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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in KIDS
글 쓴 이(By): Lennon (유정이아빠)
날 짜 (Date): 2004년 10월 26일 화요일 오후 11시 27분 31초
제 목(Title): [펌] 입헌주의에는 ‘관습헌법’ 없다



한겨레에서 퍼옵니다.
지금까지 읽어본 중에 이 문제에 관한 가장 통렬한 글입니다.

보드의 썰렁함도 누그러뜨릴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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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주의에는 ‘관습헌법’ 없다


헌법재판소(헌재)는 대한민국 헌법을 심판 기준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헌법해석 기관’이다. 그 해석이 구속력을 가지려면, 그 결정은 최소한 
권위를 지녀야 한다. 그렇다고 결정의 권위가 총구나 여론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헌법해석의 논리적 설득력이야말로 권위의 유일한 샘인 것이다.

이번 신행정수도건설특별조치법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사건은 여느 사건과 달리 
역사적 무게가 막중했다. 그 만큼 헌재는 지혜를 총동원해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한다. 
그러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이번 위헌결정은 법상식의 테두리를 한참 벗어난, 
일종의 ‘정치적 비토 선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수의견은 헌재의 
결정이라는 이름으로 국민 앞에 내놓기에 부끄러울 만큼 모순과 배리 투성이다. 
당연히 논리는 온데간데 없고, 예단과 몰상식 그리고 억지가 서로 밀거니 당기거니 
어지러울 뿐이다.

예단은 법조인들이 경계해야 할 금기사항들 가운데 으뜸가는 항목이다. 
우리 헌법이 법관의 양심 조항을 특별히 마련해 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위헌결정의 다수의견은 ‘신행정수도건설 불가’라는 정치적 예단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런 정치적 예단은 합리적 논리를 제시하지 않은 채 
행정수도 건설을 수도 이전으로 못 박고, 수도 이전을 다시 ‘기본적 헌법사항’으로 
부풀리는 논리의 비약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독단은, 우연이 아니라 사회학적 상상력의 빈곤과 헌법학적 인식 지평의 
저급함에서 비롯된다. 한 나라의 수도는 말할 것도 없이 ‘다목적 기능복합체’다. 
정치적행정적 기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경제적문화적 기능이다. 
수도의 이런 기능 분화와 그에 따른 기능체계의 조정은 사회 발전의 결정적 지표다. 
수도의 기능 가운데 행정적 기능만 따로 떼내어 지리적 공간을 재배치하는 것은 
수도 기능의 합리적 조정일 뿐,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헌법학적 인식 지평의 저급함이다. 
수도의 소재지 문제는 기본적으로 법률사항이다. 물론 수도의 소재지를 
헌법에 명문화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수의견의 주장처럼 
‘기본적 헌법사항’이기 때문이 아니다. 헌법제정 또는 개정 당시
역사적 특수성에서 오는, 일종의 불가피한 ‘입법기술적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몰상식의 극치는 다수의견을 낸 헌법재판관들의 복고주의적 정신구조다. 
찬반의 입장 차이를 떠나 신행정수도건설특별조치법은 지리적인 공간 재배치를 통해 
국토의 균형 발전을 이루겠다는 우리 사회의 미래 청사진이다. 
그런데도 그 법률 자체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은 채 <경국대전>을 들고 나와 
한가롭게 나눈 독백 형식의 선문답은 더욱 충격적이다. 대한민국은 조선왕조의 
법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후계 국가’가 아니다. 하물며 헌재가 조선의 도읍지인 
한양을 연구하려고 모인 역사학 동호회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다수의견에 따르면, 수도 문제는 “국가생활에 관한 국민의 근본적 결단임과 
동시에 국가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핵심적 헌법사항”이라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이런 사항은 반드시 성문헌법에 규정하는 것이 
입헌주의의 기본상식이 아닐까? 이른바 관습의 테두리 안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라면, 이는 “국가생활에 관한 국민의 근본적 결단”일 수도, 
“국가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핵심적 헌법사항”일 수도 없다는 것 역시 
입헌주의의 기본상식이 아닐까?

답은 멀리 있지 않다. 다수의견을 낸 헌법재판관들은 이제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솔직히 밝혀야 한다. 자신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이념적 좌표가 입헌주의인지, 
반입헌주의인지 고백해야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입헌주의의 핵심은 ‘헌법의 성문화’다. 입헌주의의 사전에 
관습헌법이라는 말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입헌주의 아래에서 
관습헌법론이 고개를 든다면, 거기에는 필시 나름의 ‘곡절’이 있다. 
프랑스 제3공화국(1871년~1945년)이 그랬다. 제3공화국은 출범 당시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 탓에 헌법 제정을 나중 과제로 미뤄둔 채 
정부조직에 관한 법률 3~4개로 70여년을 버텼다. 성문헌법을 대신해 
관습헌법이 터를 잡을 입헌주의적 공간이 자연스럽게 열린 셈이다.

이런 극히 이례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관습헌법론은 대부분 입헌주의를 부정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나치 체제에서 형사법학자들이 ‘관습형법론’을 들고 나와 
나치 형법이론의 구축에 앞장 선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헌법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이마르 헌법체제에서 관습헌법론을 반입헌주의적 헌법이론 구축의 전초기지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루돌프 스멘트(R.Smend)이다. 그의 통합이론은, 
독일 최초의 자유주의적 입헌주의 헌법체제인 바이마르 체제를 부정하고, 
비스마르크 아래의 입헌군주주의 헌법체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반입헌주의적이다. 따라서 그의 통합이론은 성문헌법보다 관습헌법에 
더 무게를 둔다. 스멘트의 통합이론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시즘 헌법에 
일정한 영향을 준 역사적 사실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다수의견의 희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막간극의 주인공은 
다수의견에 동조하며 ‘별개의견’을 낸 헌법재판관이다. 
그는 여기서 졸지에 루소류의 ‘민중주의적 인민주권론자’로 탈바꿈해 
급진 민주주의적 기본권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외교국방통일 등 
국가안위에 관한 주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게 한 우리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의 정치적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한 임의규정이다. 이런 규정에서 
곧바로 국민투표권을 도출하는 것은, 기본권 이론의 입장에서 볼 때 
법사고의 파탄이나 다름없는 상식의 일탈이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그런 해석은 헌재가 견지해온 국민주권 관념이나 민주주의 이해와도 
크게 어긋난다. 헌법 비틀기도 이 정도면 도를 넘었다.

헌법 수호의 막중한 임무(제66조 2항)를 갖는 대통령은, 
헌재의 이번 결정으로 여지 없이 훼손된 입헌주의 전통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 국순옥  인하대 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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