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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Gang ] in KIDS
글 쓴 이(By): clone (한시적좌파)
날 짜 (Date): 2003년 1월  1일 수요일 오후 06시 29분 24초
제 목(Title): 혹독하게 새해 신고식 치른 이야기



혹독하게 새해 신고식 치른 이야기


지금 하룻밤을 집 앞에서 꼴딱 새고 아침에 간신히 도둑처럼 창을 타고 넘어들어와
이 글을 쓴다.

문제의 발단은... 그래, 알스터 호수변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불꽃놀이들을 보러
갔던 것이었던 것 같다.  아직 걸음마를 걸을까 말까 하는 아기에서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들까지 엄청난 소음과 불꽃을 내뿜는 폭죽들을 잔뜩 들고 와서 
마구 터뜨리는 일대장관을 구경하고 나서 좋은 구경 했다고 하며 집으로 돌아
왔더랜다.

그런데 길바닥에 보니까 불발탄들이 여러개 있는 거 아닌가? 개중엔 심지가 
온전한 것도 있어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더랜다. 그래서 방에 들고 와서는
불을 붙이고 창밖에 던져서 터뜨렸드랜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불발탄이란게 진짜 불발이 되서 쓸 수 없는게
좀 남았다. 이 불발탄을 어디다 버릴까 고민하다가 그냥 창밖으로 던져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냥 방에서 던지면 될 것을 굳이 방 밖 
복도로 나와서 거기에 있는 창으로 던지기로 했단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불발탄을 처리하고 나서 다시 방으로 들어오려는 순간!

방문이 닫혀 있는 것이다! 

아 창을 열어 둬서 바람 때문에 닫혔구나.

문제는! 내가 열쇠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 방문은 닫으면 그냥 잠기는 구조라서, 밖에서는 열쇠 없으면 지가 
신창원이나 교강용 쯤 되지 않으면 아무리 열래야 열 수가 없다.

자, 순간 당황. 이를 어쩐다?

일단 창을 열어뒀으니 창문으로 들어가보자고 결심했다. 일단 창 밑에는 튼튼한
나무로 된 차양막 구조물이 있어서 2층까지는 그럭저럭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방은 3층이란 것이고 2층과 3층 사이엔 내 키 2배정도 되는
높이 차가 있다는 것이지. 여기 건물들은 방 높이가 쓸데 없이 높아서 층과 
층 사이 간격이 크다. (그래 니네들 키 크다 짜식들아. t-_-t)

옆에 빗물 홈통이 있어서 그걸 타고 올라갈까 했지만 너무 미끄럽다. 다시 
말하지만 난 신창원도 교강용도 아니란 말이다!

이렇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닭짓을 하는 동안 점점 추워지고...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이러다간 얼어죽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몰려온다. 이동네가 그리 추운
동네는 아닌데 올 겨울은 유난히 좀 춥다. 낯기온도 영하 3도를 오가는데
밤이야 말할 나위 있겠나?

실내에서 활동할 생각만 하고 나와서 입은 거라곤 딸랑 폴라티 하나하고 바지
한장이다. (속옷은 빼자.) 발에 신은 건 운동화도 아니고 슬리펴. 이걸로 밖에
있다간 얼어죽기 십상이다.

아파트서 나올 때는 문이 안잠기게 문에다 슬리퍼를 끼워 놨다. 여기 아파트는
보안을 위해서 밖에서 들어갈 때 한번 문을 열어야 하고 자기 flat에 들어갈 때
또 한번 열어야 하고 자기 방문을 또 열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기 방까지 세개의
문이 있는데 그중에서 두번째 문이 잠겨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거다. 

자, 생각해 봐라. 영하의 날씨,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슬리퍼 한짝만 신고
맨발로 뛰어서 왔다갔다 하는 남자를. 미친놈 취급 안받으면 다행이겠지?

어쨌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는 몸을 녹였다. 그리고 어떻게 굴러다니는 
쇠조각 하나를 들고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또 말하는데, 난 신창원도
뭐강용이도 아니라고.

결국 위기에 처한 시민을 돕는 민중의 지팡이 경찰을 부르기로 결심하고 
공중전화가 있는 역으로 갔다. 이번에는 슬리퍼 대신 지하에 있던 유모차 부속품을
문 틈에 끼워넣고 나갔다. 고맙다 아가야.

경찰에 전화하고 오돌오돌 떨면서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 순찰하던 사람이 있어서
경찰서 안으로 갔는데... 이 사람들이 무슨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문을
따는 열쇠집으로 연락을 해주겠단다. 그런데 여기도 1월 1일은 휴일이고 여기 
인간들은 휴일은 끔찍하게 지킨다. 거기에 새벽 2시에 누가 뭘 하겠나?
문 따는데 200유로라는데 (으윽 이거면 쓸만한 플랫배드 스캐너 하나 산다.) 
그마저도 아무도 없단다. 아침이나 되야 연락이 될거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다시 건물로 돌아온게 새벽 3시 반경. 열리지 않는 내 방문을 지켜보면서 더이상
돌아다니는 것은 쓸데 없는 에너지 낭비라는 결론을 내리고 어디서든 좀 누워서
자기로 했다.

잘만한 곳을 찾다 보니까 복도마다 온도가 다르더라. 내 방문 앞은 좀 춥고 해서
라디에이터가 있는 곳 옆에 자리를 잡고 그냥 누워서 잠을 청했다. 노숙하는
기분이 이런건가... 달랑 나무판대기 하나 너머엔 따뜻한 내 침대가 있고 먹을
게 있는데 이렇게 맨바닥에 맨몸으로 누워 잠을 청하려니 기분이 묘하더라.

크리스마스 휴가기간이라 여기엔 사람이 별로 없다. 여기엔 친구도 없고... 
있어봤자 새벽 3시에 문열어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꼴에 자존심만 세서 남
신세지는 건 죽기보다 싫어한다. 아는 친구들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곳에서
사는데 이 추운 밤중에 그 거리를 걸어서 갈 엄두도 안나고.

아침이면 열쇠집에 연락할 수 있을 테니까 자고 일어나면 되겠지 하는 생각도
작용했을 것이다.

자다가 결려서 몇번 일어나긴 했지만 그럭저럭 잘 잤다. 역시 인간은 적정 온도와
장소만 되면 어디서든 잘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가서 전화를 하면 문제 
해결이겠지.

전화를 했다. 적어준 번호가 둘인데 한군데는 아예 안받고 한군데는 다른 번호를
가르쳐주는데 아시다시피 나는 동전 몇개 빼면 아무것도 없는 빈몸이다. 적지 
못하니 외우려고 했는데 원채 추워서 머리가 안돌아간다. 추우면 신체기능 뿐
아니라 사고기능도 저하된다는 경험이 되는군.

거기에다가 이번에 나올 때는 문에다 끼워놓는 것을 깜빡 해버렸다. 당연히
문은 잠기고 난 이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거다. 


자, 내일 아침 한국 신문들의 3단기사 제목이 머리에 떠오른다.

  "한국 유학생 거리에서 동사체로 발견"

그래도 아침까지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에 여유가 있었는데 (여기 와서
는 것은 여유뿐이다.) 이제는 위기감이 닥쳐온다. 까딱하면 가십거리 기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날씨는 영하지, 바람 한번 맞으면 온몸이 덜덜
떨리는 지경이지, 가게도 뭐도 다 닫아서 갈 데도 없지...

좋다! 다시 한번 해보자. 창문으로 들어가기를 다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사다리 같은 도구가 없으면 불가능이란 결론을 어제 내렸는데...

그런데, 쓰레기장에 누군가가 버린 철제 침대틀이 보이는 것이다! 하늘이여!
모양은 딱 사다리 모양. 높이도 꽤 된다. 밤에는 어두워서 못본 것이다.

이걸 낑낑거리면서 옮겼다. 무게가 꽤 나가지만 그런걸 따질 군번이 아니지.
이걸 타고 차양막 대 위로 올라가서 다시 이걸 차양막 대 위로 올린다.
썩어서 밟으면 푹푹 휘어 들어가는 게 두번은 못 쓸 물건이다.
힘이 부쳐서 위태위태하지만 간신히 이걸 창틀에 걸치고 올라왔다.

도둑처럼 창을 넘어서 방으로 골인!

들어와보니 아침 9시다. 동사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아파트 복도 바닥에 누워
자면서, 평생 인연이 없을 것 같은 경찰서 신세도 지면서, 새벽 1시부터 
8시간 동안의 닭짓은 이렇게 끝났다.

한마디로 새해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른 샘이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까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무력한 인간인가 깨닫게 된다. 요즘 나태하고 자만하는 나에게
신명들께서 정신차리라고 내리신 시련이라 생각도 되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이렇게 글을 올린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주변에 퍼뜨리지 말고 자신만 알고 지내도록 하시고.
충분히 비웃어도 좋다. 사소한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법이지만 그걸 회복하는
데는 몇배의 노력이 필요한 법인 것이니까.

마지막으로... 열쇠는 항상 갖고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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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 "

                                                        - Porco Ross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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