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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in KIDS
글 쓴 이(By): freeway (limelite)
날 짜 (Date): 2000년 12월 11일 월요일 오후 08시 34분 41초
제 목(Title): [펌]의료계 파업 아닌 의사 그들만의 폐업


(어나니에서 글을 보고 다음 웹페이지를 방문 퍼옵니다.
http://www.digitalmal.com/article_final.asp?ex_category=4&ex_part=&page=1
&parent_file=default.asp&ex_code=0000000933)

최은영 서울대학병원 간호사

한여름에 시작됐던 의사들의 파업이 벌써 계절의 옷을 갈아입었다. 의약분업이라는
낯선 의료환경에 노출되면서 그저 번거롭고 귀찮게만 여겼던 이 제도에 우리는
서서히 적응해가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 부담만 늘린 채 정부와 의료계의 담합으로
종결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이번 사태의 종착역은 과연 어디쯤일지 아무도 속시원히
말할 수 없다. 여기에 한 간호사가 말한다. “이의 있습니다.” 

7월 말, 의사들이 파업을 한다고 했다. 퇴원이 임박해 있는 환자는 서둘러 퇴원을
했고, 입원환자는 받지 않았다. 위독하거나 퇴원을 할 수 없는 환자만이 병동에
남았다. 그리고 의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병동은 술렁거렸다. 나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렇게 완벽한 파업은 처음이었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참여하지 않다가도 고민을 거듭하며 갈등을
하면서 파업에 참여하는 조합원들도 있으련만 독일병정의 기간사단마냥 파업의
나팔소리가 울리자마자 병동에서는 정말 의사들을 볼 수가 없었다. 환자 상태가
안 좋아서 전화라도 할라치면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냐” “나는 모른다”
라고 대꾸하기 일쑤다. 어떤 인턴은 “병동에 나타나면 혼나요” 라고 말할 정도다.
파업장에 있으면서도 가슴 졸이며 환자상태가 나빠지지는 않는지, 혹시나 방송으로
응급상황이 나오지는 않는지 노심초사하며 파업을 하던 우리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은 파업도 저렇게 하는구나’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암묵적 지지를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병원의 애매모호한 태도도 그렇고,
그들을 탄압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정부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집단
성과 단결력이 놀라웠다. 상명하복의 군대의 질서와 유사한 의사들의 질서를 새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대체인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손을 놓은 것이다. 환자의 생명을 책임졌던 사람들이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미련 없이 그 책임의 끈을 놓아버렸다. 환자는 졸지에 책임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파업’이라고 안 하고 ‘폐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노동
자들의 파업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그러는 건지, 아니면 폐업을 각오하고 파업에
임하기 때문에 그러는 건지, 그도 아니면 파업이 갖는 이미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건지 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아직도 어느 한 군데 파업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나는 의료법에 명시된 소위 의료인이지만 파업에 참여하지도 않고 찬성하지도
않는다. 이 파업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간호사도 아니고 의료기사도 아닌 의사
이다. 정확하게 의사들만 파업하는 것이지 의료계가 파업하는 것이 아니다. 병원
밖의 사람들은 병원에 함께 근무한다는 이유로 병원 내부의 직원 모두가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의료계 파업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린 결코 같은 배를 타고 있지 않고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데. 뭉뚱그려서 마치 병원 구성원들 모두가 파업하는 것처럼 말하는 혼선은
없어졌으면 한다. ‘의료계의 파업이 아닌 의사 그들만의 폐업’이다. 

신규간호사의 의료관행 수업

햇병아리 간호사 시절. 병동에서 근무하다 보면 웬 남자들이 간혹 찾아와 묻는다.
무슨 무슨 약 요즘에 얼마나 쓰냐고. 뭣도 모르는 신규였을 때 ‘참, 별걸 다
묻고 다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것이 말로만 듣던 제약회사 리베이트라는 건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알았다.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제약회사에 들어갔던 친구의 말은 신규였던 나에게 충격이
었다. 병원에서는 항생제를 다수 사용하는데 자사 제품 항생제를 채택했을 경우에는
채택비를, 항생제의 사용량에 따라 계산된 현금으로 제약회사에서 의사에게 지불
한다는 사실이다. 더 가관인 것은 제약회사와의 결탁이 언론에 보도되고 나서는
현금으로 지급하던 것을 일부 줄이고 세미나를 한다든지 학회를 한다든지, 아니면
회식이나 연말 송년회 때 한 뭉텅이씩 챙겨주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더구나
회식자리에 나타나서는 술시중도 들고 그 약의 처방에 대한 보고까지도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결국 환자들은 대부분 2-3차 항생제를 턱없이 높은 가격으로 불합리하게 지불하며
처방받고 약제 내성까지 생겨 부지불식간에 건강을 훼손당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
들은 약장사를 통해 수입을 보전하고 유지시켜왔다. 지금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병원에서 근무한 지 8년째지만 아직도 제약회사 직원은 병원을 찾아오고, 약품의
사용량을 묻고 확인하고 점검한다. 진료과나 진료하는 사람에 따라 항생제가 지정
되어 있는가 하면 제약회사에서 한 번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새로운 항생제만이
사용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의약분업이 시작돼서 약품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의사들 스스로 이렇게 누려왔던 권리를 자진반납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입원비, 진료비 말고도 또 다른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환자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으로 누구는 얼마를 줘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다. 돈의 액수가 그 사람의 사회적 명성을 반영하듯 그만큼의
촌지가 오고갔다. 

환자나 보호자들은 간혹 “**선생님 방이 어디냐”고 묻는다. 환자나 보호자들의
용무 때문일 때도 있지만, 교수가 회진을 하면서 “방으로 오세요”라고 한 경우일
수도 있다. 그래서 친절히 가르쳐 주면 결국은 “** 선생님은 얼마나 줘야 되느냐”
고 되묻는다.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눈치를 봐가면서 살짝 묻는다. 짧은 시간
동안 회진하면서 자세히 듣지 못한 환자의 상태에 대해 상의를 할 수도 있는 거고,
앞으로의 치료계획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불순한
생각이 드는 것은 세상을 나쁘게만 바라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의사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고위권력층의 이름만 사칭해도 몇 십억의 대출도
무사통과인 사회에서 어찌 그들만을 탓할 수 있을까? 견물생심이 기본인데 돈
주는데 싫다고 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비양심적이고 잘못한 것을 모르는 척 덮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파업으로 변화된 것들

전국민 의료보험이라는 허울 속에서 참 많은 것들이 이뤄져왔다. 환자는 환자대로
약물 오·남용의 피해자가 되고, 의사는 의사대로 저수가 정책 속에서 낮은 진료
비를 보전하기 위해 무리한 약처방을 강요하는 약장사로 전락했다. 약사는 끼워
팔기, 임의조제의 대명사로 낙인찍혀 그 이름을 더럽히게 됐다. 정부는 국민의
건강을 담보로 불법을 묵인해주고 전국민 의료보험을 유지시켰다. 2000년 7월 1일,
의약분업이 시행되어 의사들의 파업이 계속되는 지금까지 무엇이 달라졌을까?
의약분업의 취지는 과연 유효한 것일까?

의료수혜자 입장에서 비용은 증가했다

내가 근무하는 병동은 신경외과이다. 뇌종양 환자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환자들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믿고 제주도에서,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상경한다. 입원교육을 하고 나면 대부분 하는 질문이 비슷하다. 입원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수술비는 얼마나 되는지, 치료받으면 나을 수는 있는지. 
심한 두통을 호소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입원했던 할머니는 뇌종양이 재발된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 다인용 병실이 없어서 2인용 병실에 머물렀고 약을
쓰면서 증상이 잠깐 호전되자 보호자는 담당교수와 상의도 없이 갑자기 퇴원하겠
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그럴 경우 십중팔구는 병원비 때문이다. 2인용 병실은
식사료 포함해서 하루에 10만원 정도이니 호텔비에 맞먹는다. 비싼 호텔방에 진단
이나 경과추이를 위해 MRI 등 몇 가지 검사만으로도 1백만원은 후딱이다. 어디
그뿐인가? 보호자는 보호자대로 좁디 좁은 장의자에서 24시간을 부대끼며 환자
간호에 시달린다. 맞벌이하고 핵가족화돼 있는 요즘에는 많은 가족들이 환자간호를
위해 별도의 간병인을 고용해야 하는 실정이다. 간병료로 하루에 3만원에서 5만
원을 추가로 부담하면서 말이다. 다행히 집안이 넉넉해서 돈걱정 안 하고 치료
받으면 모르겠지만 평범한 월급쟁이가 한꺼번에 목돈을 지불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가난과 질병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항상 따라다닐 수 밖에 없는데 지금의 의료
보험은 할인쿠폰의 역할밖에 할 수 없다. 정작 돈이 별로 안 드는 감기치료에는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고가장비를 사용해야 하는 질병의 경우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민을 털끝만치도 생각지 않고 의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보수가를 인상했다. 국민의 사전동의 없이 의보수가를 인상
했으면 국민들에게 보험급여를 확대한다든지, 본인부담금을 인하한다든지, 과다한
진료비가 들어가는 환자에게는 경제적인 보호장치를 마련한다든지 해야 하지
않을까? 혜택의 확대가 하나도 없는데 돈만 더 내야 한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이에 동의를 하겠는가? 

불편 또한 증가했다

우리 집 꼬마는 감기를 달고 산다. 태어날 때부터 주치의 제도를 실현(?)하느라고
소아과를 지정해놓고 다녔다. 환자에 대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어 환자상태를 가장
정확히 잘 알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웬만하면 주사제를 안 주고 먹는 약으로
치료하려는 의사의 태도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의약분업이 시행된 후 약을 사기가 어렵다. 처방전을 들고 근처 약국을
찾았으나 처방전에 기재돼 있는 똑같은 회사의 똑같은 제품이 없어서 약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옆집도 마찬가지였다. 가래를 묽게 해주는 약 하나 사는데 제약
회사가 달라서 이 약국 저 약국 전전긍긍해야 했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서도
특수한 약이 아닌 경우는 제약회사를 달리해서 쓰는데 얼마나 다리품을 더 팔아야
하는지 짜증이 났다. 상품명이 아니라 성분명을 가지고 조제하는 대체조제가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새로운 제도의 시행에는 항상 새로운 비리가 따라붙는 게 우리나라다. 어느
병원약은 어느 약국이 지어준다는 식으로 짝짓기를 하는 담합행위가 생기고 있고,
대체조제가 의사요구쪽으로 기우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리베이트의 망령은 다시
부활했다. 모 제약회사의 직원이 양심선언까지 하지 않았는가? 병원은 약가마진으로
줄어든 수입을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또 다시 로비는 시작됐고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의료소비자의 알권리가 또다시 짓밟히고 있다

의약분업을 하면서 처방전이 공개됐다. 2장의 처방전을 받아 하나는 약국이 다른
하나는 환자가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처방전에 병원이나 의원명을 기재하니
보증도 확실하고 환자가 처방전을 가져갈 수 있으니 병원들의 처방을 비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산골짜기나 제주도에서 가방꾸러미 들고 진료하는 의사의 약이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본다는 큰 대학병원의 이름 있는 교수가 처방한 약이나 동네
의원에서 처방한 약이나 별반 차이 없다는 것을 환자들이 알면 과연 비싼 차비와
비싼 진료비에 시간까지 버려가면서 굳이 대학병원을 찾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3차에 과잉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잘못된 의료체계를 바꾸는 데 일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10월 24일 의·정합의 발표를 듣고 참으로 이 땅의 환자와 국민은 알 권리
조차 없구나 싶었다. 처방전을 2매에서 1매로 줄여 환자보관용을 없애고, 처방전에
병명코드와 병원·의원명을 기재하지 않도록 하자는 의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처방전서식개선협의회’에서 추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환자들이, 국민들이 알면 안 되는 것들이 그 처방전 속에 얼마나 들어
있길래 최소한의 알 권리조차 박탈하려는 것일까? 과자 한 봉지조차 실명제를 하는
세상에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약처방전의 실명제를 거부하는 의사들은
뭐고, 또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정부는 도대체 무엇인가? 

의료는 의사들만의 것이 아니다

의사들은 보건의료발전특별위원회에 의사가 과반수 이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0월 24일 의·정합의에서도 진찰료·보험료 조정, 수가적정화를 위한 재정
조달계획, 수가계약 항목, 전공의 처우개선 등 의사들이 요구한 것을 보건의료발전
특별위원회에서 다룬다고 했다. 의사들과 정부는 의료가 의사들만의 것인 양 착각
하고 있는 듯하다. 환자, 국민이 없다면 의사는 누구를 치료하면서 밥벌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더 60, 70대 환자들이 20, 30대 의사 ‘선생님’ 앞에
허리를 조아려야 의사들은 만족한단 말인가? 

의사들이 파업하면서 제일 많이 외쳤던 말이 ‘의권쟁취’였다. 그리고 우리가
파업할 때 부른 ‘철의 노동자’라는 노동가요를 개사해 ‘철의 전공의’라고
하는 것도 들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의권이 뭘까? 도대체 의권이 뭐길래
저리도 외쳐대는 걸까 고민했다. 내 주위 많은 사람들은 의사들이 의권을 ‘의권
신수설’ ‘의권천부설’ 쯤으로 아는 것 같다며 혀를 찼다. 의사들이 의사라는
직업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준 것은 하늘이 아니라,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
받은 것이 아니라 바로 국민이 주었다. 의사가 되기 위한 절차인 의사자격시험
이라는 제도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았나. 정말 의사들이
진정한 의권을 바란다면 돈(진료수익)에 얽매여 환자를 제대로 볼 수 없게 하는
각종 병원정책과 맞서 싸워야 한다.

아직 우리 병원은 의사들의 연봉제를 실시하지는 않았다. 연봉제는 환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기 때문에 병원에서 어떤 직종도 연봉제를 해서는 안 된다며 조합
원들이 열심히 싸웠던 덕이다. 그러나 의사들의 연봉제를 실시하는 병원들이 조금
씩 늘어나고 있다. 풍문으로 듣기에는 매달마다 진료과별 진료수익을 계산해서
진료수익을 높이 올린 과를 우선으로 전진배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단방사
선과에서 찍은 사진(X-선 촬영이나 CT, MRI 같은 것들)이 진단방사선과의 수익이냐,
그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오더를 내린 해당과의 수익이냐를 놓고 교수들간의 싸움도
일어날 수 있다. 의권쟁취를 위한 싸움의 대상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참으로 실망스럽게도 의사들의 파업 속에 이러한 요구는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
병원 조합원들이 연봉제를 반대하며 싸울 때도, 보험급여 항목을 확대해야 한다고
싸울 때도 의사들의 격려, 지지 글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정부가 아닌 병원사용주를 상대로 싸워야

인턴, 전공의들은 힘들게 일하고 있다. 하루종일 환자보고 또 당직을 하거나 아니면
밤새 응급수술로 씨름하다 보면 어느덧 하얗게 새벽이 밝아오고 변함없이 환자들은
의사를 기다리고 있다. 당직이나 응급수술이 아니더라도 4, 5시간 수면에 퀭한 눈.
참으로 중노동이구나, 의사도 참 못할 짓이구나 안타까웠다. 이런 전공의들의 처우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공의 처우는 정부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병원사용주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이상하게도 전공의들은
병원사용주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지 않고 있다. 스스로 노동자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도 파업으로 보이지 않는 의사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고민하고 있는
의사들에게 말하고 싶다. 4, 5시간 수면으로 눈꼽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고 일하고
있는 의사들에게 말하고 싶다. 병원사용자들이 거의 의사니까, 자신들의 선배니까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몇 년 이렇게 고생하고 나면 전임의로, 교수로 올라
가면서 보장을 받기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너무나 다양한 직종이 있는 병원, 학력조차도 초등학교부터 박사 출신까지 있는
병원, 더 나아가서는 국민들 모두 유형무형으로 얽혀 있는 조직 내에서 의견의
차이를 감정의 골로 밀어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누구 하나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있을 때는 표 안 나도 없으면 깨닫게 되는 게 서로의 역할인 것 같다. 의사
들이 자신의 의견과 다를 경우 뱉어내는 각종 비방과 욕설은 섬뜩한 느낌을 갖게
할 정도다. 마치 의사를 제외한 모든 직종을 적으로 여기는 것 같다. 
우리는 의사라는 직업의 존재이유가 전장에서도 적군을 돌보는, 즉 인간의 생명을
가장 귀한 가치로 여기는 것에 기반한다고 믿는다. 의사들의 주장이 정당하다 해도,
투쟁의 대의가 아무리 크다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생명에 대한 포기 행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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