 힘이 됐다. 가네모토는 한국야구팬들에게 낯익은 선수다. 2006년 4월 9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 경기에서 메이저리그의 칼 립켄 주니어가 세웠던 904경기 연속 ‘전 경기 전 타석 출전 기록’을 깨고 지난 시즌까지 1,330경기째 대기록을 작성 중인 철인(鐵人)이다. 여기다 센트럴리그 최우수선수(MVP) 1회, 베스트나인 7회에 뽑힐 만큼 센트럴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다. 가네모토는 출중한 실력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입단 첫해부터 한신을 이끌었고, 결국 팀을 18년 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비록 일본시리즈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소프트뱅크의 전신)에 시리즈 전적 3승4패로 지며 고배를 마셨지만, 가네모토의 영입은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FA 성공작으로 꼽혔다. 이후 한신은 2004년을 제외하고 B 클래스를 경험하지 않았다. 되레 2005년 재차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일본시리즈에 다시 도전했다. 이때 한신을 이끈 건 ‘한신 제70대 4번 타자’ 히야마 신지로였다. 한신의 침체기 때 팀의 홈런타자로 활약했던 히야마는 2005시즌 타율 2할7푼8리 8홈런 40타점의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한 방을 때리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가 없었다면 이해 팀이 거둔 87승 가운데 최소 5승은 패로 기록됐을 거라는 게 당시 일본야구계의 중평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해도 한신은 일본시리즈 제패에 실패하고 만다. 지난해 시즌 중반까지 맞수 요미우리를 13경기 차로 앞서며 센트럴리그 우승을 눈앞에 뒀을 때. 많은 한신 팬들은 연승의 주역으로 아라이 다카히로를 꼽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2007시즌까지 히로시마에서 뛰던 아라이는 FA 자격을 주자 과거 같은 팀에 몸담았던 가네모토의 뒤를 이어 한신 유니폼을 입었다. 아라이는 2008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하기 전까지 가네모토, 히야마와 힘을 합쳐 팀 타선을 이끌었다. 타율 3할을 훌쩍 뛰어넘으며 FA 첫해 준수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러나 베이징올림픽에서 돌아오고 나서 요통에 시달리며 팀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 사실 한신이 요미우리에 13경기 차가 뒤집히는 대역전을 당한 것도 아라이의 부상이 주요 원인이었다. 올 시즌은 세키모토 겐타로가 한신 타선의 중심이 될 전망이다. 지난해 136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9푼8리, 8홈런, 52타점을 거두며 다음 시즌 많은 기대를 모았던 세키모토는 올 시즌 5월 8일 현재 예상대로 타율 3할4리 1홈런 16타점을 기록 중이다. 앞에서 살폈듯 한신의 부활엔 역시 주요 타자들의 분전이 큰 힘이 됐다. 다시 윤노박 씨의 입술에 신경을 집중했다. “재일동포뿐만이 아니라 일본인들도 자기들끼리 있으면 한신을…” 여기서 윤 씨는 매우 또렷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한국 타이거스라 부른다.” 한신 타이거스를 한국 타이거스로 부른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짐작대로다. 한신에서 뛰는 주전 선수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가네모토와 히야마, 아라이, 세키모토는 예외 없이 재일동포였던 이들이다. 세키모토를 제외하고 이들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바 있고 히야마는 아직도 한국 국적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 외 투수 2명도 재일동포 출신이다. 한신의 히야마는 우리로 치면 안경현(SK), 양준혁(삼성)과 같은 이다. 한신 올드팬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선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그뿐만이 아니다. 한신 프런트 가운데 야마모토 노리후미 스카우트도 재일동포다. 한신 2군으로까지 눈을 돌리면 더 많은 이들이 한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어째서 오사카에서 ‘한신 타이거스’를 ‘한국 타이거스’로 부르는지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거 같으면 전형적인 '한국 비하'였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백인천 등이 함께 뛰던 도에이 플라이어즈를 가리켜 "조선 플라이어즈"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오사카에 재일동포가 많이 살고 가네모토, 아라이, 히야마 등 일본 내에서도 인기가 높은 선수들이 한신에서 뛰다보니 예전 같은 뉘앙스는 없다는 게 재일동포들의 전언이다. 한신 역시 다른 팀과는 다르게 소속선수들의 ‘재일’ 여부를 숨기거나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아는 안의 범위에서 사실 확인을 해줬다. 당연한 자세였다. 그들의 부모와 조상이 한국인이었다손 쳐도 귀화를 했으면 일본인이다. 그리고 일본프로야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일본팬들을 상대하며 일본에 세금을 내는 이상 국적과 피부색은 별 상관이 없다. 한국 국적을 고수하는 건 분명히 환영받고 존경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귀화한 이들을 ‘변절자’로 묘사하는 건 다문화 가정이 보편화 된 한국사회를 보더라도 과거의 고집일 뿐이다. 한신 프런트는 자국과 국외 언론을 포함해 창단 이래 처음으로 클럽하우스와 비밀지구를 <스포츠춘추>에 공개했다. 특히나 클럽하우스는 선수를 제외하고 허가받은 프런트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고위 관계자도 안을 들어가기 힘들다. 한신 측은 선수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클럽하우스 사진 촬영은 불허했지만 몇몇 비밀지구에 대해선 흔쾌히 촬영을 허가했다. 고시엔구장 옆에 위치한 한신의 구단사무소 겸 클럽하우스 건물. 이 건물 안에는 1, 2군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실내연습장도 갖춰져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한신 관계자의 안내를 받고 클럽하우스에 입장했을 때 뭔가 자석으로 끄는 느낌을 받았다. 누가 안내해준 것도 아닌데 기자는 가네모토의 라커룸 앞에 서 있었다. 한국프로야구팀의 시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은 라커룸이었다. 팀 내 최선참격인 가네모토는 ‘아니키(형님)’이란 별명을 듣는이답게 라커룸을 2개나 썼다. 그때였다. 그의 자리에서 낯익은 병을 발견했다. 소주였다. 순간 가네모토의 아내와 절친한 사이인 일본 마이니치방송(MBS)의 야기 사키 아나운서가 한 말이 떠올랐다. “가네모토 씨는 경기가 끝나고서 집에서 소주 마시는 걸 인생의 가장 큰 낙으로 삼는다”는 말이. 더 놀랐던 것은 가네모토의 라커룸을 중심으로 아라이, 히야마, 세키모토의 라커룸이 연달아 이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다른 어떤 팀원들보다 잘 어울린다고 한다. 오사카에서 만난 재일동포 야구인 한재우 선생은 “단결은 재일의 운명”이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신 클럽하우스는 지문인식 장치로만 입출입이 가능하다. 허가된 프런트만이 클럽하우스를 들어갈 수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재일의 운명이라, 맞는 말이다. 2년간 오사카와 도쿄를 드나들며 현역 재일선수를 포함해 원로 재일야구인들을 취재할 때마다 떠올리던 이미지가 있다. 비목어다. 동쪽 바다에 사는 눈이 한쪽에 하나밖에 없어 두 마리가 좌우로 달라붙어야 비로소 헤엄을 칠 수 있다는 상상 속의 물고기, 비목어말이다. 재일동포 출신 야구인들은 비목어 두 마리가 서로 의지해 결국 평생을 붙어 다녀야 한다는 ‘비목동행(比目同行)’처럼 서로 의지해 타국 혹은 제2의 고향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한국 타이거스’의 일원들처럼. 일본시리즈 우승을 위해 한국선수 영입을 고려중 지난해부터 한신은 한국선수 영입을 위해 공을 들였다. 스카우트를 한국으로 보내 주요 선수들을 관찰케 하고 리스트도 작성하도록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김동주(두산)의 이름은 없었다. 일본야구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그러기엔 김동주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였다. 누마자와 본부장은 “가능하다면 롯데 이대호를 영입해 한국야구계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며 “(이대호가) FA가 될 때까지 기다릴 방침”이라고 본심을 드러냈다. 현재 한신은 인내심 있게 이대호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이대호 이전 다른 한국선수가 고시엔구장을 밟을 가능성도 있다. 김태균, 이범호(이상 한화)이 유력한 후보군이다. 언뜻 김태균 영입에 비중을 둘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다. 한신은 애초 이범호의 3루 수비를 두고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제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기본이 잘 잡힌 데다 기교를 부리지 않는 성실한 수비력에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방망이는 원체 힘이 뛰어난 까닭에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게 한신의 생각이다. 만약 올시즌을 끝으로 FA신분이 되는 이범호를 한신에서 영입한다면, 한신 구단 사상 첫 한국출신 선수 입단이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승엽(요미우리)과 금세 경쟁구도를 형성하며 화제를 불러 모을 것이다. 한신 클럽하우스에 설치된 치료용 풀. 그날 투구한 투수와 부상 및 재활중인 선수가 모두 쓸 수 있는 최첨단 장비로 10억 원을 호가한다. 한신의 마무리 후지카와 규지와 중간계투 구보타 히로유키가 즐겨 사용하는데 구보타는 이 장비를 통해 허리부상에서 나은 경험이 있다. 이밖에도 한신은 선수들의 마사지를 위해 학교 교실만한 마사지룸을 따로 뒀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오사카엔 재일동포들이 무척 많다. 전통적으로 한신은 외국인 선수에게 연봉도 많이 주고 기회도 자주 제공한다. ‘한국 타이거스’의 멤버가 되느냐는 올 시즌 성적에 달려 있다. 한신은 이범호 영입여부와 상관없이 한국 선수를 데려오기 위해 동분서주할 참이다. 근래 미국과 중남미 출신 선수들의 기량이 만족스럽지 못해 웬만해선 자국리그에서 통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일까. 한신은 즉시전력감인 외국인 선수보다 외국인 유망주를 키우는 일에 열심이다. 10년 전부터 이미 외국인 유망주가 2군에서 육성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실제로 한신 2군엔 10대 중남미 선수가 심심찮게 보인다. 한신의 고위관계자는 “이범호를 비롯한 한국선수에 대한 관심은 우리팀을 우승시키기 위한 방편에서 나온 것”이지 “요미우리를 의식한 결과가 아니다”라고 힘줘 말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한신은 이승엽 중계로 요미우리가 능력 이상의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신의 중계권료는 1년에 30억 엔(약 380억 원)이다. 초고가다. 한신은 뛰어난 한국 선수를 영입하는 것과 동시에 요미우리처럼 자신들의 중계 영상을 해외로 팔길 원한다. '한국 타이거스' 멤버가 늘어날 가능성이 큰 이유다. 여기다 한신은 중계권료와는 별개로 한국야구팬들이 도쿄돔이 아닌 고시엔구장을 찾길 바란다. 자신들을 일본의 최고 인기구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2006, 2007년 홈관중 300만 명을 돌파한 팀이니,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한신은 더 이상 '촌스런 구단'이 아니다. 한신고시엔구장은 전통적으로 7회말이 시작하기에 앞서 전관중이 함께 '풍선 세레모니'를 한다. 30여초간 장관을 이루는 풍선쇼를 보기 위해 멀리 홋카이도에서까지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풍선 판매 이권을 오랫동안 쥐고 있던 야쿠자들 때문에 풍선값이 한끼 식사 만큼 비쌀 때도 있었다. 지금도 풍선은 결코 싸지 않다. 고시엔구장 여기저기에는 '불조심'이라는 문구 대신 '폭력배 엄단'이란 경고문이 붙어있다. 화려함 뒤에 숨겨진 일본야구계의 그림자다. That old law about "an eye for an eye" leaves everybody blind. The time is always right to do the right th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