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쓴 이(By): ellen 날 짜 (Date): 1995년04월27일(목) 13시43분24초 KST 제 목(Title): [퍼온 글] 1. 점쟁이가 쓴 칼잡이 이야기. [점쟁이]가 쓴 [칼잡이] 이야기 05/20 00:42 117 line 의사들에도 매우 여러가지의 부류가 있어서 밖에서 보기에는 매우 동질 적인 집단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이질적이다. 한 편에는 머리를 감으 면서도 자고, 빵쪼가리나 숟갈을 입에 문 채로도 자고, 엘리베이터 안에 서도 자고, 거의 언제나 잠에 취한 띵한 머리와 피곤에 지쳐 침침한 눈, 그리고 구두 속에서 빵빵하게 부풀어오르는 두 발을 무겁게 끌면서 투쟁 적인(?) ㄽ을 꾸려가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쪽에는 품위있게 일 요일과 공휴일의 여유로움과 취미 생활을 즐기는 행복한 이들도 있다. 물 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이 양극단 사이의 어디 쯤엔가 속할 것이지만. 의사라는 집단을 그들이 하는 일의 속성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대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선은 환자를 직접 보는, 임상가로서의 의사이 다. 많은 환자들이 직접 대하게 되는 일반적인 의사의 모습이다. 다른 한 편은 임상가에게 환자를 진료하는데에 있어서 필요한 정보와 지원을 주는 의사로서 -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열거하자면 - 진단 방사선과, 임상병리과, 해부병리과등이다. 마취과도 이에 포함시킬 수 있 을 것이다. 직접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가들을 좀 더 분류할 수 있을까? (과학이란 분류에서부터 출발하는 것!?) 물론이다. 나는 이렇게 분류하고 싶다. 의사들이란 연필 깎는 칼, 과도, 식칼, 회치는 칼에서부터 고전적 인 메스, 나아가서는 별들의 전쟁에 나옴직한 레이저 검으로 무장한 살 기등등한 칼잡이들 (제다이?), 그리고 화투짝에서부터 팔괘, 은나라 시대 의 거북 등껍질, 마법의 구슬, 청진기와 맨주먹, 내시경, 초음파, 전산화 단층촬영, 자기공명영상, 양전자방사단층촬영등의 온갖 종류의 점치는 도 구를 구비한 점쟁이들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여러 종류의 외과 의사를 말하며 후자는 내과계의 의사들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상당한 부분에서 모호해 질 정도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여 많은 일들을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 양 진영 간에 전통적인 기질의 어떤 차이란 여전히 느껴진다. 점쟁이들은 은근히 칼잡이들을 '무 식~한' 자들이라고 깔보려고 하고, 칼잡이들은 점쟁이들을 환자한테 해주 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조잘조잘 말만 많은 자들이라고 무시하려는 경향 이 조금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른 한 편으로 서로가 자기가 가지지 못한 상대방의 능력에 대해 감탄하고 흠모하는 애틋한(?) 마음이 없다면 그 얼마나 서로 짜증나게 티격태격거릴른지? (무력으로 싸우면 점 쟁이가 지지... 당연히...) 용한 점쟁이가 되보겠다고 애쓰는 중인 필자 로써는 인턴 시절에 경험했던 칼잡이들의 거친 세계(?)의 기억이 무척이 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의사면허를 딴다고, '의사 000'이라고 명찰 달고 다닌 다고 갑자기 의사 구실하게 되는 건 아니다. 손에 익지 않은 일들, 그러 나 실수하면 안된다는 중압감, 3월초, 막 병원 속에 던져진 인턴만큼 가 련한 존재가 있을까? 정신없었던 인턴으로서의 첫 한달을 거의 아비규환 의 응급실에서 보낸 나는 '이젠 겁날게 없다!'라고 용감하게 외쳤지만, 웬걸, 일반외과에 와보니 그게 아니었다. 역사는 장미가 피어있는 탄탄대 로가 아니라던가, 역사는 난세의 연속이라던가, 엄청난 일이 나를 짓눌렀 다. 어스름 새벽부터 하루 종일을 서서 수술장에서 보내야 하는 일은 그 다지 만만한 일은 아니다. 친애하는, 당시 나의 직속상관이었던, 유난히 도 많은 아침잠 때문에 고생한다던 1년차 레지던트 선생님의 한 말씀이 지금도 기억난다. "야... 지동아, 임마... 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아니? 이렇게 생각하면서 일어나지. '어머니, 왜 날 나셨나 요!'" 흐... 그 처절한(?) 절규...!? 헌데, 이 칼잡이들의 멋진 세계의 진짜 매력은 일의 그런 엄청난 압박 감에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이 힘들다고 절대 자빠져 서 쉬질 않는다. 가자! 하면 전원이 일을 내동댕이치고 5분 이내에 출동 이다. 어디로? 히히... 술 마시러... (에구... 당직한테 인계 다 하고 가 는 겁니다. 오해마시길...) 이들의 모토는 간단하고도 명쾌하다. 먹고 죽 자! 뭐 꼭 무슨 날이라야 거창하게 먹는 건 아니었다. 그당시 만약 누군 가 나에게 인턴이 학생보다 나은 점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했 을 것이다. 첫째, 시험이 없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는 밤에 당직실에서 통닭에 캔맥주 시켜먹는 거... 헌데 술 먹고 일단 사망했다고 해서 일을 안해도 되느냐? 음... 그거야말로 천벌받을 소리다. 밤에 인턴이 해야하 는 주 업무중의 하나가 다음 날 대장 수술할 환자가 있을 경우에 하는 소 위 'till-clear enema'라는 것이다. Enema란 '관장'이다. 즉 대장 수술을 하려니 대장 안을 깨끗이 해놓아야 하는데... 근데 'till-clear'란? 어느 정도 깨끗해야하는 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흠... 혹시 식사 중은 아 니시겠지요?) '관장해서 나온 물에다가 커피를 타 마실 수 있을 정도.' 윽... 꽈당... 술 마신 후 거의 빈사상태가 되가지고 새벽에 환자를 깨워 이 엄청난 난공사를 시작할 때의 그 비감한 심정이란... '젠장, 인턴이 뭐 똥푸는 사람인가?' 생리식염수 약 20통 정도를 갖다 놓고 "자, 지금부 터 이게 환자 분 뱃 속으로 다 들어갑니다."하면 이번엔 환자가 윽... 꽈 당... 술냄새 펑펑 풍기며 새벽 잠을 깨워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나를 환 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요사이의 세태로 보아서는 거의 멱살잡히고 고 소당할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들 중에는 이 till-clear enema로 인해 퇴원하는 환자에게서 고맙다며 양주(왜 하필이면 양주?)를 촌지로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요사이는 먹는 관장약이 나와서 인턴의 이런 수고 를 덜어준다고 한다.) 수술이란, 특히 네명이 한팀이 되어 하는 일반외과의 수술이란 팀웍이 절대적이다. 요즘 TV드라마에서는 웬 초악덕 chief가 등장해서는 연약한 주인공을 잔인하게 괴롭히던데, 그래서야 어디 같이 살 맞대고 살겠는가? 인턴의 위치는 집도의의 바로 옆이고 주 임무는 '땡기는' 것이다. 부르스 를 땡기는 것도 , 지루박을 땡기는 것도 아니다. 집도의의 시야를 확보하 기 위해 주변 장기들을 당겨주는 것이다. 헌데 이 머리 쓸 필요없는 육체 노동이, 계속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려면 제법 힘이 드는 일이다. 팔 은 저려오고, 힘은 빠지고 스르르 당기던 것이 늦춰지면 집도의의 신경질 적인 반응이 대뜸 날아온다. 그래서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울며 겨자 먹 기로 당기면서 건너 편의 1년차 레지던트에게 눈을 깜빡깜빡, 움찔움찔, 구조 신호를 보내면 곧이어 믿음직스러운 그의 손이 건너와서 나의 부들 부들 떨리는 왼손을 턱하니 받쳐준다! 햐... 이런 고마울데가... (하지만 수술 끝난 후에, 다시 기억에 남는 한 말씀 '얌마... 체력 좀 길러라... 그게 뭐냐? 체력은 국력이라는거 아~냐~!') 칼잡이들은 순식간에 엄청난 일들을 과감하게 해치워버린다. 한 유명한 노교수님의 수술에 들어가 "땡기게" 되었는데, 간암을 절제해내는 수술이 었다. 종양이 크고 주변에 유착까지 되어있어 잘 떨어지지지를 않아 무척 이나 어려운 수술이었다. 몇시간의 혈전(문자 그대로다.) 끝에 마침내 종 양이 떨어지려는 순간인데 갑자기 엄청난 출혈이 생겼다. 종양과 붙어 있 던 하대정맥(inferior vena cava: 이것은 우리 몸에서 가장 큰 정맥중 하 나이다.)이 찢어진 것이다! 혈압은 곤두박질치고 피는 샘솟듯이 차서 넘 쳤다. 마취과 의사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양 손에 수혈 백을 들 고 피를 쥐어짜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집도의께서는 자그만 눈을 깜빡깜빡거리더니 피나는 부위를 덮어누르고는 잠시 멀뚱멀뚱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위급하고도 황당한 상황에서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리곤 한말씀, "피 좀 나네요~ 잉..." 으이구... 누가 피 나는 줄 모르 나? "IVC clamping (하대 정맥을 겸자로 잡아서 일시적으로 혈액순환을 차단하라는 뜻)하고... 마취과 선생, 혈압 떨어질테니껜 피좀 주쇼잉?" 마취과 의사는 거의 필사적으로 피를 짜대었지만 집도의는 태연한 표정으 로 침착하게, 그러나 엄청나게 빠른 손놀림으로 찢어진 하대정맥을 꿰메 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수술은 끝났다. 이것이 surgeon(외과의 사)이다! 용맹한 사자의 심장, 냉혹할 정도로 차가운 판단력, 그리고 섬 세하고 부드러운 숙녀의 손길! 정말 칼잡이다! 의사들이란 대체적으로 고생스런 젊은 날들을 보내기 마련이겠지만 외 과의사들의 길은 특히나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꿈만 꾸면 뱃속에서 장이 쏟아져 나오는 악몽에 시달린다는 그들... 나는 결국 가시밭길이 싫어서 칼잡이의 길을 가지 않았다. (대신에 자갈밭에서 박박 기는 중이다.) 칼 잡이들을 진심으로 흠모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에 만족한다. 나에게는 비장의 초식을 구사하는 무림의 고수같은 칼잡이보다는, 요사스럽게 연기 나 피우면서 '에~잉... 이 사람 얼마 못살게쪄!'하고 재수없는 소리나 내 뱉는 점쟁이가 아무래도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후후... - 이 글을 지금은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계실, (제가 인턴일 당시 일반 외과 1년차이셨던) 김선생님을 포함한 제가 존경하는 모든 칼잡이님들에 게 바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