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3월08일(수) 17시45분31초 KST 제 목(Title): 에릭 사티 - 악보를 읽는 즐거움 때때로 나는 이 보잘것 없는 세상에 온 것을 후회한다... - 에릭 사티 '내 인생의 깊은 구석' staire는 피아노라는 악기를 별로 즐기지 않습니다. 그 평면적인 기계음, 왠지 불안하게 울리는 평균율, 비브라토가 없는 메마른 소리... 그러나 예외가 있다면 사티의 음악들이죠. 그의 때로는� 소박하고 때로는 현란한 소품들. 사티의 음악은 한 마디로 '이런 것'이라고 잘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다양한 편력처럼 늘 변신을 거듭하는 그의 음악... 결석을 밥먹듯이 하던 파리 음악원 시절, 장미 십자단 가입과 탈퇴, 1898년부터 시작된 파리 근교 아르퀴유카상에서의 그 유명한 궁핍한 생활, 때늦은 성가 학교 (스콜라 칸토룸) 입학, 1917년의 정치 소요 개입... 프랑스 음악계의 기인 사티의 생애는 죽기 직전의 퇴조기를 제외하면 늘 새로운 도전과 (역설적이지만) 권태 사이를 오가며 강한 개성을 품은 음악들의 배경을 제공합니다. 꿈결에 듣는 듯한 환상을 자아내는 '짐노페디'와 '그노시엔느'는 사티를 처음 대하는 분들께 가장 친근하게 와 닿는 깔끔한 소품들입니다. staire가 즐겨 듣는 그노시엔느 1번은 마디줄이 전혀 없고 끝없이� 이어지는 당김음으로 듣는 이를 빨아들입니다. '관료적인 소나티네'에서의 클레멘티의 패로디의 신선함, 세 곡의 '사라방드'에서 엿볼 수 있는 불안정한 9화음을 포함한 대담한 화성 어법, 비엔나 왈츠를 연상시키는 'Je te veux', 대중 가요의 멜로디나 드뷔시, 쇼팽의 작품을 뒤섞어 짠 '말라빠진 태아'를 들으면 이 기이한 작곡가의 세계에 어떤 한계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악보입니다. 그노시엔느 이후 '예민한 통찰로 네 자신을 끌어안아라' '머리를 열어라' 등의 묘한 지시를 악보에 삽입하기 시작한 이후 그의 악보는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기 시작합니다. 이 주석은 점점 늘어나 서술적 텍스트와 연주자를 위한 지시가 따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며 '옛시절' 에서는 다음과 같은 지시까지 나타납니다. '누구든 연주 도중에 이 텍스트를 소리내어 읽는 것을 금한다.' 말라빠진 태아의 2번째 곡은 쇼팽의 장송 행진곡을 인용했음에 틀림없는데도 주석에는 '슈베르트의 유명한 마주르카의 인용'이라고 버젓이 씌어 있습니다. 냉소적인 사티의 장난기가 만들어낸 것임에 틀림없는 일견 유치해보이는 이러한 텍스트들은 그러나 연주자와 작곡자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이루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때 듣는 이는 철저하게 그 관계에서 배제됩니다. (루시 카야스) 사티를 속속들이 즐기고 싶으시면 그의 악보를 구해서 같이 읽으며 들으시기를 권합니다. 피아노를 치시는 분이라면 그 악보를 펴놓고 연주하세요. 눈을 감고 듣는 즐거움 이상의 무언가를 얻을 것입니다. 바그너가 그랬고 메시앙이 그랬듯이 사티는 음악에서 얻는 즐거움을 음악 그 자체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곳으로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