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portsLeisure ] in KIDS 글 쓴 이(By): Param (GoSeahawks) 날 짜 (Date): 2006년 3월 9일 목요일 오후 06시 44분 21초 제 목(Title): 펌/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구글신? 검색해봤습니다. 키즈분들 기억력 대단하시네요. 출처는 오마이뉴스 기사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10480 모두가 환영한 해결사, 한대화 ① [블루그라운드가 뽑은 한미일 야구스타 100人 이야기 2] 박동희(yoonyung) 기자 박동희의 <블루 그라운드> 에서는 앞으로 한미일 야구스타 100인을 선정하여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독자분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야구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스포츠란 말이 있습니다. 이들 야구스타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 우리들 모두의 인생을 함께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시카고에선 단 한사람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소. 따라서 단 한사람에게만 인정받지. 그 외 모두는 날 벌레 보듯 한다오. 하지만 어쩌겠소. 이것이 내 일인걸." 전설적인 시카고 마피아 알 카포네의 수하였던 살라네모는 자신의 직업을 묻는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의 직업란에 무엇을 적어야할 지 명확히 알고 있던 시카고 검찰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알지 못하던 신출내기 FBI요원이 "그래도 좀 더 정확히…." 라고 요구하자 살라네모는 조용히 눈을 감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양이처럼 살며시 다가가 방울뱀처럼 한번에 끝을 내고 그림자처럼 은밀히 사라지는 직업이지. 사람들은 그런 나를 가리켜 해결사(trouble-solving broker)라 부른다오. 그게 바로 내 일(job)이지" 하수구에선 숨을 토하듯 수증기가 흘러나오고 과묵한 사내의 입술처럼 굳게 닫힌 창문들이 즐비한 시카고 뒷골목. 해결사 살라네모는 그 암흑가에서 자신의 일을 치루고 루이 암스트롱과 그의 밴드 핫 파이브(Hot Five)의 재즈가 흘러나오는 시카고의 열기로 들어갔을 일이었다. 외롭고 환영받지 못하는 은밀한 해결사.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으리라. 그러나 인생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모두가 사랑하고 환영한 해결사 여기 모두에게 환영받고 모두의 희망에 응답하던 해결사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한대화(韓大化). 그는 살라네모가 들었던 45구경 콜트식 자동 권총 대신 950g짜리 미즈노배트를 들고 암흑가 대신 그라운드를 누볐다. 단 한사람에게 한번의 청탁에만 몸을 움직였던 살라네모 만큼이나 그도 자신을 선택한 단 한 팀만을 위해 경기에 임했다. 살라네모가 그를 고용한 고객들을 배신하지 않았듯 그도 완벽히 팀과 팬들이 부여해준 절대절명의 순간마다 해결사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 다만, 살라모네는 알카트라즈 감옥에서 더 이상 해결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채 비명에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는 선수를 떠나 코치로 해결사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 1960년 7월 8일 대전에서 태어났다. 정구선 이후 별다른 재목이 없던 대전고에서 동기생 이광길과 돋보이기 시작한다. 고교시절 유격수와 투수로 자질을 보여준 그는 78년 세계청소년야구대회 준우승 당시 유격수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동국대로 진학한다. 현재 차세대 감독진들이라 평가되는 대부분이 그와 동기인 79학번 출신들. 전(前)롯데 양상문 감독을 비롯, 현(現) 롯데 박영태 수석코치와 한문연 배터리 코치 그리고 작년까지 LG에서 수석코치를 맡았던 황병일과 두산의 양승호 코치, 삼성의 이상윤 코치등이 동기다. 이때 그를 스카우트한 동국대 감독은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김인식씨가(현 한화 감독)이 아닌 배성서(전 빙그레 감독)씨.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서울에서 열리다 동국대 재학시절 입이 쫙 벌어질 정도의 대단한 두각은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연세대와 고려대 그리고 한양대가 나눠먹는 우승 파이에 동국대 역시 끼어들지 못하고 만년 준우승에 머무르던 터. 그러니까 당시 한대화는 평범한 학급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학생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기회란 언제나 그렇듯 미소 짓지 않고 찾아오는 법. 평범했던 그의 야구인생에 절호의 기회가 다가오니 바로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였다. 당시 82년은 한일월드컵이 개최되었던 2002년의 한국과 매우 닮은 모습이었다. 국민적 관심과 열정이 그러하였고 정부측의 지원이 그러하였다. 그리고 대회가 끝난 후 야구가 전국민의 최고인기종목으로 자리 잡은 것이 그러하며 무엇보다 대회가 만들어낸 슈퍼스타들이 그러하였다. 82년 정부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서울개최를 확정지은 후 곧바로 잠실야구장을 건설하였다. 당시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연일 대회 관련 보도를 내보내며 열띤 홍보에 나섰다. 특집을 마련하여 참가대상국의 전력을 비교하는 방송도 계속되었다. 건국 이래 가장 큰 구기종목대회를 국내에 유치했던 탓도 있었지만 정통성 없던 정부에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역량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덧 국민들은 대회가 개최될 82년 9월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열기와는 무관하게 당시 국가대표팀을 얼음처럼 차갑게 평가한다면 역대 최약체로 손색이 없었다. 이유는 국방부 브리핑처럼 매우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국가대표 주축을 이루던 많은 선수들이 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이미 아마를 떠났던 것. 아마야구 최고의 슬러거로 불리던 김봉연과 붙박이 3루수 김용희 그리고 외야의 중심이라 평가받던 대도(大盜) 김일권 등이 빠져있는 상황이었다. 투수진은 더욱 가혹해 하기룡과 불멸의 좌완 이선희가 프로에 진출해있던 상황이었고 양대 에이스 최동원과 김시진은 모두 부상을 안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야구협회가 정부의 총력지원을 받아 강제로 프로진출을 틀어막은 선수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 역대 최약체 국가대표팀 과연 우승할 수 있는가 건국 이래 가장 큰 스포츠행사란 명분에 막혀 프로진출을 뒤로 미뤘던 대표적 선수는 최동원, 김시진, 이해창, 장효조, 김재박, 심재원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이처럼 불평을 늘어놓기보다 진심으로 대표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나 이 선수들 중 대부분은 이미 군복무를 마친 상황에다 절정의 기량을 발휘하던 스타들이었기에 이들의 대표팀 잔류는 대가없는 희생이란 평가였다. 근간 WBC(야구월드컵) 출전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25년 전 이들과 비교한다면 지나친 연관일까. 아니 차라리 82년 멤버들에 대한 심각한 무례일지 모를 일이다. 아마잔류 스타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대표팀 감독 어우홍(전 청룡감독)의 머리에 균열이 생기긴 마찬가지. 이 때 어우홍 감독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타들이 빠진 상황에서 오히려 이름만 대서는 모를 신예들을 과감히 기용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대학선수들을 기용한 것. 그 대표적인 선수가 당시 고려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선동렬과 동국대 4학년이던 한대화였다. 야구공을 처음 손에 쥐기 시작할 때부터 국보였던 선동렬은 이미 대학무대를 평정한 차세대 에이스. 어 감독은 부상 후유증으로 시달리던 최동원, 김시즌 콤비를 무리하게 사용하지 않고 선동렬에게 미국전과 대만 그리고 일본전을 맡긴다는 복안을 작성하고 김용희가 빠진 3루수와 김봉연이 빠진 1루수에 누구를 기용할지 고민한다. 첫 경기 상대는 이탈리아. 참가팀 가운데 최약체로 분류되던 이탈리아를 상대로 승수사냥에 나섰던 대표팀은 그러나 어이없이 석패하고 만다- 설적이게도 이탈리아는 축구에 있어 한국이 악몽같은 존재지만 야구에 있어 이탈리아는 이 대회와 96년 올림픽 본선에서 한국의 발목을 잡은 악몽이었다-부상에도 불구 출전을 강행했던 김시진이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문제는 1점밖에 올리지 못한 타력부재. 거포들이 대거 빠진 대표팀 타선의 문제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2차전은 최강으로 분류되던 미국. 어 감독은 선동렬 카드를 내민다. 미국 투수진을 맞아 가뜩이나 불안한 타선에서 대량득점은 기대할 수 없는 처지. 선동렬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야 했던 상황. 한편으로 선동렬 신화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선동렬은 탈삼진 15개를 기록하며 막강 미국타선을 1점으로 봉쇄하는데 성공한다. 팀타선도 선동렬의 호투를 발판삼아 2점을 기록. 팀은 거짓말처럼 미국에 2대1 역전승을 거둔다. 이어 전승을 구가하던 대만전에서도 선동렬의 호투가 이어지고 대표팀은 연승을 구가하게 된다. 따로 결승전 없이 풀리그로 우승팀을 가리던 당시 대회규정상 이제 약체 호주전만 승리하면 일본과 실질적인 결승을 벌이는 상황. 그러나 한국에게 호주전은 엘리스 스프링스(Alice Springs)의 거대한 사막에서 벌이는 캥거루 사냥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9월 13일 열린 호주와의 8차전 경기는 14일 연장 15회까지 벌이는 사투로 이어진다. 결국 유두열의 끝내기 희생타로 승리하지만 나란히 7승1패를 기록하던 일본과의 실질적인 결승은 불과 몇 시간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 선수들의 체력저하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골프채로 타격하는 듯한 물방망이 타선이었다. ▲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기념우표 ⓒ 박동희 한국팀 최대의 위기 한대화 최대의 기회 먼저 일본전 선발투수는 선동렬. 선발투수를 낙점한 어우홍 감독은 이내 배팅 오더(batting order)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앞 경기까지 1번 타자였던 김재박을 우선 2번에 기용하고 조성옥을 1번 타자로 기용한다. 주포들이 모두 빠진 현(現)타선에서 그나마 홈런 3개를 기록하며 분전하던 이해창을 3번에 기용하고 교타자의 대명사 장효조를 4번에 배치한다. 문제는 다음 타선이었다. 대회 내내 포수 심재원을 중심타선에 배치했던 어감독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터. 타력보단 수비력에서 당대 최고란 평가를 받던 심재원을 계속 5번에 두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이 때 어 감독에게 배성서 대표팀 코치가 이렇게 조언한다. "요즘 대화가 감이 좋은 것 같습니다" '한대화라…' 어감독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다 수비연습을 하고 있던 한대화에게 눈을 돌렸다. 원래 유격수가 포지션이었지만 김재박이란 거목이 있는 대표팀에선 김용희가 부재한 3루를 맡고 있던 참이었다. 아무리 감이 좋다지만 이렇듯 큰 경기에 풋내기 대학선수를 클린업트리오(cleanup trio)에 기용할 수 있단 말인가. 어 감독은 잠시 주저한다. 모든 지도자들이 향후 받는 찬사의 99%는 당시에 그가 선택한 결정 때문. 어 감독의 배팅 오더 5번 타순은 공란으로 남겨진다. 82년 9월 14일. 대망의 일본전. 잠실야구장 스탠드에는 경기 시작 전부터 관중들이 가득차 있었다. 각 가정에서는 텔레비전 앞에 삼삼오오 모여든 시청자들이 초조한 시선으로 한일전을 기다리고 있었고 주요 역대합실에는 발걸음을 멈춘 승객들이 손을 모아 승리를 기원하고 있었다. 사담(私談)에 불과하지만 필자가 당시를 뚜렷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날 경기시작 1시간 전, 난생 처음으로 컬러 텔레비전이 필자의 집에 설치되었던 것. 어린 필자의 로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대회기간을 맞아 커러 텔레비전이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는 신문보도가 있었으니 비단 필자의 집이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듯 뜨거운 국민적 반응과 응원은 단순히 이 경기가 우승을 가리는 최종전이란 성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당시 일본과의 정치적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일본 교과서 파동으로 불렸던 당시 사건이 일본과 주변국간의 심각한 외교문제로 비화되고 이것이 감정적 마찰로 발전한 것. 중국과 한국 '침략'을 '진출'로 미화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만행과 책임을 교묘히 왜곡한 일본 역사교과서에 대해 한국은 대규모 규탄대회 등을 개최하며 강력히 규탄하고 있었다. 반일감정은 극에 달했고-그러나 당시 한국정부가 일본교과서를 이용하여 국내 정치상황을 왜곡하려던 측면도 있었다-이번 일본전은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국민적 여망이 조성되고 있었다. 'Be the reds' 티셔츠와 거리응원 그리고 붉은 악마란 조직적 응원단만 없었을 뿐이지 당시 열기는 2002년 월드컵을 능가하고도 남을 현장이었다. 드디어 잠실야구장 조명에 불이 들어오고 숨죽여 기다리던 관중들이 선수들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한다. 초공격을 담당할 일본팀 선수들이 배트를 휘두르며 결전을 다지고 있었고 한국팀 선수들은 글러브를 힘껏 움켜쥔 채 그라운드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때 누군가 3루쪽으로 스프링이 튕기듯 달려나갔고 한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지켜보다 이렇게 되뇌인다. '누구지? 저 선수는….' 그는 바로 한대화였다. 모두가 환영한 해결사, 한대화 ② [블루그라운드가 뽑은 한미일 야구스타 100人 이야기 2] 박동희(yoonyung) 기자 앞선 경기까지 9번을 치던 한대화였다. 9번 타순만큼이나 존재감이 희박했던 한대화가 주전 3루수에 5번 타순으로 전격 결정된 것이었다. '긴장하지 말게. 승리하면 조금 배울 수 있고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법이니까' 어우홍 감독은 크리스티 매튜슨(Christy Mathewson)의 명언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대화에게 무언의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라운드에 나가 있는 모든 선수를 향한 기도였다. 한편, 한대화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긴장감을 떨치려 애쓰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관중의 시선을 받으며 흥분하기도 처음이었지만 자신이 실수라도 한다면 그 모든 시선이 화살이 되어 날아올 것이란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대화는 글러브로 힘차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이렇게 다짐했다. '자 그라운드에 집중하자.' 역사적 한-일전... 흔들리는 선동렬 1회. 양팀은 선취점의 물꼬를 뜨지 못하고 소강상태를 이룬다. 한국 선발투수 선동렬은 썩 좋은 컨디션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의 묵직한 구질은 그대로였지만, 몸 역시 물에 젖은 이불처럼 무거워 보였다. 반대로 일본의 선발투수 스키즈 마사아키는 몸상태가 매우 가벼워 보였다. 어떤 불길한 조짐은 알프레도 히치콕의 영화처럼 어김없이 비명을 동반하는 법. 2회초 비명은 현실로 찾아온다. 선동렬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선동렬은 제구력 난조를 보이며 집중 3안타를 맞고 거기다 우익수 유두열의 실책이 가세해 순식간에 2점을 내주고 만다. 그러나 야구에서 초반 2실점은 숟가락에서 떨어져 나간 밥알처럼 대단한 실수가 아닌 것이다. '고작 2회초 아닌가. 초반 실점은 그것으로 족한 일이다.' 그렇게 한국 선수단과 관중은 조금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2회말 한국 타자들은 실점을 만회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일본투수 스즈키의 공은 좀처럼 배트에 맞지 않았고 한국 타자들은 삼진을 거듭한다. 더욱이 그의 공은 마치 먼지와 같아서 배트에 맞아도 멀리 나가지 않았다. 회가 거듭할수록 조금씩 불안감은 더해간다. 5회가 되도록 안타 하나 기록하지 못한 한국은 6회에서도 무안타로 물러나자 급전직하(急轉直下) 사기까지 떨어지는 분위기였다. 그나마 다행은 선동렬이 초반 실점을 딛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정도. 한국은 선동렬의 강속구와 제구력이 빛을 발하며 더는 실점을 허용하지 않는다. 6회까지 노히트노런... 한국은 이대로 무너지는가 어느덧 7회말을 알리는 전광판의 불이 들어오고, 서서히 관중 사이로 한숨과 탄식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코칭스태프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 이미 화석처럼 굳어 있는 상태였고 선수들은 서로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쳤지만 심장이 멎을 것처럼 답답한 눈치였다. "아, 한국... 지금까지 노히트노런을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MBC 캐스터 김용은 전 국민의 심정을 담은 듯 참담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스즈키는 과묵한 사육사처럼 놀라운 제구력과 변화구를 채찍 삼아 한국 타선을 압도하고 있었다. 도무지 빈틈이 없는 투구였기에 누군가 이 답답한 상황을 뚫어주지 않으면 결국 세계야구대회 결승 사상 처음, 노히트노런으로 승부가 결정될 분위기였다. 그때 타석에 한대화가 들어섰다. "한대화 빼고 다른 선수 집어 넣어. 무슨 여기가 백호기 대회야 뭐야." "야, 지금 당장 가서 김용희 데리고 와." 무기력한 한국 타선에 분노한 관중들이 한대화가 등장하자마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한대화의 귀에도 조용히 꽂혔다. 관중의 불만은 어느새 아마선수들이 편재된 국가대표팀에 대한 비난과 이미 프로로 진출한 유명 선수들을 향한 원망으로 변하고 있었다. '자 그라운드에 집중하자.' 한대화는 숨을 토해내며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슬렀다. 이윽고 스즈키의 공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날아오고 한대화는 힘껏 스윙을 한다.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한대화의 타격을 지켜보던 관중들이 갑자기 환호성을 질렀다. 안타였던 것이다. 한대화의 안타는 거대한 기름으로 혈관을 막아놓은 듯 답답했던 7회말까의 노히트노런 상황을 일시에 허물어뜨리는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쉽게도 후속타 불발로 7회말은 치욕적인 기록을 깨뜨린 정도로 마감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8회 반전의 기회는 찾아오고 8회말을 시작하는 한국 벤치 분위기에 묘한 자신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단지 7회말에 반짝 안타를 기록했을 뿐이었지만 그 안타로 인해 타자들은 어느 정도 용기와 희망을 회복하고 있던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 선발투수 스즈키는 조금은 힘이 든 듯 숨을 몰아쉬거나 어깨를 돌리고 있었다. 7회말을 비록 잔루로 끝냈지만 8회말은 뭔가 해낼 것 같다란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내 선두타자로 나온 8번 심재원이 스즈키로부터 귀중한 안타를 얻어낸다. 야구에 있어 선두타자 진루는 적진의 성문(城門)을 여는 격. 이제 할 일은 뒤돌아보지 않고 적진을 활보하는 것이다. 어감독은 다음 타자 정구선을 즉시 교체하고 김정수를 대타로 호출한다. 당시 고려대생이던 김정수는 특유의 넉살로 긴장을 감추며 타석에 들어섰다. 어 감독은 최대 진루타, 최소 범타로 물러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병살이라도 친다면 행운의 여신은 완전히 등을 돌릴 일. 초조한 심정의 어 감독 입술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김정수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스윙으로 어 감독의 기대를 넘어선 적시 2루타를 터뜨리고 선행주자 심재원은 양손을 치켜세운 채 홈을 밟는다. 드디어 첫 득점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 대타 김정수의 적시2루타 ⓒ KBS 자료사진 스즈키의 완벽한 제구력에 숨을 죽이고 있던 만원 관중은 일제히 일어나 열광을 하기 시작했고, 잠실야구장에서 터져 나오는 응원의 함성은 한강을 넘어 서울 전역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7회까지 노히트노런을 당하며 침묵하는 한국 타선을 원망하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던 전국의 시청자들은 옆집에서 '와' 하는 소릴 듣고는 다시 채널을 돌렸다. 현재 스코어는 1-2. 단 1점차였다. 일본은 스즈키가 급속도로 체력이 떨어졌다고 판단, 그를 강판시키고 구원투수 니시무라를 올린다. 어 감독은 일단 동점이 급선무란 판단하에 1번 타자 조성옥에게 번트를 지시하고 이는 성공하여 2루주자 김정수는 3루에 선착한다. 다음 타자는 2번 김재박. 그라운드의 여우, 쿨재즈 유격수 김재박(金在博). 현재 현대 유니콘스의 감독으로 최연소 700승 감독이자 팀을 4번이나 우승으로 이끈 명장. 선수생활은 MBC 청룡과 후신인 LG 트윈스 그리고 태평양 돌핀스를 거쳤고 프로 통산기록은 타율 0.273, 홈런 28, 타점 321를 기록했다. 통산안타는 972 안타. 프로선수 시절 기록만 본다면 지금의 감독시절보다 현격히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김재박의 전성기 시절 기록은 아니었다. 그의 전성기는 바로 아마시절의 김재박. 대광고를 졸업할 때까지 김재박은 이름만 대면 '그게 누군가?' 할 만큼 야구계에선 미아와 같은 무명의 존재였다. 야구의 변방이라 불리던 영남대에 진학한 이후부터 투수와 유격수로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던 김재박은 당시로서는 한국실업야구의 양키스였던 한국화장품에 입단하게 된다. 77년 백호기 타격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고 실업연맹전에서는 타격, 홈런, 타점, 도루 수위를 차지하고, 트리플브라운상과 신인상, 최우수선수상을 보태 입단 첫해 전무후무한 7관왕에 오른다. 당시 실업야구의 인기는 지금의 프로야구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고 수준 역시 높았기 때문에 입단 첫해 7관왕 수상은 '야구황제'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은 기적이었다. 호타준족의 대명사 김재박이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은 배트보단 글러브에 집중한다. 그의 수비는 지금 VTR를 돌려봐도 매우 아름답고 감미롭다. 필자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동대문야구장에서 벌어진 한국화장품과 롯데의 경기 - 당시 두 팀의 경기는 최대 빅매치였다 - 를 지켜봤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김재박의 수비는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의 쿨재즈처럼 부드럽고 여유로운 것이었다. 김재박은 강견(强肩)과 넓은 수비범위로도 유명했지만 부드러운 동작과 매끈한 글러브질의 대명사였다. 메이저리거로 표현한다면 데릭 지터(Derek Jeter)나 A-로드(Alexander Rodriguez)가 아니라 오마 비즈켓(Omar Vizquel) 정도라고나 할까. 그들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김재박이 지도한 제자 박진만을 떠올리면 무리가 없으리라. 다시 여기는 잠실야구장. 8회말 1사 주자는 3루. 당시 최고의 기량을 구가하던 김재박이 타석에 들어서자 2만5천여 관중은 '한방 날려 김재박'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볼카운트는 1-1. 그때 벤치에서 사인이 떨어졌다. 김재박은 잠시 벤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거리곤 배트를 힘껏 움켜쥐었다. 일본 투수 니시무라는 그것이 번트 사인이라고 예측했다. 결코 동점을 허용할 수 없었던 일본의 작전이 시작된다. 점점 김재박이 쥐고 있는 배트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고 어쩌면 강공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관중들 사이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쩌랴. 일본팀 포수가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것을. 바로 피치아웃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사인 미스인가? 절묘한 작전인가? 드디어 니시무라의 공이 홈플레이트를 한참 벗어나 좌측으로 빠져 날아가고 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을 잡으려 미트를 내민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재박이 피치아웃된 공에 번트 대는 것이 아닌가. 마치 마술상자의 삐에로가 튕겨나오듯 움츠렸다 펄쩍 뛰는 번트 모습에 - 훗날 우리는 개구리 번트라 부른다 - 모든 관중은 순간 놀라움과 탄식을 함께 내뱉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대실수가 어딨단 말인가. 피치아웃된 공을 치다니. ▲ 김재박의 유명한 개구리 번트 ⓒ KBS 자료사진 공은 3루를 향해 페어지역으로 굴러가기 시작하고 번트를 대리라 생각하지 못하던 김정수는 잠시 멈칫하다 이내 홈을 향해 질주해 들어간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놀란 것은 주자나 관중만은 아니었다. 의외의 역동적인 번트에 일본 포수는 깜짝 놀랐고 3루를 향해 굴러가는 공을 멈칫거리며 잡다 1, 3루 주자 모두를 세이프 시켜버리고 만 것이었다.(후일담이지만 어 감독은 김재박이 사인미스를 한 것이라 말했고 김재박은 사인을 제대로 본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누구의 말이 옳았든 결과는 두 사람의 손을 공평히 들어주었다) 한국팀에겐 부활절과 같은 상황이었다. 7회말까지 노히트노런을 당하며 굴욕적인 패배를 예매하는가 싶었던 한국이 8회말 기적의 동점을 이룬 것이었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설기현이 종료 직전 0-1 상황에서 기록한 동점골과 감동의 질량이 비슷한 현장이었다.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서고. 등을 돌렸던 행운의 여신이 반쯤 고개를 돌린다. 다음 타자는 3번 주장 이해창. 아마시절 김일권과 함께 도루왕을 나눠갔던 이해창의 별명은 '쌕쌕이'. 발 빠른 주자 김재박과 이해창이 타자라면 최소한 병살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어 감독은 이해창에게 강공 사인을 낸다. 이해창은 국제용이라는 찬사를 받았었는데 역시 빅매치에 강했다. 중전안타를 기록하며 상황을 1, 3루로 만든 것. 노히트노런만 면하자고 응원했던 관중은 한대화의 안타로 그나마 위안을 삼았던 터였다. 그리고 영패만 모면하자고 바랬던 야구팬들은 김정수의 2루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고 동점이 가능한가 싶었던 시청자들은 김재박의 기적 같은 번트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이해창의 안타로 전 국민은 조금씩 역전을 향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장효조의 등장. 술렁이는 관중석 그때 일본 투수가 세네키로 바뀌고 한국 타자는 4번 타자 장효조가 등장한다. 장효조는 소위 '안타제조기'란 별명을 듣고 있던 교타자였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그토록 약점 없는 타자도 드물었다. 그는 항상 배트를 짧게 쥐고 있었고 스윙동작은 절도있는 사관생도처럼 간결했다. 마치 그의 타격자세를 지켜 보노라면 내 자신의 인생도 반듯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지금도 '좌(左)효조 우(右)종모'란 라이벌 구도를 기억하고 있는 야구팬이 있으리라. 어 독은 장효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작전을 펼 것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어느 감독이 장효조와 같은 타자에게 도박을 걸지 않는단 말인가. 어 독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장효조를 응시하고 있었다. 장효조는 무리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있었다. 외야플라이가 아니면 느린 내야땅볼이라도 쳐야겠다 생각했던 장효조의 배트가 돌아가고 타구는 쏜살같이 2루를 향해 굴러간다. 그러나 최악의 타구였다. 전진수비를 하고 있던 일본 내야진에겐 절호의 병살 기회가 찾아 온 셈이었다. 일본 2루수는 공을 잡자마자 바로 송구를 시도하고. 한편의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해선 주연도 중요하지만 수많은 조연들의 활약이 더 중요한 법이다. 조연급 배우들이 차지하는 연기비중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게다가 조연의 역할에 적군과 아군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랬다. 82년의 드라마에는 한국 조연배우들도의 활약도 눈부셨지만 여기 일본 2루수는 누구보다 소중한 조연급 배우였다. 그는 공을 잡자마자 바로 송구를 시도했는데 그가 공을 던진 곳은 2루가 아니라 바로 홈. 무슨 판단이었는지 4-6-3 더블플레이를 시도하지 않고 홈으로 질주하는 김재박을 향해 공을 던진 것이었다. 김재박은 태그 아웃을 당했지만 장효조와 이해창은 가까스로 살 수 있었고 한번의 기회는 남은 셈이었다. 한국 관중과 코칭스태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현해탄 너머에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바까(バカ바보)'라는 단어가 후지산 높이만큼이나 쌓이고 있었다. "다음 타자가 누군가?" 어 독은 배성서 코치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화 차례입니다." 배 코치는 혹시나 대타를 기용하는가 싶었다. "음..." 어 감독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한대화는 성큼성큼 배터박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배 코치가 어 감독을 바라봤지만 어 감독은 묵묵히 한대화의 뒷모습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이 젊은 사내가 향후 15년간 한국 프로야구에서 해결사란 애칭을 달고 전설이 될 선수란 걸 예상이라도 했을까.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대화의 등장, 해결사 신화의 시작 한대화가 타석에 들어서자 관중은 소리 높여 한대화를 외쳤다. 노히트노런 행진을 마감하는 첫 안타를 때렸듯 이번에는 승부를 결정 짓는 결승타를 날려주길 온 국민은 소망하고 있었다. "그래 한대화 너만 믿는다." "이봐 대화, 독도까지 날려버려." 여기저기서 한대화에게 주문을 걸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대화는 향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일자로 묵묵히 다문 입술과 강인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상대 투수 세네키는 세트포지션 상태에서 잠시 숨을 토해내다 힘껏 공을 뿌렸다. 초구는 스트라이크. 한대화는 어깨를 툭 하고 들썩이다 이내 타석에 다시 들어섰다. 2구와 3구는 연달아 볼. 그러나 4구는 다시 스트라이크. 볼카운트 2-2. 세네키 회심의 5구가 포수의 미트로 빨려들어간다. 몸쪽으로 정확히 파고드는 속구. 그것은 스트라이크처럼 보였다. 이대로 결정적인 기회가 무산되는가 싶은 순간. 심판의 손은 흠칫하다 멈추고 만다. 또 한 명의 조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시간은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란 장편영화의 클라이맥스까지 다가오고. 8회말 2-2 동점, 주자는 1-3루, 볼카운트는 2-3. 이제 공 하나로 양국간의 승패가 결정지어지는 순간이었다. 한대화와 세네키의 눈빛이 섬광을 뿌리며 충돌하고 한국과 일본은 현해탄을 사이로 숨을 죽인 채 마지막 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세네키의 마지막 슬라이더가 폭풍같이 한대화를 향해 날아가고 한대화의 배트는 바람을 가른다. 깡! ▲ 한대화의 3점 홈런 ⓒ KBS 자료사진 둔탁하면서도 경쾌한 알루미늄 배트의 울림이 대기에 퍼졌다. 2만5천여 관중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고 MBC 캐스터 김용은 숨이 넘어갈 듯 "쳤습니다"를 외치고 있었다. 한대화도 스윙을 한 후 공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손에는 아직도 히팅시의 잔향이 남아있었다. 순간 한대화의 눈에 9월의 청량한 가을 하늘이 보였고 그 밤하늘로 산보나가는 유성이 보이는 것이었다. 솜털처럼 편안한 기분에 한대화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귀에는 아무 것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얼마든지 시간이 흘러도 좋을 것 같았다. 한대화의 눈이 조금씩 떠질 때 희미하지만 모든 관중이 일어나 두 손을 하늘 위로 치켜세운 것이 보였다. 엄청난 환호성과 기쁨에 들떠 울부짖는 소리가 조금씩 그의 귀청을 열고 있었다. "홈..홈런. 한국 홈런입니다. 한대화의 역전 스리런!! 국민 여러분..." ▲ 당시 잠실야구장 전광판 ⓒ KBS 자료사진 당시 MBC의 명캐스터 김용은 차라리 흐느끼고 있었다. 해설을 맡던 허구연도 예의 논리정연한 음성은 뒤로 하고 김용과 함께 '한국'과 '한대화' 단 두 단어만을 외치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흐느낌은 전 국민 모두를 대신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역대합실에선 열차를 놓치고도 마냥 신나 옆 사람을 붙잡고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가정에선 부모와 자식이 서로 손을 맞잡으며 식당에선 1년치 술을 거덜낼 만큼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애국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9월의 밤, 2년 전 슬픈 남도에서 울렸던 '애국가'가 국기게양식을 훨씬 넘은 시간에 전 국토를 흘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는 2002년처럼 어느 누구도 '대한민국'을 연호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정식호칭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어찌된 영문인지 '대한민국'이란 말은 지금의 인터넷 금칙어처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단어였다. 대한민국을 '한국'이란 단어로 짧게 부르기도 했지만 그것은 단어의 축약성이 주는 편리함때문도 아니었고 '대한민국'이란 단어가 신성함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은 더욱 아니었다. 독립기념관의 현판이나 정부 소식지에서나 있어야 하는 '대한민국'이었다. 거리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사람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일이었고, 공중의 장소에서 '대한민국'을 부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의 이념'을 훼손하려 작정한 사람들로 규정되었으며 거기다 붉은 티셔츠나 붉은 두건을 메고 '대한민국'을 연호했다면 그건 바로 '대한민국의 적'이었다. 아무리 환호해도 절대 '대한민국'을 외쳐선 안 되는 것이다. 이 나라의 모든 국적을 가진 자들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저 '우리나라'를 연호해야 하는 것이다. 1982년 9월 우리 모두는 그런 세월을 살고 있었다. 한국을 뒤흔든 10일. 세계재패 성공한 대한민국 야구 한대화는 반쯤 헬멧이 들려진 상태로 베이스를 돌았고 동료 선수들은 홈플레이트 주변에서 그를 맞이하였다. 대역전이었다. 한국 야구 사상, 아니 한국 스포츠 사상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역전승이었다. 저 멀리 어감독이 모자를 눈 밑으로 내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 감독의 스파이크 밑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승부는 5-2. 9회초 선동렬은 일본 타선을 범타로 처리하고 포수 심재원과 격정적인 포옹을 한다. 존 리드(John Reed)가 쓴 <세계를 뒤흔든 10일(Ten days that shook the world)>에 비유할 수 있는 '한국을 뒤흔든 10일'간의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한국의 우승으로 끝을 맺는다. 대회 MVP는 언터처블한 투구를 보여주었던 '미래의 국보' 선동렬.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미래의 '해결사' 한대화를 마음속의 MVP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83년 OB 베어스에 입단 예정이던 한대화의 신화는 이렇게 미풍을 탄 듯 순탄해 보였다. (이 지면을 이제는 고인이신 故심재원씨와 故김정수씨께 바칩니다) That old law about "an eye for an eye" leaves everybody blind. The time is always right to do the right th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