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1월 27일 금요일 오후 06시 16분 31초 제 목(Title): 한21/ 안변, 안상운 변호사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 언론과의 싸움엔 '안변'이 있다 변호사 안상운씨 (사진/재판으로 얻어낸 방송의 정정보도. 관련기록물을 담은 비디오가 수북하다.) 재판에서 진 적 없다 하여 ‘무패안변’… ‘최장집 죽이기’ 조선일보 저격에도 성공 그가 나타나면 언론계 사람들이 움찔한다. ‘언론 잡는 변호사’가 또 무슨 냄새를 맡았나 싶어서다. 천하를 들었다놨다 하는 신문사나 방송사라도 그가 변론의 칼자루를 쥐면 고양이 앞에 쥐가 된다. 언론사와 맞선 재판에서 진 적이 없다 하여 붙은 ‘무패안변’(無敗安辯)이란 별명이 장난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언론중재위원회에 최장집 교수 사건에 대한 반론보도와 정정보도 신청을 냈습니다. <월간조선>과 <주간조선>은 물론, <조선일보>도 원래 보도했던 지면과 똑같이 1면에 반론보도를 실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소송을 내서 끝까지 싸울 겁니다.” 법을 통한 시민운동 이른바 ‘공인의 사상검증’ 문제를 들고 나오며 최장집 정책기획위원장을 물고늘어졌던 <월간조선> 11월호에 법원이 판매·배포금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을 때, 안상운(36) 변호사는 “싸움은 지금부터”라고 다짐했다. 가처분 결정이 나옴으로써 이제야 최장집 교수와 조선일보사가 대등한 관계에서 법정공방을 벌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사와 맞서 재판을 벌일 때 가처분 결정이 참 중요합니다. 언론사가 일방적 주장이나 의도적 여론 형성을 못하도록 일단 입을 막는 효과가 있어서입니다. 이게 안 되면 언론사가 융단폭격 보도로 피해자를 사정없이 몰아붙이기 때문에 싸움은 시작부터 끝난 셈이 됩니다.” 그는 일방적인 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는 걸 꺼리는 게 언론사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때문이라고 했다. 보복당하지 않을까, 더 많은 걸 잃지 않을까,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하면서 망설인다는 것이다. 그는 언론관련 재판에서 당사자가 안 나서려 하거나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건 바로 이런 우리 풍토 때문이라고 했다.“10여년 언론관련 사건을 맡아 보니 우리나라 언론사들이 참 비열해요. 국민이면 누구나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 헌법을 준수하라고 떠들면서 자기들이 걸리면 법대로 대응 안 하고 온갖 비방을 늘어놓습니다. 정론을 편다는 언론이 유언비어를 조작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또 한국의 지식인들이 말이나 글을 통해선 언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 그게 자기 문제가 되면 영 딴판으로 나가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그가 언론사건 의뢰가 오면 끝까지 재판을 할 것인지 다짐을 받는 까닭이다. 중간에서 흐지부지 타협을 볼 거면 아예 시작을 말자고 거절한다. “전 이걸 법을 통한 시민운동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여럿이 함께 의논하고, 나아가 법원으로부터 그에 대한 좋은 판결을 받아내면 그게 우리 사회를 한단계 성숙시키는 지름길이라는 거지요.” 안 변호사가 언론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사법시험 공부를 하던 대학 3학년 때였다. 데모하는 학생들이 집시법이니 언론기본법을 폐지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는 그 언론기본법이 뭔지 궁금했다. 두달에 걸쳐 관련 자료들을 이잡듯 뒤졌고, 200장에 이르는 긴 논문을 써 법대 학회지에 발표했다. “언론기본법을 찬양하는 글은 수두룩한데 비판하는 학자의 목소리는 없는 거예요. 그 글이란 것도 법조문의 나열일 뿐이지 실제 국민이 궁금해 할 관련법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없었어요. 한심합디다. 입술이 닳도록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뒤에서 그걸 제약하는 법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바로 제 선생이고 선배라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88년 변호사 사무실을 열자마자 그가 맡게 된 첫 사건이 문익환 목사 방북 보도건이었다. 북에 갔던 문 목사가 베이징에 나와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그걸 보도한 <조선일보>가 ‘문 목사 돌아가고 싶지 않다’란 제목을 달아 망명설 비슷하게 본디 뜻을 흐려버린 것이다. 그는 이 재판을 승소로 이끌어가면서 우리 언론이 특히 공안, 북한관련 보도에서 허점을 많이 보인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시국사범, 노동자, 학생에 대한 기사는 언론사 입장에 따라 아예 확인도 안 하고 넘겨짚는 식의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논지를 펴는 경우가 많았어요. 언론사 내부에 기사의 정확성을 점검하는 시스템이 없다는 걸 체험으로 알게 됐습니다. 일이 터지면 자기 회사 기자들 보호하는 데만 급급하지 기사가 정확했는지를 검토하는 건 뒷전이에요. 그 성역 아닌 성역을 깨고 싶었습니다.” 한국방송공사 주간인 남성우씨를 주사파로 몬 <한국논단>, 한국통신노조 노동운동을 북한사주로 덮어씌운 박홍 전 서강대 총장 등이 다 그의 집요한 변론으로 법정에서 법의 철퇴를 맞았다. 물론 이들이 다 안상운 변호사를 먼저 찾아왔던 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나서는 용기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안 변호사는 언론에 억울하게 당한 이들을 찾아가서 무료변론을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걸 ‘기획변론’이라고 불렀다. 검찰도 기획수사를 하는데 변호사라고 기획소송을 못하겠느냐는 것이다. 94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언론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장을 맡아 뛰기 시작했다. 바로 그해에 북한 장학금을 받았다고 보도됐던 성균관대 정현백 교수 사건을 맡아 한국방송공사 <9시 뉴스>, 서울방송 <8시 뉴스> 첫머리에 정정문을 내보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글이었지만, 감히 누구도 건드려볼 엄두를 못냈던 제4의 권력이 스스로의 실책을 뼈아프게 인정한 고백문으로 한국 언론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자들이 나를 참 미워합니다” “우리나라는 국가권력과 언론과 시민사회가 완전히 수직적 관계예요. 청와대나 안기부 정도를 빼놓고 나면 언론보다 더 힘이 센 곳이 없어요. 스스로 권력기관으로 변해버린 지금으로선 언론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언론도 잘못된 보도를 하면 문 닫을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사건은 힘들다. 한마디로 피말리는 일이다. 일반재판이 흔히 돈에 관한 것이라면 언론관련 재판은 인격과 명예에 관한 것이다. 의뢰인에 대한 인물탐험에, 말과 글을 권력처럼 부리는 언론사를 상대하려면 수십, 수백개 컴퓨터 파일을 채우는 자료수집이 기본이다. 그는 “서초동에 수백명 변호사가 우글거리지만 언론사건이라면 다들 고개를 저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가 언론관련 재판 전문변호사로 남으려 하는 까닭 중 하나다. 언론사들에서 의뢰를 해오기도 하지만 그는 “내가 저쪽으로 넘어가면 누가 이쪽에 남을까” 싶어 마음을 다져먹는다.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c.k@mail.hani.co.kr ▣ OPEN! 한·겨·레 인터넷쇼핑몰! 한번 와보세요~ http://hani.s-mart.co.kr ▣ 한겨레21 1998년 12월 3일 제235호 . . . . . ●지난호 ●한겨레21홈 ●씨네21 ●편집자에게 ●구독신청 Copyright 1995-1998 한겨레신문사 webmast@news.hani.co.kr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