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0월 31일 토요일 오전 10시 27분 06초 제 목(Title): 김민웅/신동아 디제이노믹스의 모순과 한계 [김민웅의 세계통신(마지막회)] DJ노믹스의 모순과 한계 그리고 ‘제3의 길’ ◇김대중정부의 경제학은 애초에 의도했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발전보다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파국을 맞게 되는 민주주의의 붕괴와 이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내부역량의 훼손에 따른 시장경제의 침체라는 ‘예정된 실패경로’로 진입하고 있다. 김민웅 〈재미 언론인·뉴저지 길벗교회 목사〉 ------------------------------------------------------------------------------- -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자기파괴 논리 지난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IMF 연례총회를 전후해서 세계 주요 언론들은 자본주의체제가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현저하게 상실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미 여러 차례 IMF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해온 하버드 대학 제프리 삭스 교수의 경우 「이코노미스트」 9월 중순호에서 『이제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한 시기는 분명히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IMF를 고리로 삼아서 러시아를 비롯해 제3세계 지역경제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엮어나가려 했던 시도가 빠르게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미국이 확보하려 했던 것은 『부자는 가난한 자를 도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들은 생존경쟁의 와중에 생활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즐길 수 있을 것이며 언젠가 그들도 부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였다고 그는 지적했다. 다시 말해 『부자들이 주도하는 시장 속으로 들어오면 모든 것이 다 잘돼 나갈 것』이라는 논리인데, 오늘날 그 결과는 제3세계 개발도상국의 빈곤 심화와 그에 따른 세계경제의 공황위기로 나타났다. 세계체제론자 임마누엘 월레스타인이 지적했듯이, 결국 세계 자본주의체제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확대시켜버린 셈이다. 이는 실로 세계적 차원에서 구조화된 일방적인 자본축적의 위계질서가 주변부 국가들의 경제역량을 박탈하면서 초래한 결과였다. 세계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주변부적 위치에 놓인 국가가 아무리 뛰어난 경영능력을 갖췄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외부 의존도가 높은 성장구조로는 자본축적의 한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고, 그에 따라 성장 위기가 대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외환위기 역시 바로 그러한 현실의 적나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빈곤 문제는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잉여(surplus)를 방어하고 확보하는 구조를 갖추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풀릴 수 없다. 지금같이 세계 자본주의체제 속에 종속적으로 편입된 상태에서는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과정이 위기에 직면하게 될 때마다 그 부담을 고스란히 감당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 - 「자본의 자유」가 불러오는 불확실한 미래 ------------------------------------------------------------------------------- - 아시아 금융위기 직전에 신자유주의 체제의 실패를 예견한 책 『자본주의의 문제』를 내놓아 주목받고 있는 해리 셔트가 이미 오래 전에 『서구가 역설하는 자유무역 논리 속에는 이미 서구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다 마련돼 있다』고 갈파한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경제의 무서운 현실과 이념적 허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아시아 경제위기의 현실에 대안적 모델로 제시됐던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는 그 동안 여러 가지 외부적 도전에 직면해왔지만, 특히 헤지펀드 「롱 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ong Term Capital Management)」의 파산위기를 통해서 드러낸 것은 자멸적 요인이 내재한 카지노 자본주의의 본질적이고도 필연적인 위기였다. 그간 투기자본의 규제를 요구하는 제3세계의 목소리를 외면해왔던 미국으로서는 더 이상 이에 대한 반론을 펴기가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체제가 확대재생산에 주력했던 자기 자신의 내부적 파산이라는 점에서 충격이 적지 않았다. 밖으로부터의 공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블랙 홀과 같은 국제 금융자본의 투기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다시피 한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생명력은, 이렇게 그 동안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신봉해온 「자본시장의 자유화」가 정점에 도달했을 때 파멸 위기를 감지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본시장의 자유화에 성공한 결과가 바로 그 실패의 모체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없는 자기모순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이윤 극대화라는 「통제되지 않는 탐욕」을 최우선적인 논리로 삼는 체제가 피할 수 없는 비극이다. 「자본의 자유」를 무엇보다도 귀중하게 여기는 가치관과 이에 근거한 사회경제적 질서는 이렇게 스스로의 존립기반조차 파괴하는 사태에 이를 수밖에 없고, 빈부격차의 극단적인 심화로 인한 사회적 양극화가 빚은 갈등과 대립의 정치적 불안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아시아의 패배」로 이해됐던 작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오늘날 서구를 포함한 지구촌 경제의 공멸 위기로 이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시아를 위시한 제3세계의 경제 역량을 극도로 소진시키면서 국제 금융자본의 자유를 극대화하려던 IMF 등 신자유주의 노선의 결과는 헤지펀드의 미래적 자산가치를 결정할 기초인 제3세계의 실물경제를 붕괴시켜버렸고, 그것은 결국 자신의 시장존립에도 위협적인 사태를 자초하고 만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문제는, 이러한 세계 자본주의체제 자체의 전환기적 위기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것과 함께, 바로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가치체계를 자신의 발전논리로 채택하고 있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이 도달하게 될 「예정된 실패」다. 김대중 정부는 파산 위기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가치체계의 부담과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제동과 대안체계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이뤄지지 않을 경우, 우리는 앞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외부의 충격과 함께 내부에서 스스로 키운 사회경제적 폭력에 휩싸여 고통받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희생의 최일선에는 또다시 돈 없고 힘 없는 백성들이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이 초래할 집단적 분노 앞에서 김대중 정부의 미래는 없다. 더구나 지금처럼 정치적 통합력과 효율성이 극도로 손상돼 있으며, 민심이 정치에 등을 돌린 상황은 집권세력의 안주와 자기변호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김대중 정부가 실패하기를 바라서 이런 주장을 펼치는 건 결코 아니다. 김대중 정부의 실패는 우리 모두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이니만큼, 지금이라도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비극적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 나름의 대안을 향한 고뇌와 자기성찰을 기대해서 하는 말이다. DJ노믹스의 한계와 모순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그 골간이 『DJnomics, 국민과 함께 내일을 연다 : 국민의 정부 경제 청사진』이란 책 속에 정리돼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 책이 절대적인 지침이 될 수 없는 상황도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기반으로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것에는 제약이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이 근거하고 있는 이념적·이론적 기초를 이 책 속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따라서 총론적인 검토는 가능하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개념은 잘 알려진 대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다. 이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제한하고, 시장의 힘을 강화시키는 민주적 장치를 마련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변화 위에서만 창발적이고 유연한 경제역량이 자생 기반을 갖춰나가며, 종국적으로는 권력의 일방적 지배가 아닌 국민 전체가 주도해나가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적으로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부의 규제 해제와 투명성 확보, 공정한 경쟁체제와 개방체제가 수립돼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지난 시기 한국경제는 국가권력이 주도해 단기적으로 압축성장이 가능했으나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정경유착, 관치금융, 부정부패 등으로 인한 시장기능의 파행과 왜곡을 가져와 결국 오늘날과 같은 파산을 초래했다는 진단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지난 시기의 공과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동시에, 그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반성에 따른 결론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최초로 국가 스스로가 국가권력의 민주적 통제를 자율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정상적인 시장기능을 복원시키고, 세계화가 진행되며 경제국경이 소멸되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개방을 통해서 경쟁력을 강화해나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와 같은 현실접근과 정책논리는 이전과는 구별되는 중대한 인식의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기능에 대한 국가권력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 그리고 관료적 통제는 거부돼야 마땅하며, 경제질서의 공정한 운동법칙 위에서 이뤄지는 경쟁이 시장의 생명력을 건강하게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세계경제체제에서 고립된 방식으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자신감 있는 개방체제를 육성하는 것은 절실한 일이기도 하다. ------------------------------------------------------------------------------- - 「낡은 논리」론 세계적 위기 극복 못한다 ------------------------------------------------------------------------------- - 이렇게 보면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이 지향하고 있는 이념적 비전과 정치철학적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과 역사적 정당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이 직면하고 있는 모순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렇듯 진전된 논리적 토대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현실 세계에서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한계는 무엇인가?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이 놓치고 있는 인식의 함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론」의 기본틀인 국가, 시장, 세계화에 대한 이해의 문제로 집약된다. 바로 이 인식의 한계로 인해,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애초에 의도했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발전보다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파국을 맞게 되는 민주주의의 붕괴와 이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내부적인 경제역량의 훼손에 따른 시장경제의 침체라는 「예정된 실패의 경로」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이 목표하고 있는 내용들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과 무조건적인 파산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늘의 현실에서 부분적인 의의를 갖는 정책논리가 전무(全無)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는 그 목표설정의 방식과 구체적인 내용이 기본적으로 서구경제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일면적인 인식에 갇혀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런 일면적인 인식은 매우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정작 근본적인 부분에 대한 인식이 결정적으로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이 지니고 있는 나름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압도해버리는 결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먼저 경제사적 발전단계로 볼 때, 전근대적 봉건사회의 질곡을 극복하는 「부르주아 혁명」의 논리구조에서나 가능한 낡은 사고체계, 즉 과거 권위주의적 권력에 억압돼 있던 「시장」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매우 단순하고도 구시대적인 역사논리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리하여 세계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발휘하고 있는 부(富)의 창출기능 못지않게, 그 내부에 자기생존의 논리로 엄존하고 있는 본질적인 야만성과 억압의 가능성에 대처하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데에서 비롯되는 비극인 것이다. 그런 토대 위에서 이뤄지는 개혁과 변화는 근원적으로 대결해야 할 문제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순에 대한 해결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가령 정경유착, 관치금융, 부정부패의 극복이 성공적으로 성취됐다 해도 이것이 사회적 양극화와 경쟁주의적 체제에서 탈락한 집단에 대한 보호망 붕괴, 한국경제의 구조적 대외종속 등을 해결할 수 없으며, 자기방어체제의 육성이 전제되지 않은 개방체제의 수립은 외부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동요하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에 대해 다소 신랄하게 말하자면, 고전적인 영국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시장에 대한 중상주의적 간섭과 절대주의적 권력에 도전하면서 배태된 18세기 존 로크의 정치사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그래서 그 이후 전개된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무수한 도전으로 수정을 겪지 않을 수 없었던 「보수적 자유주의」의 초기 관점에서 크게 진전하지 못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바로 이 보수적 자유주의의 틀 속에서 자라난 영국의 대처리즘과 일맥상통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 위에 있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노선에 따라 자본의 주도권을 전제로 하는 정책에 기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전체적인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본의 위상을 조정하는 것보다는 노동의 희생을 필수조건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노동의 반발을 수반하게 되고, 생산자이자 동시에 소비자인 노동자들의 총수요가 빈곤 때문에 하락하는 현상을 초래해 경기침체를 유도하게 된다는 점에서 결국에는 자멸적 논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때로 내부적으로 재벌들을 압박해가면서 자본의 굴복을 겨냥하는 정책을 시도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더 규모가 크고 위력이 강한 국제 금융자본의 이해를 우선적으로 보장하는 후기 식민지적 구조조정과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외채상환을 비롯해서 전략산업의 방어 등에 긴요한 내부 자본의 주체적 역량을 스스로 제한해버리는 자기 모순에 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본투자와 재원배분의 중심기능을 수행할 정치 기반이 동요하며 장기적 구상을 세우기 어려워진다. 뿐만 아니라 이미 그 한계가 분명하게 노출된 대처리즘과 신자유주의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이의 실패에 반발하고 벌써부터 치열하게 대안을 찾고 있는 국제환경의 새로운 변화 앞에서 혼란을 겪고, 결국 개방의 포장을 쓴 대외종속과 사회경제적 갈등의 고리를 풀어낼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가 되는 사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 - 「절망의 정치」가 초래할 「슬픈 야만」 ------------------------------------------------------------------------------- - 이윤추구를 최고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경쟁주의적 체계를 모델로 하고 있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으로는, 지금 도처에서 엄청난 상처와 타격을 입고 비틀거리고 있는 한국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을 정성으로 감싸 안아가는 공동체의 건설은 무망해질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패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패자가 되고 만 현실을 함께 아파하면서 재기할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열어 가는 나라야말로 진정 좋은 나라다. 이윤창출에 실패한 패자를 단지 공동체의 부담으로 인식하는 가혹한 논리 위에서 우리는 인간성을 포기하고 살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공동체의 해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가 불가항력의 현실 때문에 인간성을 배반하는 선택에 몰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소수의 무능력한 패자들을 경쟁의 장에서 제거해야 다수의 생존자들을 포함한 모두가 결국에는 살 수 있다는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낙오자」라는 희생양을 양산하는 폐허일 뿐이다. 얼핏 논리적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이 「다수의 생존자를 위한 소수의 불가피한 희생론」은 사실 알고 보면 정의로운 자원의 배분에 저항하는 기득권의 탐욕은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한 채 힘없는 이들에게 모든 고통을 안겨주는 명백한 위선이다. 그것은 오늘날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빈부격차를 봐도 당장 입증되고 있으며, 이 나라의 이른바 지도층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아도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가난한 자들의 피눈물을 닦아나가는 따뜻한 마음이 담기지 않은 일체의 정책과 논리는 결국에는 사리사욕적 기득권을 방어하는 「절망의 정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절망의 정치」가 결국 잉태하는 것은 모두가 모두에게 극단적으로 이기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슬픈 야만」의 현실이다. 자기 자신 외에는 모두를 잠재적인 적(敵)으로 삼아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거짓 미소를 지으며 적과 동거하고 있으며, 자신의 승리를 위한 결정적 배신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사뭇 불신 타파를 외치는 것은 냉소만을 불러올 뿐이다. 불신은 자기 방어를 위한 기본적인 생존법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누구도 믿지 않는 「고독한(?) 약탈자와 정복자」로 변신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로 이해돼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가령 칭기즈칸을 모델로 한 공격적이고도 냉혹한 경영론이 부각되는 세태는 그런 현실의 어김없는 면모다. 프랑스의 구조주의자 레비 스트로스는 그의 저서 『슬픈 열대(熱帶)』에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자기정체의 문화인류학적 고유성이 해체돼버린 열대 아프리카의 비극을 고발한다. 그런데 우리의 비극은 더 깊은 곳에 존재한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인간」을 추구하는 일이 자본의 이윤가치에 의해 원천 봉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인간적 순결과 윤리적 고뇌는 사회적 진보를 가로막는 「세상물정 모르는 자들의 죄」가 돼 버린다. 문화 부문에서조차도 이윤가치를 초월하는 진정한 정신적 풍요를 갈구하기보다는 「돈을 잘 벌어들이는 문화산업」을 향해 달려가도록 채찍질받는다. 결국 그런 사회가 맞닥뜨리게 될 우리 모두의 자화상은 물질에 영혼을 팔아버린 현대판 파우스트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진실한 자기를 잃어버리기로 작정해야만 생존할 수 있고, 결국은 본질적인 소외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국가주의의 거부와 시장자유화 논리의 함정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정부주도형 시장육성과 발전논리를 거부하는 데에 그 이론적 기초를 갖는다. 그리고 그 대안체계로 창의력이 잠재된 시장의 경쟁체제를 보장하고자 한다. 그 동안 시장에 부당하게 간섭해온 권력의 흔적을 지우고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이 이뤄지면 사태는 호전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모델을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시장경제 원리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당시 적자재정이 누적돼 초래한 인플레를 억제하기 위한 대처리즘의 고금리 통화정책이 심각한 신용경색을 가져와 영국의 실물경제를 파괴하여 1980∼82년에 무려 20% 이상의 공장들이 폐쇄됐고, 기간산업 역량이 상당 부분 훼손됨으로써 외국 자본에 소유권을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던 비통함은 외면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기간산업을 외국자본에 매각한 상황을 마치 선진 자본시장의 개방된 행동방식이라고 추켜세우고 있지만, 현실은 경제운용의 실패로 인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외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대처리즘은 1979년에 비해 무려 4배 이상의 실업률 상승이라는 굴레에 갇혔으며, 사회복지 예산의 무자비한 삭감으로 영국사회 내부가 사회경제적으로 양극화해버린 사실도 외면하고 있다. 공기업 민영화가 대량해고에 따른 초기의 수익률 상승효과 단계를 넘어서면서 결국은 독점자본화한 기업의 수익률 유지를 위해서 영국 국민들이 추가로 부담하게 된 비용 문제는 따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공익적 가치가 파손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복지부문 재정부담이 늘어났던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와 함께 자본시장 규제가 무방비하게 해제돼 결국에는 투기자본의 지배를 초래함으로써 영국산업의 건강한 투자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어버린 뼈저린 실책을 직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한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미국에서는 유연한 노동시장과 세계 최고의 자본시장이 경쟁력 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면서, 아무런 저항없이 해고할 수 있는 미국의 현실을 장점으로 꼽고 초고수익―초고위험의 벤처 금융까지 소화하고 있는 자본시장의 다양성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미국의 산업별 노조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자신의 정치·경제적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지, 해고 이후의 사회적 안전망이 어떤 방식으로 돼 있는지, 그리고 해고에 대해 노조와 협상하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또, 미국에는 해고 후 이들 노동력을 흡수할 수 있는 광대한 국토에 다양한 노동시장이 존재한다는 현실이나 해고의 자유가 바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직시하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개념은 일정 비율의 실업을 유지기반으로 하는, 즉 산업예비군의 재고 확보를 통한 노동가격의 통제와 관계가 있다는 점은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는 실로 노동자들의 생활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자본의 지배전략이며, 얼마 전 수개월간에 걸친 제너럴 모터스 사의 노사분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순한 현실인식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이 찬탄해 마지않는 카지노적 벤처 금융의 비대한 성장이 다름아닌 바로 미국 경제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한다면, 사회 전체의 공적 이익을 기준으로 통제되지 않는 시장의 자유가 어떤 고통을 가져오는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 - 맹목적인 서구지향 화를 부른다 ------------------------------------------------------------------------------- - 이에 더해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이른바 「선진국」의 성장사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발달시킨 경로로만 이해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위계질서를 군사적으로 국제화시켜 자신에게 유리한 일방적인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했고, 이것이 선진 산업국가들의 경제적 기반을 결정적으로 조성한 역사적 토대였다는 사실(史實)에는 눈감고 있는 것이다. 인도가 없는 영국과 아프리카가 없는 프랑스, 그리고 흑인 노예와 라틴 아메리카가 없는 미국의 독자적인 부(富)를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상정할 수 있는가? 이들이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주변부 국가들에게 강요했던 정치경제적 폭력구조에 희생된 「인류의 약자들」을 떠올리지 않고서 선진 산업국가들의 시장경제에 대한 예찬만 늘어놓는 것은 이들 서구 자본주의체제에 세뇌돼 기만당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 속에는 이들이 자신의 시장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의 권리와 민주주의를 억압했던 식민지 논리의 위선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다시는 여기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자기방어의 진지가 확립돼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자기방어 장치가 없는 자본시장의 자유화가 가져올 외국자본의 금융지배에 대한 안이한 인식과 매판성에 직결된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품구입, 서비스 대가 지불 등을 외화로 자유롭게 결제하고, 1달러 커피하우스, 10달러 스테이크 하우스 등』을 운운하는 사고는 달러 경제권의 공식 식민지가 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이렇게 될 때 갈수록 원화경제의 주권적 역량은 위축되고, 그것이 확대 재생산해야 할 경제의 미래는 우리의 독자적 구상과 무관해질 것이다. 『한국 땅에서 기업을 하면 소유자의 국적과 상관없이 모두 한국 기업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지 않고서는 경제선진화를 이룰 수 없다』는 대목에 이르면 경제에서 소유관계가 얼마나 결정적인가, 그리고 자본의 성격을 판별하지 않은 투자 유도가 자신의 산업기반에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고려하지 않은 논리임을 보게 된다. 가령 자동차시장 개방과 관련하여 미국이 한국 정부에 강도 높게 가하는 압박을 보면, 과연 자본의 국적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고용효과와 경영기술 도입이라는 측면에만 주목하면 미국 자동차 기업의 진출과 이들의 한국시장 장악과정을 경제선진화로 이해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투자가 있는가 하면 받아들일 수 없는 투자가 있으며, 우리 기업과 똑같이 생각할 수 있는 우호적인 외국 기업이 있는가 하면 오직 저가로 노동을 착취하고 우리 경제의 산업구조에 파행적 여파만 끼치고 말 외국 기업이 있는 것이다. 이를 제대로 판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째서 우리 땅에서 기업을 하면 모두 우리 기업이라고 사고해야 한다는 논리를 일반화하려 드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또한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이들, 소위 선진국의 시장경제에 동반되는 민주주의란 그 역사적 발전과정에 보여준 노동운동의 치열한 조직적 투쟁과 도전, 그리고 이로 인한 좌·우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대한 정치적 수용에 의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이러한 정치적 성과가 시장경제를 주도하는 자본의 일방적인 횡포를 저지하고 국가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시스템을 발전시켜온 점 역시 주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장의 자유에 기본 원칙이 될 경쟁에 대해서도,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경쟁과잉이 가져올 자원의 비생산적 배분과 공동체 해체의 파장, 그리고 자본축적 기반의 궁극적 붕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지 않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시장이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시장의 자원배분 방식은 자본 내부의 과잉경쟁이 통제되지 않아 매우 불균형하며, 이것은 결국 중복투자와 과잉생산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시장의 자유라는 원리가 우선적인 기준으로 이념화돼 있는 체제에서는, 생존을 위한 기업들의 과잉경쟁과 자원의 불균형한 이동 배치가 불가피하다.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의 투쟁에 져서 죽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몸을 키워야 하고, 후발체제가 겪어야 할 상대적 불리함을 피하고 싶어하는 기업의 생리상 이것은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 기득권 조율로 전락한 비전 없는 빅딜 ------------------------------------------------------------------------------- - 우리가 겪은 경제위기는 시장에 맡겨진 자원배분의 비합리성이 빚은 혼란이지 국가가 관리하고 개입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개입과 관리가 산업구조 전반에 걸친 미래적 청사진과 연결되지 못한 것이 문제지, 시장의 합리성을 보장하지 못한 탓이 아닌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경제위기를 초래한 재벌을 추궁하고 비효율적 투자에 대한 지탄이 높지만 경쟁가치가 우선이 되는 현실에서는 차입이든 아니든 가능하다면 일단 금융적 기반을 무제한적으로 확대하고 이를 토대로 각종 경제활동의 선도적 위치를 확보하려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느 누구라도 그러한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초고강도의 경쟁 압박을 감당해 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초국적 대자본과 경쟁해서 살아남으려면 오히려 자본의 집중과 독점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적 요인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재벌들의 방만한 경영과 무책임한 투기적 자본관리, 그리고 노동을 억압하면서 취하는 잉여확보의 전략들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정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대자본의 횡포와 무지, 그리고 탐욕이 쏟아낸 악취 나는 쓰레기들의 부당한 희생자들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경쟁가치의 시스템이 최선의 논리로 강화되는 한, 그 경쟁에서 최강의 입지를 확보하는 기초는 누가 뭐래도 자본의 집중과 독점이며 자원확보의 파행성을 고려할 여지가 없다. 자본의 집중과 독점을 위협하는 일체의 정치경제적 장치에 대한 기업의 저항은 필연적이며, 자원배분의 공익적 판단까지 기업에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은 자칫 낙오자로 만드는 일이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경쟁을 기초로 한 시장의 자유가 아니라, 진정한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제행위에 대한 보상과 지원 시스템이며, 이를 위한 자원배분의 전체적인 균형을 도모하는 국가의 역량을 발전시키는 작업이다.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무리 요구해봐야 갈등만 깊어질 뿐이다. 그리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자원편성의 장기적 계획 위에서 기업의 효율적 투자가 가능해지며, 불필요하고 비생산적인 경쟁을 피하고 자기가 선택해야 할 경제행위에 대한 판단이 정리될 수 있다. 주력하려는 경제행위를 위해 요구되는 자본의 적정규모와 산업기반의 지원체제는 그러한 과정을 통과하면서 가늠될 수 있으며, 이로써 합리적인 자원배분을 통한 짜임새 있고 낭비 없는 경제성장의 진로가 확립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반적인 산업구조 비전과 청사진이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기업간의 이른바 빅딜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지 기득권의 조율이라는 차원에서 억울해하는 자와, 수지 맞은 자의 구별이 있을 뿐인 접근법이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경제구도, 그리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요구되는 산업재편성, 그 과정에 동원돼야 할 자본과 자원, 그리고 그것을 책임있게 감당해나갈 기업의 역량 평가와 주체선정 등의 방식을 민주적 논쟁과 검토의 틀 속에서 전개해나갈 때 빅딜은 기득권 조정작업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미래적 요구에 부응하는 중대한 사명의식의 공유로 전환될 수 있다. 이 공유된 인식의 토대 위에 향후 통일된 남북의 경제와 아시아 전체의 지역경제에서 차지할 우리의 위상을 준비해나가는 경제역량이 건강하게 성장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서 우리 내부의 대자본이 걸머져야 할 역사적 과제를 새로 인식하는 것이며, 재벌의 구조조정 과정이 초국적 대자본의 독점체제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주는 우(愚)를 피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실로 우리의 형편은, 시장의 탐욕적 경쟁과잉에 따른 생존전략의 종국적 혼란에 국가의 미래를 맡길 수 없는 상황이다. 과거와 같은 권위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논쟁하고 대안을 제시해 국민적 역량을 고도로 집중시키고 효율적으로 관할해나갈 수 있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오늘의 위기를 내일의 발전을 위한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 정부의 경제학은 국가와 시장, 세계화의 현실에 대하여 전면적인 재검토와 비판적 논쟁을 광범위하게 시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위기의 연속적인 파도 앞에서 방향타를 잃어버린 채 파선(破船)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제3의 길 세계는 지금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워싱턴에서 열렸던 IMF 연례 총회는 앞날에 대해 중요한 문제를 시사했다. 기본적으로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확고하게 유지돼왔던 미국의 국제적 주도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던 것이다. 그동안 미국의 주도하에 행동반경을 확대해온 IMF가 유럽과 일본, 그리고 개발도상국들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고, 이와 함께 최근 IMF 정책에 이견을 제시하고 있는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이들 비(非)미국권 국가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은,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성격 변화를 예고해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도권이라는 차원에서는 미국 이외에 여러 개의 지역 중심들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이른바 「다극화의 전개」이며 성격상으로는 시장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붕괴, 그리고 사회적 필요와 보호장치를 강화하는 새로운 경제체제의 창출로 요약된다. 최근 들어 이곳 저곳에서 「제3의 길」이라고 논의되는 개념들도 모두 이러한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몰락했던 유럽과 일본, 그리고 당시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위상을 확보했던 나라들이 미국과 맺었던 미국 위주의 일방적인 질서가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그러한 과도기적 현실에서 미국의 기존 리더십이 안팎에서 동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일들은 당장에는 위기로 비치겠지만, 더 긴 안목으로 본다면 필연적인 변혁의 물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인류의 각종 문제를 감당하지 못한 채 기력이 쇠해버린 체제의 변화와 관련된, 지구촌 전체의 자기생존을 위한 「새로운 틀 찾기」인 것이다. 언필칭 세기말적인 대전환이 아닐 수 없다. 유럽 언론들은 이번 독일 총선으로 사민당의 슈뢰더가 등장하면서 콜 총리를 중심으로 전개돼왔던 유럽통합의 제1기가 완료됐다고 보고 있다. 이제는 그 통합의 성격이 더 분명해지는 시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주도권이 유럽의 국제정치적 위치를 약화시켰다면, 유럽통합은 그러한 상대적 약세를 극복하면서 단지 미국과 동등한 파트너십을 확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식 모델을 대신할 중도좌파 내지는 좌파적 유럽형 사회경제체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는 의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유럽이 하나가 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어떤 하나로 되는가가 주목되는 시기구분이 유럽의 정치이념 판도를 완결짓다시피 한 독일총선으로 가능해졌다는 것인데, 그래서 「뉴욕타임스」도 유럽이 미국과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를 놓고 이견을 드러내고 있으며, 유럽 자신의 발언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고 대서특필했다. 이렇게 서방진영 내부의 역학관계가 변화하고 있는 것은, 이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경제적 유산이 정리되는 시기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19세기적 제국주의 질서로 형성됐던 세계가 미국이 패권국가로 재편된 이후 탈냉전 시기에 이르는 동안에 확실하게 청산되지 못했던 역사적 유산들을 정리하면서 미국의 패권 자체도 이에 영향받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청산되지 못했던 역사적 유산이란 미국이 자신의 냉전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제대로 된 청산 절차를 밟지 않고 모순이 내포된 국제적 관계들을 적당히 얽어놓았던 것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제 인류는 기존 패권체제가 전환기에 직면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제3의 길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 것을 요구하고 있다. ------------------------------------------------------------------------------- - 블레어와 마하티르 ------------------------------------------------------------------------------- - 여기서 우리는 영국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을 비판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의 논지는 영국의 사회민주주의 또는 중도좌파적 노선의 수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운명과 그 운용에 대한 중도좌파적 선택이 장래에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케인스 또는 현실 사회주의가 치중해온 국가주의적 접근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가 지향해온 시장경제와 절충을 기하면서 좌파적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토니 블레어의 경우 이른바 페이비언 소사이어티의 전통, 다시 말해서 영국식 의회민주주의와 결합한 사회주의를 어떻게 새로운 세계화의 현실에 접목시킬 것인가가 관심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블레어가 마하티르와 같은 제3의 대안은 부정했다는 점이다. 토니 블레어가 말레이시아를 식민지로 가졌던 역사의 연장선 위에 있는 영국의 정치가인 데 반해 마하티르는 바로 이 영국과 식민지 해방투쟁을 한 경험이 있는 제3세계 정치지도자라는 중대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다. 이 점이 바로 토니 블레어가 세계 자본주의체제로부터 희생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치밀한 관심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에 대해 논평하면서, 현재 자본주의가 금융위기로 인한 동요를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은 이러한 점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 적극적인 정부의 시장정책은 논하면서 기업의 공적 책임 같은 문제에는 침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블레어의 논리는 이미 독일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주창했던 자본주의를 수용한 사회주의 노선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가 부를 만들어내고 쌓아가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용납하고 있는 자본의 집중, 부의 집중이 야기하는 근본적인 불안정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단지 금융체제가 외면적으로만 변하면 사태는 해결된다고 여기는 자세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IMF 보고서가 주장하고 있듯이, 자본의 자유화는 역행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이 모두를 위해 이롭다는 전제 자체를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목도 논란 여지가 있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이 더 명확한 정책으로 이어져서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세계 자본주의의 현실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토대를 두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가디언」지의 논평에서 우리는 블레어의 「제3의 길」이 드러내고 있는 논리적 약점과 역사인식의 한계를 보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블레어류의 제3의 길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심도있게 분석해서 자본의 세계화를 기반으로 한 후기 제국주의적 지배체제로부터 해방되고,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경제학적 대안을 창출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우선 아시아 지역에서 지도력 있는 노선과 모델을 제시하는 역량을 갖춘 나라로 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19세기적 부국강병론」의 변형인 일류 국가론과는 관련이 없다. 이 작업을 위해서 김대중 정부와 이 나라 지도층, 그리고 특히 지식인, 종교인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말할 수 없이 고생하고 있는, 힘없는 백성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이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던지려는 순수한 결단일 것이다. 그 결단이 주는 감동과 우리 모두의 하나됨은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가혹한 경쟁과, 이윤이 모든 가치를 압도해버리는 사회의 야만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함께 서로를 보살피고 지원하며 격려하는 「선하고 평화로우며 질적으로 다른 풍요」를 누리는 나라를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모두의 가슴속에 이런 꿈을 키워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이 시대에 필요한 지도력이다. 필자후기 지난 1년동안 연재를 애독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위기를 진단하고 우리의 진로를 새롭게 모색해보는 이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시대는 그 시대에만 얻을 수 있는 지혜와 깨우침, 그릭 새롭게 자라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부디 독자 여러분 모두의 삶에 그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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