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2월 31일 목요일 오전 10시 28분 00초 제 목(Title): 신동/한나라당 기획위원장,정형근을 고발한 한나라당 기획위원장 鄭亨根을 고발한다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져 재떨이로 하나 받아내고 양재기로 한번 받아내고 바가지고 받아내고 모두 세 그릇을 받아냈어요. 「김대중이 시킨 것 자백하라」는 거예요. 고문 앞에서 천하장사가 없어요.》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swpark@donga.com〉 ------------------------------------------------------------------------------- - 『92년 홍사덕(洪思德)후보 비방유인물 사건에 정형근(鄭亨根·54)의원이 연루돼 있으며, 89년 서경원(徐敬元)의원 방북사건 조사과정에 정의원이 김대중(金大中) 당시 평민당 총재를 사건과 연계시키기 위해 서의원을 구타했으며,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축소를 지시한 장본인이 정의원이며, 92년 남한 조선노동당사건 등을 수사하는 과정에 알게 된 수사기밀을 특정언론사에 흘려줬으며…』 국민회의 유선호(柳宣浩)의원은 11월14일 국회 본회의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한나라당 정형근 기획위원장의 「과거사」를 느닷없이 도마 위에 올렸다. 유의원의 이날 발언은 정의원이 「새 정부의 야당탄압과 안기부의 정치개입」을 거론한 데 대한 역공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한마디로 과거 안기부에 재직할 때 야당과 인권을 탄압하는 데 앞장서고 이를 정권안보에 악용해온 장본인이 새 정부의 야당탄압과 인권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있느냐는 식이었다. 그 바탕에는 「총풍」사건에 대해 「고문의혹」을 제기하고, 검찰수사에 대해 「야당탄압」 주장을 펴는 등 현 정부의 정국드라이브에 수시로 제동을 걸어온 정의원에 대한 여권지도부의 「감정」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유의원의 발언배경과 관계없이 과연 정의원이 과거정권 시절 그와 같은 정치공작이나 인권탄압을 했느냐는 문제는 또 하나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국민의 정부」 들어서도 고문과 정치공작 시비가 근절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어두웠던 과거」의 실체는 단순히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규정하고 있는 하나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권탄압 문제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시효에 관계없이 역사적 또는 심지어 법적으로 청산돼야 할 반문명적 행위로 취급되고 있다. 따라서 유의원이 정의원에 대해 제기한 몇 가지 의혹들은 단순히 정의원 개인 차원을 넘어 우리 정치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보편적 관심사의 하나로 신중히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자는 이런 관점에서 유의원이 제기한 몇 가지 의혹 가운데 특히 정치공작 및 고문 의혹과 관련이 있는 92총선 흑색유인물사건, 서경원 방북사건, 박종철군사건 등의 전말과 처리과정을 재추적해 보기로 했다. 홍사덕후보 비방 유인물 살포사건 먼저 92년 총선 당시 야당후보 흑색유인물 살포사건에 정형근의원이 개입했느냐의 여부다. 92년 3월21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울 강남을구 민주당 홍사덕 후보에 대한 안기부 직원의 흑색유인물 살포 사건은 당시 직접 유인물 살포를 주도했던 한기용 수사관(韓基用, 당시 37세·5급) 등 안기부 직원 4명이 구속되고 일부 간부들이 인책당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유의원의 의혹 제기 이후 전직 안기부 간부 K씨 등을 접촉, 당시 상황에 관해 들어본 결과 사건이 훨씬 상부에서 기획되고 지시됐음을 나타내는 증언들이 적잖이 나왔다. 전직간부 K씨는 당시 사건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여러 차례 언급을 회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홍사덕 후보 흑색선전 유인물 살포사건은 당시 언론에 공개된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사건은 안기부가 14대 총선에서 열세에 몰린 여당후보들을 지원, 당선시킬 목적으로 안기부 지휘부의 지시를 받은 정형근 대공수사국장이 수개 과를 동원하여 홍사덕 후보를 비롯한 3명의 야당후보에 대해 흑색선전을 전개한 조직적인 정치공작사건이었다』 만일 안기부 윗선의 지시가 있었다는 K씨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당시 안기부 지휘부를 비롯한 국가 공권력의 도덕성에 심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사건의 윤곽 자체가 홍사덕 비방유인물 사건이 아니라 안기부가 광범위한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했음을 드러내는 구체적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안기부 요원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당시 수사관으로 근무한 바 있는 전직 직원 S씨는 사건 당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 처음으로 수사관 생활을 후회했다.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고 또 언론에 공개되면서 어떻게 축소·은폐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정작 책임질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고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한 부하 직원들만 감옥에 가는 현실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형근 국장이 과장 불러 지시』 ―그렇다면 처벌받은 4명 외에 상부 지휘자가 있었다는 얘긴데…. 『그렇다. 야당후보 비방 흑색유인물 살포는 한마디로 안기부의 조직적인 정치공작이었다. 지휘부의 지시를 받은 국장이 실무 과장급 간부를 불러 흑색유인물 작성을 지시하고 배포하게 했으며, 당시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홍사덕 후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다른 2개 선거구에서도 여당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상대후보를 비방하는 유인물 살포가 이뤄졌다』 ―상부의 최초 지시가 떨어진 것은 언제쯤인가. 『3월10일쯤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윗선에서 지시한 일인데 어떻게 지시대로 행동한 직원들만 처벌됐다는 말인가. 곧바로 말이 새나갔을 텐데.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일개 수사관이 자행한 단독 범행으로 축소했고, 직속상사 2명에 대한 가벼운 인책만을 단행한 뒤 서둘러서 사건을 종결처리했다. 그로 인해 직원들 간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 부(안기부)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고 사기도 최악이 됐다. 앞으로 이러한 지시가 내려오면 목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 말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안기부 직원에게는 근무수칙상 「차단의 원칙」이라는 게 있다. 그래서 행동에 참가했거나 이를 지켜본 누구도 어떤 사건의 전모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당시 대공수사국의 한 관계자는 이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건이 어떠한 경로로 지시됐는지는 잘 모른다. 안기부 특성상 지시배경까지 밝히는 사례는 없다. 다만 그 사실이 부장을 통해 대통령에게도 보고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국장의 지시만 받고 일에 착수했다. 당시 정서상 국장이 지휘부 지시 없이 단독으로 그런 일을 결행할 수 없음은 안기부에 근무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부내에서 그런 위험한 일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은 없었나. 『실무자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임을 들어 여러 차례 중단의사를 표명했었다. 그러나 번번이 무시됐고 결과적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최고 상층부에도 보고됐다면 정치권과 연계됐다는 얘긴데. 『당시 지휘부가 정치권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지시가 지휘부 계통을 통해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강남구 개포동 일대에 뿌려진 홍사덕후보 비방유인물말고도 다른 지역구에서도 흑색선전물 살포가 추진됐다는데. 『강남에서 출마한 국민당 모후보와 동대문 지역에서 출마한 모후보도 흑색선전물 대상이 됐다. 첩보를 중심으로 흑색유인물이 작성됐는데 내용을 상부에 보고하는 과정에 실제 내용보다 조잡하고 유치하게 과장되어 내려온 것으로 안다』 당시 안기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비방유인물의 작성, 우송 지시와 함께 관련자료를 받은 중간간부는 소속 직원을 통해 유인물을 작성, 상부선을 통한 몇 차례의 검토작업 끝에 유인물을 완성, 주로 밤 11시 이후에 외부에서 구입한 누런 색깔의 A5 용지로 다량 복사했다는 것이다. 이어 3월16일부터 20일 사이에 서울 업종별 전화번호부에서 관할 선거구에 있는 미장원 양품점 주소를 발췌해 편지봉투에 기입했다는 것이다. 배포는 주로 야간에 상계동 신촌 등 외곽지역 우체통에 넣어 우송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 당시 지휘부에서는 엄청난 분량의 유인물 배포를 요구했으나 대부분 직원들은 발송하는 척하면서 소각한 것도 많아 실제로는 300통 정도가 발송된 것으로 당시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3월 20일에는 상부에서 일부 확인해본 결과 우송한 우편물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질책이 있어 수개 팀이 다시 유권자들의 주거지 우편함 또는 주민들의 차량에 직접 투입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1단지 내에서 아파트 우편함에 유인물을 투입하던 한기용씨 등 직원 4명이 홍사덕후보측 선거운동원 4명에게 적발돼 심한 몸싸움 끝에 잡혀 홍후보의 지구당으로 끌려감으로써 사건이 표면화된 것이다. 지구당으로 잡혀간 4명은 6시간 동안 지구당 관계자들로부터 배후를 추궁당했으나 입을 다물고 3월21일 새벽 강남경찰서로 넘겨진 뒤 즉시 서울지검 공안1부로 인계됐다. 공직생활 20년 가까이 국가안위를 책임진다는 「음지」에서 일해온 나름대로의 신념이 어처구니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 지시따른 하급 직원들만 희생 ------------------------------------------------------------------------------- - 동대문지역에 출마한 야당후보에 대한 흑색유인물 문안은 중간간부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취재결과 파악되고 있다. 준비된 유인물은 3월20일 오후 10시30분쯤 수사관 등이 4개조로 나뉘어 배포팀을 구성, 조별로 개인승용차를 이용, 청사를 출발하여 밤 11시쯤 을지로 중소기업은행 본점 부근 우체통, 신당동과 왕십리 일대 우체통에 100여통을 투입했던 것으로 관계자들은 증언했다. 이처럼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전개된 흑색선전물 살포사건은 어떻게 축소·은폐된 것일까.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강남지역에서 홍사덕후보의 흑색유인물을 배포하던 한기용씨 등 팀원 4명이 체포된 사건이 방송을 통해 알려지자 부내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는 것이다. 한 전직 수사관의 기억. 『대책회의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논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연행된 팀장 한기용에게 「친구의 개인적 부탁을 받아 유인물을 살포한 것으로 하라」는 뜻이 전달됐다고 한다. 만약 참여한 여타 직원들이 위에서 시켜서 유인물을 배포했다고 진술할 경우 책임한계를 한 팀장 선으로 정하도록 했던 것 같다』 사건수습은 대책회의 내용대로 진행되었다. 검찰관련 사항은 윗선에서 직접 연락을 취했으며, 수감된 직원 4명에 대해서는 위로 차원에서 동료들이 조금씩 모금을 해 변호사 비용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적으로는 수사국 계통상의 관련 간부들이 문책을 당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됐지만 정작 이를 지휘한 국장은 아무 징계를 당하지 않는 바람에 부(部)내에서 불만이 많았다는 게 관계자들의 기억이다. 한씨 등 관련직원 4명은 1심 선고 후 의원면직되고, 직속상관인 C단장과 4명의 과장은 징계처리돼 퇴직 또는 대기발령됐다. 한씨는 그 뒤 2심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반면 정형근 당시 수사국장은 이후 차장보를 거쳐 차장으로 승진한 뒤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건을 주도한 조직의 책임자는 책임을 벗어나고 상부지시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 하급직원들만 희생양이 됨으로써 지휘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지고 조직기강이 극도로 해이해졌다는 게 관계자들의 토로다. 특히 사건에 관여했던 주무부서는 부 안팎의 질시와 반목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이미지 실추로 대외활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사법처리된 한씨 등 4명을 만나 관련 증언을 들어보려 했으나 대부분 미국으로 건너간 뒤 국내 지인들과도 연락이 끊긴 상태라 접촉하지 못했다. 92총선 흑색선전물 사건은 발생한 지 6년이 지난 것으로 관계 간부들의 선거개입 등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이미 공소시효가 완료돼 사법처리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아래 안기부가 엄정한 정치적 중립으로 국가안보에 전념하고, 국민에 봉사하는 선진정보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안기부 스스로 「과거」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함께, 사건의 실체를 국민 앞에 소상히 밝혀야 한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서경원의원 밀입북 사건 89년 서경원(徐敬元)의원 밀입북사건은 김대중(金大中) 당시 평민당 총재의 검찰출두 조사로 이어지고 한겨레신문사 편집국 압수수색 사태를 야기하는 등 사회전반에 한바탕 거센 공안바람을 일으킨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문익환(文益煥)목사의 평양방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그 해 6월27일 안기부는 서경원 의원(평민당)의 밀입북 및 구속사실을 발표했다. 가톨릭농민회장 출신 서의원이 88년 8월 2박3일 동안 북한을 방문한 뒤 이를 10개월 동안 숨겨왔다는 내용이었다. 안기부는 또 서의원이 북한체류중 김일성(金日成)과 면담, 통일문제 등을 논의했고, 체류 마지막날에는 허담(許錟)으로부터 농민운동지원금 명목으로 5만 달러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후 검찰은 「김대중 평민당총재가 서의원으로부터 1만 달러를 받았고, 사건발표 2개월 전 이를 보고받았음에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며 김총재를 불고지죄와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그러나 김총재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직후 서의원을 박세직(朴世直) 안기부장에게 보내 자진신고토록 했고 박부장은 불구속처리하겠다는 약속까지 했었다』고 주장하고, 1만 달러 수수 혐의를 전면부인했다. 수사기관의 가혹행위 논란에도 불구하고 서의원은 결국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집행유예 또는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김총재는 검찰의 공소취소로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 - 『이×× 똑바로 다뤄』 ------------------------------------------------------------------------------- - 서경원의원 방북 사건은 몇 가지 점에서 최근 정국의 쟁점이 된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과 닮았다. 야당총재 주변 인사가 몰래 북한 인사와 접촉해 위법행위를 했다는 점과 야당총재의 사전 또는 사후 관련 여부가 쟁점이 됐다는 점, 그리고 수사과정에서의 고문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 등이 그렇다. 게다가 최근 총풍사건에서 안기부의 고문의혹과 수사기관의 도청의혹 등을 제기한 한나라당 정형근의원이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으로서 수사주역이었다는 묘한 인연도 갖고 있다. 그런데 당시 사건 당사자였던 서경원 전의원(62·13대 국회의원)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당시 안기부 조사를 받으면서 수사관들은 물론 정형근국장으로부터 직접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털어놓았다. 서의원은 특히 정국장이 김대중씨의 사주 등 관련 부분을 대라며 가혹하게 추궁하는 데 못 이겨 북에서 받은 5만 달러 가운데 1만 달러를 김대중총재에게 건네줬다는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서의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당시 안기부와 검찰은 고문에 의해 사건의 실체를 조작, 부풀림으로써 정치에 이용하려 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서 전의원은 방북사건으로 8년여의 수감생활을 하던 중 지난 3월 특사로 풀려났다. 최근에는 건강을 추스르기 위해 관심을 갖게 된 대체요법이나 「전공」인 농민운동 및 통일운동과 관련된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11월4일 여의도 모처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서 전의원은 이날 서울지검 남부지청에서 보안관찰 대상자로서 담당검사에게 정기동향 보고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생각보다는 건강해 보이십니다. 『겉으로는 그렇습니다. 속으로 곯아서 그렇지』 ―유선호의원이 얼마 전 국회에서 서의원 방북사건 때 정형근 당시 수사국장이 서의원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의 연루사실에 관해 자백을 강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의원측에서는 이를 부인했는데 어느 게 진실입니까. 『내가 참, 지난 일이고 인간적으로 창피하기도 해서 말 안하려고 했습니다만, 신문을 보니까 정의원측에서 「어떻게 국회의원을 때릴 수 있었겠느냐」고 합디다. 그 말 참 잘했습니다. 그래요, 어떻게 일개 수사국장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원을 때릴 수 있습니까.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나는 아직도 그런 위선이 혹시라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말하렵니다』 ―조사를 받던 조사실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89년 6월 무렵 남산의 안기부 건물 지하 6층인가 3층에서 조사를 받은 것 같습니다. 지하를 빙빙 돌아 3~4평 남짓 되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창문이 없어 햇볕이 안 들어오니까 저녁인지 밤인지도 분간이 어려웠어요. 들어가자 마자 옷을 다 벗으라더니 군복바지와 러닝셔츠 하나만 입으라더군요. 처음 1~2시간은 아무 말도 안 시키고 쥐죽은 듯 침묵을 깔아놔요. 그러다 갑자기 「잘 생각해봐」로 시작해서 「야, ××자식아」 정도는 보통이고…. 수사관 7명이 3교대로 돌아가면서 나를 맡아 잠을 안 재우고 몇날 며칠 수사를 계속하는 데 그 사람(정형근의원)이 가끔 들르더라구요. 그 때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어요. 가끔 들러서 부하들에게 「뭐 새로운 거 나왔느냐」 하고 묻고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 똑바로 다뤄」라고 분위기를 잡곤 했어요. 난 말 그대로 짐승 취급당한 겁니다』 ------------------------------------------------------------------------------- - 『때리는 것은 내가 말도 안해요』 ------------------------------------------------------------------------------- - ―정형근국장으로부터 직접 조사를 받은 것은 언제입니까. 『날짜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그러던 어느날 그가 부하 직원들을 다 내보내고 나와 단둘이 마주 앉았어요. 저녁 9시 15분부터 시작해서 새벽 1시 45분까지 맞았어요. 나는 맨발 벗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정의원이 구두 신은 발로 내 발등 위에 올라서서 한 바퀴 빙글 돌며 지근지근 밟았어요. 발로 가슴과 어깨를 걷어차기도 하고, 주먹으로 머리를 그렇게 때리더라고요. 나중에는 지쳐서 때리지도 못합디다』 ―당시 조사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까. 밖으로 그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나요. 『아무도 없고 소리쳐 봐야 저만 불쌍한 놈이 되죠. 바닥엔 카펫이 깔려 있고 벽에는 방음장치가 다 돼 있는데다가 지하인데 소리쳐봐야 어디 들리기나 하겠어요? 욕실이 하나 있고 화장실이 하나 있는데 코와 입에서 피가 막 쏟아지니까 재떨이로 하나 받아내고, 양재기로 한번 받아내고 바가지로 받아내고 모두 세 그릇을 받아냈어요. 아이고, 때리는 것은 내가 말 안 합니다. 솔직히 남자끼리 때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피를 세 바가지나 받아낸 것은 때린 정도라고 할 수 없어요. 그 양반(정형근 국장) 당시엔 아주 몸이 좋았어요. 가벼운 옷만 입고 내려왔었는데 마음껏 때렸어요. 그런 사람이 지금 신성한 의회에 가 있다는 게 역사의 현주소라는 생각을 해보면 인간적으로 허탈감, 배신감을 느낍니다. 정의원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떠나서 말입니다』 ―누가 피를 받아냈다는 말입니까. 『정의원이 갖다 대더라고요』 ―무조건 때리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처음엔 느닷없이 종로사건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당시 내가 이해찬(李海瓚)의원 그리고 농민들과 같이 행진하다가 돌에 맞아 쓰러진 적이 있어요. 당시 내가 일부 농민의 과격행위를 말리러 갔다가 돌에 맞아 머리가 찢어져 고려병원에 이송됐는데 정의원은 「이 ××, 왜 너 우리 경찰이 하지도 않은 일을, 경찰이 돌을 던져 찢어졌다고 해서 경찰을 골탕먹이느냐고 해요.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그런 얘기를 꺼냈어요』 ―방북사건과 관련해서는 어떤 심문을 받았습니까. 『먼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야, 서경원, 나하고 같이 살자. 나 좀 살려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살려주는 거냐고 물었죠. 그랬더니「북한 3번 갔다 온 것 다 안다. 자백하라」는 거예요』 ―3번이라고요? 『예, 나는 한 번밖에 갖다오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래서 내가 「근거가 있으면 대라. 나는 한 번밖에 안 갔다 왔다」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이 ××, 근거가 있다는데 건방지게 누구한테 대라 말라 하느냐」면서 그때부터 주먹이 날아오기 시작한 거죠. 그 다음에는 「너는 김대중이 꼬붕이니까 사실대로 안 불면 내 손에 죽는다」면서 「방북 전에 김대중이가 시킨 것과 갔다 와서 김일성이가 전해주라고 한 것, 그리고 가져와서 전해준 것, 즉 지령을 밝히라」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진술했습니까. 『그런 것 없다고 했죠. 난 사흘 동안 평양에 머물면서 김일성 앞에 가서 간첩남파 중단과, 대남 과격방송의 금지, 88 올림픽에 대한 북한측 참가 등을 요구했다고 그대로 진술했어요. 그랬더니 정의원은 「이 ×× 거짓말한다. 묻는 말에나 답변하라. 넌 분명 평양에 3번 갔다. 김대중이 (사전에) 지시한 문서내용이 뭐냐. 김대중한테 말 안하고 갖다 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다그치는 거예요. 나는 그래서 「말 안하고 갔다 왔다」고 다시 말했죠. 그랬더니 말도 점점 거칠어졌어요. 이 자리에서 내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자식아」 정도는 준수해요. 난 그렇습니다. 그래도 잘났든 못났든 간에 국민이 직접 뽑아준 국회의원인데, 존대말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나올 수 있는지. 그래도 박세직씨가 안기부장 할 때는 그렇게 심하게 안 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안기부장이 바뀌고 나서 아주 심해진 겁니다. 아마 박세직씨가 제대로 조이지 않는다고 (안기부장을) 바꾼 것 같아요. 현역의원이 이 정도로 당했다면 일반 국민들이야 어땠겠어요』 ------------------------------------------------------------------------------- - 『내가 일반 농민이라도 그리 못할 것』 ------------------------------------------------------------------------------- - ―사실 그때 서의원이 소속된 평민당 총재가 김대중 대통령이었는데 총재에게 아무런 보고 없이 갔다 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나는 갈 때나 올 때 당과 일절 연계없이 갔어요. 안기부나 검찰에서도 핵심적인 쟁점이 그것이었어요. 그래서 모 언론에서는 나를 또라이나, 소영웅주의자라고 묘사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서의원께서 북한의 돈(5만 달러)을 받아서 김대중총재에게 (1만 달러를)전달했느냐 여부도 큰 쟁점이었죠. 『돈은 내가 통일사업을 위해 (북한측에) 달라고 했어요. 그 부분은 당시 내가 모두 진술했고 다 조사받았어요. 안기부측은 7월17일 이를 북한에서 받은 「공작금」으로 발표해버렸어요. 그러더니 검찰로 송치된 뒤 재판과정에서 검찰측이 느닷없이 「그 가운데 1만 달러가 김대중씨에게 전달됐다」고 나왔어요. 검찰에서 사나흘 동안 그 문제로 얼마나 나를 조여대고 비서관들을 다 죽일 정도로 몰아치는지, 검찰조사에서는 내가 일단 김총재에게 1만 달러를 주었다는 검찰측 요구대로 자백했어요. 그랬다가 재판에서는 이를 전면부인한 거죠』 ― 김총재에게 1만 달러를 전달한 것은 사실입니까. 혹시 선물이라도…. 『일절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려면 5만 달러 다 주지 치사하게 왜 1만 달러만 주겠습니까. 말도 안 되지』 ―안기부에서는 1만 달러 전달 여부를 추궁받지 않았습니까 『안기부에선 그냥 공작금 5만 달러 받았다는 진술만 받아낸 거지. 그러나 정형근씨가 「김대중의 지시」 등을 자백하라고 어찌나 두들겨 팼는지 다음날 아침 거울에 내 얼굴을 비쳐보니 기자양반 양복처럼 (멍이 들어) 까만 색이 돼버렸더라고. 고문 앞에는 천하장사가 없어요. 내가 하고픈 말을 하기라도 하면 즉각 주먹이 날아오니까. 설사 나중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생물학적으로 우선 숨을 쉴 수 없으니까 일단 숨은 쉬고 살아나야 한다는 생각에 굳이 더 버틸 생각도 안 들어요. 내가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평양을 갔던 것도 아닌데 내가 무엇 때문에, 통일을 위해, 북한에 갔다 왔는지는 살아서 얘기해야겠다는 생각뿐이더라구요. 다음날부터 의사가 와서 상주하면서 매일 아침 약을 먹이는데, 내가 안 먹으면 강제로 먹이곤 했어요. 안 먹을 수 없는 공포분위기였어요. 나중에 검찰로 넘어가서 내가 「강제로 약을 먹었다」고 했는데 신문을 보니까 당시 안기부장이 「소화가 안 되서 소화제를 주었다」고 거짓 증언을 하더라고. 허허』 서 전의원은 지금도 날씨가 궂으면 머리와 가슴 등이 쑤시고 아프다고 호소했다. 서 전의원은 『제가 일반 농민이라도 그렇게는 못하는 겁니다. 문제는 서경원 개인을 때린 것이 아니고 통일운동 세력에 대해 매질을 한 그 사람들이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면서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때 가혹하게 군 사람이 정의원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90년엔가 그 이듬해인가 내가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때에 어느 신문에서 정형근씨가 무슨 큰 대공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풀려나와 보니까 국회의원이 돼 있더라고요. 법적으로는 몰라도 고문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아주 긴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법 이전에 역사의 심판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가끔 흥분된 목소리로 자신이 당했다는 가혹행위 상황을 털어놓은 서 전의원은 최근 정국의 뜨거운 쟁점이 된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과 관련한 고문논란에 대해서도 나름의 견해를 조심스레 밝혔다. 『제 경험으로 보건대 아마 고문했다는 증거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아요. 고문은 없어져야 하고 진상이 철저히 밝혀져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느 쪽과 인연이 있었느냐와는 상관없어요. 반(反)인간적 행위는 없어져야 하고 민족과 역사 앞에 사죄해야 합니다』 서 전의원이 자신의 사건과 관련해 무엇보다 분노를 느끼는 대목은 『서울법대와 검사 출신의 양식 있는 엘리트가 어떻게 국민의 대표기관을 때리고 피를 세 그릇이나 받아낼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또한 『정의원이 나름대로 국가안위를 위해 직무에 충실하다 보니 생긴 불상사 아니겠느냐』는 시각에 대해서는 『국가안위가 달린 문제일수록 철저하고 증거 위주로 처리하는 것이 직업인의 윤리 아니냐』고 반문했다. 헌법과 법률이 있고 3권분립이 있는데 공권력이 고문을 해서 사건을 두드려 맞추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노맹 사건」의 박노해 「사노맹」 사건으로 복역하다가 지난 8·15특사로 풀려난 노동자 시인 박노해씨는 정의원에 관해 서 전의원과는 또 다른 차원의 기억을 갖고 있다. 91년 사노맹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박씨가 안기부에 검거돼 남산 안기부 청사로 끌려간 것은 그해 3월12일. 50여명의 수사관들이 24시간 3교대로 심문했다. 옆방에서는 심문사항을 감청하다가 진술중 어떤 단서가 나오면 요원들이 즉시 현장으로 뛰어가곤 했다. 조사현장에는 절대로 안기부 직원을 혼자 놔두는 법이 없었다. 화장실을 갈 때도 3명 이상이 따라 붙었다. 고문은 15일 정도 이어졌다. 나중에는 입이 마르고 침 대신 피가 나왔다. 날짜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천장엔 하얀 방음벽이 덮여 있고 바닥에는 매트리스가, 책상 위엔 고무판이 깔려 있었다. ------------------------------------------------------------------------------- - 죽는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동맥 그어 ------------------------------------------------------------------------------- - 보름쯤 됐을까. 헛소리가 다 나왔다. 조사는 1초의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됐다. 일제 CASIO 전자수첩에 나온 전화연락 번호의 당사자들을 대라는 대목에서 특히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있었다. 보름쯤 되던 날 오른팔로 거울을 깨서 왼팔 동맥을 그었다.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피를 많이 흘려 7바늘이나 꿰맸다. 지금도 그 흉터는 남아 있다. 피를 흘리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안기부 조사실에는 그날 이후 거울이 사라졌다. 자살기도를 막기 위해서다. 상처를 수술하고 하루 이틀 지나면서 수사관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수사를 할 수 있는 시한이 구속된 뒤 20일간인데 조사가 기대했던 만큼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이 평화롭게 서류나 꾸미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럴 무렵 군대 사령관이 사열 나오듯 수사관들이 긴장했다. 조사현장을 지휘하던 남자까지 기립한 가운데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내려왔다. 그가 정형근 대공수사국장이라는 사실을 박씨가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정국장은 숨소리도 나지 않는 조사실 한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의자에 앉았다. 『사노맹의 최고책임자가 누구냐?』 『나와 백태웅이 실질적인 공동대표입니다』 순간 정국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불쾌하다는 투였다. 『조직이나 권력에 수뇌가 둘일 수 있는가. 너는 대학도 못 나왔고 너의 시나 글은 모두 서울대 출신들이 써준 것 아니냐』 모든 수사관들이 기립해 있는 가운데 정국장은 권위를 잃지 않으려는 듯 상한 감정을 억누르며 톤을 낮추었다. 『너 같은 공돌이가 어떻게 서울대 출신 부하들을 거느릴 수 있느냐. 다 남들이 써준 거지』 학벌주의와 엘리트주의에 젖은 출세주의자의 눈에는 「공돌이」가 조직을 이끈다는 것이 이해될 수도 없고, 용납될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박씨의 머리를 스쳤다. 박씨가 희미하게 웃으며 쏘아 붙였다. 『그럼 이 나라에 미국유학을 갔다 온 서울대 출신이 많은데 왜 육사출신 밑에서 밥을 빌어 먹고 있습니까』 이 말에 화가 치민 듯 정국장은 『임마, 나도 육사출신이야』라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조사실을 나가 버렸다. ------------------------------------------------------------------------------- - 『스파르타쿠스는 죽어야 해』 ------------------------------------------------------------------------------- - 숨죽이고 지켜보던 수사관들은 안 됐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끝났다. 마지막 얘기에서 처신을 잘 했으면 목숨은 건졌을 텐데. 이젠 사형이다』 『사장님(정국장을 지칭) 말처럼 스파르타쿠스는 죽어야 해. 카이사르끼리는 얘기가 통할 수 있지만』 『너는 설령 사형을 면한다 해도 사회적으로 매장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국장은 운동권 출신이라도 자신의 출신학교인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이어야 어느 정도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씨가 스파르타쿠스와 카이사르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후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나서였다. 정국장의 엘리트주의 계급주의 기준에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스파르타쿠스가 바로 「공돌이 박노해」였다는 것을. 야간고를 겨우 나온 「무지렁이」가 이대 출신 명문가 여인과 결혼하고, 명문장의 시도 쓰고 이념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고 사회적 파문까지 일으키니, 이런 놈은 정국장의 기준에서 볼 때는 죽어야 마땅했다는 것을. 구속기한이 만료됨에 따라 조사실을 나서게 된 박씨는 수사관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이 고문의 기억을 역사에 남기고 싶지만 감정은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박씨의 경우 정형근의원으로부터 직접 가혹행위를 당한 일은 없다. 다만 정의원은 이미 고문을 당해 심신이 피폐해진 박씨에 대해 인간적 모멸감을 주어 심리적인 자포자기를 유도하려 했다는 게 박씨 나름의 분석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정형근의원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는 또 한 사람은 같은 한나라당 안상수(安商守)의원이다. 두 의원은 서울 법대 동기로 정의원이 법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을 때 안의원은 부회장이었다. 안의원이 서울지검 형사2부 검사로 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맡았을 때 정의원은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으로 사건 수습에 간여했다. 그리고 두 의원은 나란히 96년 4·11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당선된 초선의원으로 현재 국회 의원회관 507호실(안의원)과 508호실(정의원)을 나란히 쓰고 있다. 안의원은 최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회고록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를 『안 검사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재출판했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안기부 J단장」이 바로 정의원이라는 사실이 취재결과 확인돼 흥미를 끈다. J단장은 이 책에서 사건 전모를 밝히려는 안검사에 대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고위관계기관대책회의, 특히 안기부의 입장을 전하는 전령으로 등장하고 있다. ------------------------------------------------------------------------------- - 「안검사 일기」의 J단장은 정형근 ------------------------------------------------------------------------------- - 박종철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관들에게 물고문을 당해 숨진 것은 87년 1월14일이었다. 안상수 검사의 일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사건 발생 당일 밤 상황을 취재한 결과 고문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관계기관들의 시도가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한 검찰 관계자의 증언. 『박군이 14일 밤 12시쯤 숨졌는데 경찰은 사체를 중대부속병원을 거쳐 용산 경찰병원으로 옮겨놓고 박군 부모님을 만나 「단순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통보하고 보고서도 그런 내용으로 작성해 검찰에 갖고 왔다. 그러고 나서 보고서 내용대로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보고를 받은 사람은 서울지검 공안1부의 최환(崔桓) 부장검사였다』 그러나 최환 부장은 정황상 단순한 심장마비가 아니라고 판단, 보고서에 도장을 찍어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3~4곳에서 『그냥 도장 찍어 줘라』는 전화가 걸려왔지만, 최 부장은 이를 물리치고 『내일중으로 관할서인 용산경찰서에서 정식으로 변사발생 신고를 띄우고 수사를 하라』며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검찰에서는 고문사건일 가능성에 대비한 정식수사의 필요성이 보고되었고, 이에 따라 용산경찰서의 수사지휘를 관할하는 형사2부의 수석검사이자 이날 당직검사였던 안상수 검사에게 사건이 배당됐다. 안검사의 수사일기는 이 대목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검 결과 물고문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서 갭霽Ⅴ? 마찬가지로 오늘의 안기부가 진정 국민의 안기부로 거듭났는지는 앞으로 언젠가 정권이 교체된 뒤 국민들이 오늘의 안기부를 어떻게 평가해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 - Copyright(c) 1998 All rights Reserved. E-mail: newsroom@mail.dongailbo.co.kr 게 교차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안검사는 J단장의 역할에 대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시각보다는 사건이 축소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창구역할을 해주었다는 점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결국 J단장은 경찰측 주장이 잘못된 것이고 내 주장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그와 같은 취지의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안기부에서 동창인 J단장을 담당자로 만난 것은 나와 박종철 군의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범인이 당초 밝혀진 2명 외에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의 공표 여부를 놓고 정권 고위층이 묵살 쪽으로 의견을 모아 가면서 안검사와 J단장은 또 한번 엇갈리는 입장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안검사는 2월27일 고문사건 관련자로 구속기소된 조한경 경위를 영등포 교도소에서 면담, 3명의 범인이 더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 상부에 보고했으나, 안기부를 중심으로 고위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이를 덮는 쪽으로 분위기가 잡혀갔다. 다시 안검사의 일기. 『5월11일 오후 2시30분. 장충공원 앞 앰배서더호텔 1817호실. 신창언부장과 나 그리고 안기부의 J단장이 마주 앉았다.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안기부의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우선 안기부로서는 ?시국에 사건의 진상이 새로 밝혀지면 정부가 견디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재야와 학생이 들고 일어날 테고 야당이 단합하게 된다. 현재 정부는 5공화국 출범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절대 깨져서는 안 된다. 이 상태에서 재판이 끝나야 한다. 이것이 안기부 방침이다.… 지난 1월 박군사건이 처음 일어났을 때 차라리 그냥 심장마비라고 발표하고 묻어버리는 것이 옳았다는 말이 안기부에서 나오고 있다.… 이 사건은 묻혀야 하고 또 묻힐 수 있다. 최악의 경우 훗날 깨져도 할 수 없지만 지금은 안 된다. 1심만 무사히 지나면 영원히 묻힐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안기부의 입장이다…」』 정의원은 이처럼 추가 범인의 존재 사실이 공개될 경우의 파문을 우려, 이를 덮으려는 안기부와 관계기관대책회의 방침을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정의원의 역할에 대한 검찰 관계자의 평. 『박군 사망사건과 관련해 정의원의 역할이 적극적이 된 것은 추가 범인의 축소은폐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기 시작하던 2월27일 이후였다. 정의원은 정권안보를 걱정하는 안기부와 권력 상층부의 견해를 적극 피력하는 편이었다. 정의원은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었지만 과욕을 부리는 측면도 있었다. 때로는 상층부에 대해 이렇게 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수평적 관계라 할 수 있는 실무차원의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도 어떤 방향으로 결론을 몰아가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에는 안기부가 검찰을 쥐고 숨도 못 쉬게 하는 시대여서 정의원의 목소리는 잘 먹혀드는 편이었다』 그러나 정의원의 동창이자 박종철군 사건 당시 파트너였던 안상수의원은 정의원에 대해 『내 말을 이해해주고 나름대로 추가수사가 가능하도록 외풍을 막아준 인물』로 평가했다. ―『안검사의 일기』에 쓰여 있는 정의원의 당시 역할을 보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목소리가 강한 것 같은데. 『나는 사실 정형근의원이 그 정도로 (외풍을) 막아준 점을 고맙게 생각한다. 정의원이 없었다면 또는 정의원이 사건의 실체를 완전히 덮어버리려고 했다면 사건은 초장부터 묻혔을 가능성도 있다』 ―대학 친구인 데다가 바로 옆방을 같이 쓰는 같은 당의 동료의원이라 너무 좋게 얘기해주는 것은 아닌가. 『(허허 웃으며) 그렇지 않다. 만일 초기에 사건을 덮기로 작정하고 (정형근 당시 대공수사단장이) 부검의인 황적준 박사에게 「단순 심장마비로 쓰라」고 강요하고 수사검사인 내게도 압력을 가하거나 주임검사를 교체해버렸다면 당시 상황에선 달리 (버텨낼)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 - 『정단장은 전령 역할에 불과하다』 ------------------------------------------------------------------------------- - ―그러나 정단장이 추가로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공개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강력히 밝히는 대목이 「안검사의 일기」에도 나오는데…. 『그것은 정단장 차원의 압력이 아니다. 정단장은 전령에 불과하다. 큰 방침은 윗선에서 안기부장과 우리(검찰) 쪽 최고 수뇌부 등이 참석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세워져 내려온 것이다. 수사단장이라는 실무적 중간간부는 수사검사의 파트너 정도다. 굳이 말하자면 「하위 관계기관 대책회의」라고나 할까. 그런 수준에서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실무차원의 대책회의는 자주 열렸나. 『그게 무슨 「회의」가 열린 게 아니다. 정식 회의체란 것은 없었다. 다만 위에서 결정된 방침을 정단장을 통해 통고받는 것뿐이다』 ―검찰라인을 통한 축소압력은 없었나. 『그것은 검찰 조직상 불가능하다.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이라고 해서 수사검사에게 뭘 덮으라 말라 하면 검찰은 끝난 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고위관계기관대책회의 방침이 어떤 형태로든 수사에 반영되지 않았겠는가. 『윗선에서 (3명의 추가 범인에 관한 사실을) 오픈하는 시기를 더 기다리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3개월이나 보류됐다. 결국 김승훈 신부가 이를 폭로함으로써 나를 살려준 셈이 됐다. 자꾸만 발표를 미루는 우리 최고위층에 대해 나는 여러 차례 욕을 했다』 ―정의원이 장충공원에서 전한 「안기부 입장」에 얼마나 부담을 느꼈는가. 『(한참 입을 다물었다가) 그렇지만 그것은 위에서 다 조율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진짜 나를 협박하려면, 당시 같으면 얼마든지 안기부에 끌어다가 족치고 겁줄 수 있었을 것이다. 정단장은 내 친구여서 그런 협박은 하지 않았다. 그게 나의 부담을 많이 덜어줬다. 그 점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정의원은 다만 대공수사단장으로서 고위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조율된 안기부의 입장을 내게 전하는 역할을 한 것뿐이다. 안기부장이 내게 이래라 저래라 얘기할 순 없는 것 아닌가』 박종철군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있어 정의원이 「상대적으로 덜 부담을 주었다」는 안의원의 얘기는 정의원이 아닌 누구라도 그 자리에서는 그와 같은, 또는 더 심한 압력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정의원은 개인적 견해보다는 당시 권력내부의 입장과 이해를 충실히 전달하는 실무자 역할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관의 입장을 전하는 조직인과 그 개인의 의견이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정의원이 안기부나 권력심층부의 입장을 단순히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런 입장의 형성이나 관철에 간여했다는 검찰 관계자들의 시각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 정형근의원은 자신이 간여했던 과거의 주요한 사건들에 대해 역사를 대하는 마음으로 진솔하고 당당하게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현 정권의 고문의혹이나 정치공작 의혹을 제기하는 핵심 역할을 맡고 있는 이상 앞으로 자신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한번은 공개적인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게 당시 사건을 지켜본 관계자들의 얘기다. 기자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정의원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몇 가지 의문점들에 대해 정의원 자신의 입장을 들어보는 인터뷰를 요청했다(별도 인터뷰 기사 참조). 박군사건이나 92년 흑색선전물살포사건, 서경원방북사건과 관련하여 공통점은 모두 정의원이 「국가적 소명」에 대한 확신에 찬 나머지 불법의 문턱을 쉽게 드나든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문제는 정의원이 갖고 있던 국가관이나 성향이 아니라 공인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얼마나 적법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일류 안기부맨」 출신의 정의원에 대한 공정하고 정당한 평가는 이와 같은 기준 위에 이루어져야만 단순한 정치보복이나 인신공격 차원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정의원 뿐만 아니라 모든 공직자 특히 오늘날 「국민의 정부」 아래서 「정치중립적인 안기부」를 표방하고 있는 현직 안기부 사람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제는 오늘의 뿌리이고 오늘은 어제의 결과다. 오늘날 안기부가 고문수사 논란에 휩싸이게 되는 것도 지난 시절 안기부가 숱한 고문강압수사 논란을 빚었던 데서 연유하는 업보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안기부가 진정 국민의 안기부로 거듭났는지는 앞으로 언젠가 정권이 교체된 뒤 국민들이 오늘의 안기부를 어떻게 평가해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 - Copyright(c) 1998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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