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ason ] in KIDS 글 쓴 이(By): Betty (sundance) 날 짜 (Date): 2003년 5월 9일 금요일 오후 04시 04분 36초 제 목(Title): Re: 비오는 수요일. 어릴 때, 비 맞으며 다니는 걸 좋아해서 우산 잘 쓰지 않고 다녔는데 우산을 챙기게 된 계기가 있었어. 중학교 1학년 때였나, 단짝 친구가 있었는데 걔랑 집 방향이 같아서 늘 같이 다니곤 했거든. 하루는 하교하는데 집 근처로 거의 다 와서 비가 후두둑 내리기 시작했어. 우산도 없는데다 빗줄기가 세차지 않아서 난 빗속을 룰루 랄라 걸었지. 그런데 같이 걷던 단짝 친구는 얼굴을 찡그린 채 손수건으로 이마 부근을 가려 비가 얼굴을 적시지 않게 하면서 날더러 빨리 집으로 가자고 채근하는거야. 왜 그러냐고 했더니, 자긴 우산없이 비를 맞는게 너무 부끄럽대. 비맞는게 추워서 싫다라던가 뭐... 그런 이유가 아니라 비를 맞는 것이 부끄럽다고. 중학교 1학년때의 나를 생각해보면 외모를 꾸민다던가 다른 사람의 시선같은 것에 아무런 개념이 없었어서 그냥 나 좋을 대로 하고 지냈는데 걔는 좀 조숙했었나봐. 여하튼 비맞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가?하면서 그 이후로는 우산도 챙기고 다녔지(그때 나이의 두 배가 된 지금도 가끔 비를 맞는 걸 즐기지만 대부분 추워서 우산을 꼭꼭 챙겨-_-). 걔랑 나랑은 뭐랄까, 서로를 약간 샘내면서도 좋아하는 그런 전형적인 사춘기 소녀같은 관계였던 것 같아. 매일 붙어 다니면서 편지를 주고 받고 거기서 서로 속내를 털어 놓고.. 하하. 지금 생각하니 재밌네. 그리고 우리는 고등학교가 달라진 후 연락이 없어졌지. 그리고 십년 쯤 지난 때였나. 출근 버스를 기다리면서 정류장에 서 있는데 마침 신호에 걸린 차가 내 앞에 멈추는거야. 아무 생각없이 쳐다보는데 거기에 중학교 때 그 친구가 아기를 안고 앉아 있었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 친구랑 난 눈이 마주쳤는데도 인사도 못했고 금방 신호가 바뀌어서 차가 출발했지. 그렇게 우연히 만나지더라. 참 새침하고 여성스러운 애였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연애도 잘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큭. 그래서 결혼을 일찍한 것 같고, 아마도 품에 안고 있는 아기는 그 친구의 아이가 아니었을까. 난 성격이 좀 터프한 면이 있어서 여자친구들을 만나면서 샘을 내고 그랬던 기억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친구와의 기억은 그래서 조금 특별한 것 같아. 또 한 여자친구의 기억.. 내가 대전으로 가기 직전에 만났던 친구인데 영어학원에서 만난 친구였거든. 재밌게도, 꼭 중학교때 그 친구처럼 한참을 열불나게 붙어 다녔지. 그리고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도 편지를 주고 받았어. 마음얘기, 사는 얘기, 남자 친구 얘기, 책 얘기 등등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을까. 그 친구와 주고 받았던 편지 가운데 그 친구가 가장 자주 했던 말이 있었는데 세상. 참 살 맛난다. 멋지다. 라는.. 그런 말이었어. 그 애 속에는 강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서 내가 반했던 것 같아. 반대로, 그 친구가 날 좋아했던 이유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되는데 눈빛이 너무 순수해서 보호 본능이 일어난다고 했던가? 푸흐흣. 아 닭살이야^^; 그리고 그 친군 빨간색을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나. 내게 준 편지 가운데 <난 요즘 빨간 색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 그래서 빨간 가방. 빨간 립스틱. 빨간 티셔츠. 빨간 구두. 빨간 볼펜.. 심지어 빨간색의 생리혈까지 너무 좋다> 라고. 인상적이었나봐. 아직도 기억하는 걸 보면. 그리고 그 친구와 만난 후 두 계절이 지날 무렵 난 대전으로 떠났고 편지로 지속적인 연락을 했었지. 그 친구 모습을 그려서 편지에 동봉해 넣었던 기억도 난다. 입술에 새빨간 물감을 칠해서 어때, 너랑 닮았지? 하는 말도 덧붙여서.. 그 친구와도 오래지 않아 이상하게 멀어졌어. 대전에 있을 때 그 친구 생일날 도자기로 구워진 머그컵과 커피,크림병이 담긴 예쁜 바구니를 선물로 보냈는데 그게 산산히 깨어져서 도착했다나봐.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그 때 이후로 이상하게 우린 편지도 전화도 뜸해지고, 그친구가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완전히 연락은 끊어졌지. 나풀 나풀..거리는 나비 날개짓 같은 기억이네. 따뜻한 봄 볕에 투명한 빛을 흘리고 사라지는 나비 날개짓 같은. 으아. 비오는 날 우산 생각하다가 쓸데없는 얘기가 너무 길어졌군. 이주. 잘 살아야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