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loneman (자유의지) 날 짜 (Date): 1995년04월10일(월) 21시02분22초 KST 제 목(Title): 논리가 모든 것 아니다. "논리와 근거가 결여된 주장은 편견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언뜻 생각하기에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말속에 담겨있는 오류와 편협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논리적 편견과 근거있는 거짓말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적 사고를 요구하는 이 시대에 과학은 첨예하게 논리와 근거를 바탕으로 한 거짓말은 얼마든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역학의 모체이며 실 생활에서 활용되는 공학의 바탕이 되는 뉴톤 역학은 거짓말이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을까? 실제로 뉴톤역학은 상대성 원리와 quantum 역학의 Postulates을 무시하고 눈으로 볼수 있는 현상에 대한 개연적인 이해및 적용을 원할때 사용되는 것이다. 즉 실 생활에서 우리가 느끼는 현상을 개연성있는 근사치로 표현할때 유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고 모든 과학은 결코 진리가 아닌 개연적 가설일 뿐이다. 쉬운 예를 들어 진자운동에 대한 실험을 한다고 하자. 진자의 주기를 구하기 위해 추를 몇번 진동시킨후 아주 정밀한 시계를 이용해 주기를 구한다. 그 주기를 몇백번 반복해서 구했다고 하자. 결코 어떠한 시간도 서로 같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주기로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그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발달한 것이 통계학적 방법이다. 문제를 간단하게 하기위해 단지 평균값과 표준 편차값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여러 표본들의 평균값을 구했다고 하자. 이 평균값들이 모두 같다고 할때 과연 이 표본들이 같다고 말할수 있을까? 같은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서로 틀린 표본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떠한 분포형태를 보이는가하는 문제 일것이다. 이 분포의 문제에서 표준편차는 68%의 data 에 해당하는 양을 나타낸다. 표준편차가 작을수록 평균값의 개연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평균값 또한 data의 실체를 잘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선 이 평균값 보다 크거나 작은 어떤 한 값을 중점으로 askew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구한 주기로 지구의 중력 가속도를 구하였다 해도 분명 error propagation에 의한 오류 또한 생기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때 과연 실험에 의한 진리의 발견이란 거짓이라고 밖에 할수 없다. 과학적 논거의 서술은 그러므로 어떠한 오류의 범위아래서의 predictability를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그의 불확실성의 원리를 따르면 두가지 변수이상이 있을때 결코 어떤 특정한 값이상의 정확성을 가질수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원자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의 위치를 정밀도가 높은 현미경으로 관찰한다고 할때 배율을 높일수록 전자의 위치는 더욱 찾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리는 과학의 중추이며 가장 근본적인 학문이다. 또한 가장 엄정한 계측을 요구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물리자체가 개연성의 학문인 이상 과학적 방법론을 추구하는 모든 학문은 똑 같은 한계에 부딪힐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이 학문의 세계를 정복하기 전에 철학과 신학이 한때를 풍미했다. 논리라는 말도 철학적인 사변에 근거를 두고 발달한 것이라 할것이다. 신학의 근거는 성경이라 하지만 실제로 Necene교리에서 확정된 삼위일체론의 정의위에 발달한 사념철학이다. 이 사념철학은 수 많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여 왔지만 오늘에도 일반 기독교의 뿌리가 되고 있다. 잘 알려진 이야기론 갈릴레오의 재판이 있다. 바로 신학의 모순가운데 발생한 거짓이라 하겠다. 또 다른 예론 에수가 메시야임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의 신학적 오류라고도 하겟다. 철학적 사변 또한 무수한 사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철학의 이상적 유토피아건설에 선봉장이 되었던 communism의 몰락에서 현실과 괴리된 이상의 허구성을 느낄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의 생각을 풍미해왔던 모든 논리적 사변은 모두 허구성을 지니고 있다. 모두 논리적 사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논리적이고 근거있는 주장이란 이유로 편견이 없다고 한다면 그 것이야 말로 독선적이고 아집에 빠진 소위 지성인들의 교만인 것이다. 논리의 맹점은 바로 논리적이란 것에 있는 것이다. 논리와 근거를 과신하는, 즉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대서 어떠한 독선보다도 더욱 완고하고 맹렬한 편집과 아집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인간인 우리는 무엇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모든 면에서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해야 할것이다. 어떠한 면에서든, 어떠한 방법론에 근거하든 편견을 가질수 있으며 배제할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참으로 솔직하며 참된 배움의 길일 것이다. 왜 워드워즈는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고 했을까? 어린이의 탁월한 논리성때문인가? 그들의 확고한 근거를 염두에 둔 생각때문인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워드워즈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을 한다. 어린이의 말들은 결코 탁월한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지만 때론 어른의 마음을 울린다. 지극히 순수한 진실성으로... 그들은 훌륭한 논리와 근거는 없지만 진리를 깨달으며 진실을 얘기한다.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아도, 우리의 관념적 사고로 이해 하지 못해도,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지 못해도, 미처 경험하지 못해도, 여전히 온전한 진리의 빛을 발하는 진리를 나는 믿는다. 과학으로 생각지 못하는 수많은 진리들이 수 많은 형태로 인간에게 느껴짐을 안다. 소설을 통해서, 시를통해서, 음악을 통해서, 미술을 통해서도 인간에게 진리가 전달됨을 안다. 비과학적이라 해서 비 논리적이라 해서 결코 그것이 그릇된 것이라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가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는 길은 한가지 만의 논리에 집착하는 완고함을 벗어나서 서로에게 얼마나 귀를 기울일수 있는가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결코 한 사람의 생각은 헛되게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길이며 서로를 이해하고 보다 자신의 편협된 편견에서 벗어나는 바른 길이라 생각한다. +-+-+-+-+-+-+-+-+-+-+-+-+-+-+-+-+-+-+-+-+-+-+-+-+-+-+-+-+-+-+-+-+-+-+-+-+- 외로운 이의 자유여행 죽음은 가장 확실해 보이는 불확실성 강 민 수 죽음보다 더 짙은 희망속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