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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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itics ] in KIDS
글 쓴 이(By): doni (+ 도 니 +)
날 짜 (Date): 1998년 9월  3일 목요일 오전 07시 10분 14초
제 목(Title): [퍼온글] 정신적 스승 심산 선생.


퍼온 글입니다.

성균관대학 초대총장인 심산 선생에 관한 글입니다. 
교육개혁을 주장하던 서울대총장은 고액과외로 물러가고 정치권은
여전히 혼미하고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심산 선생같은 
올곧기만한 정신적 스승이 아쉽기만 합니다.
(이 글을 쓴 저자에 대해선 신경쓰실 필요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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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해방공간의 주역:8)] 

김학준 정치학박사·단국대이사장 

 ◎정당 거부한 「국로」… 
「자주정부론」선봉/ “국정중심 건국”철저한 민족주의 노선/ 
“남북 별개정부 반대”7거두성명 발표/ 
이승만 독재 심해지자 하야 촉구… 칠순넘어 두차례 옥고 


1946년 새해가 밝아오면서 남한의 해방정국이「찬탁」의 좌익세력과
「반탁」의 우익세력 사이의 대결로 매우 심각하게 분열됐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번 지적했다.이처럼 양극화된 상황에서 두 세력이 모두 
존경하며 두려워한 국로격의 정신적 지도자가 있었다. 

정당활동에는 무관한 가운데 전통적 유학의 대의명분론에 입각해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부르짖었던 심산 김창숙이 바로 그였다. 

심산은 조선이 개항한 때로부터 3년뒤인 1879년 경북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이승만보다 네살 아래,김구보다 세살 아래였고 송진우보다 한살 위였다. 

심산의 20대에 해당하는 1900년대초 대한제국의 명운은 글자 그대로 
바람앞의 촛불격이어서 많은 우국지사들이 여러 방면에서 구국운동을 벌였다. 
심산도 선비집안의 후예답게 이러한 구국운동에 참여 했다. 

1905년의 을사조약 때는 「다섯 역적의 목을 베라」고 상소하기도 했고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을 규탄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또 대한협회에 가입해 
성주지부를 세우기도 했고 성명학교를 열기도 한 것이 그 대표적 보기들이었다. 

심산이 만 31세가 되던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겼다.그는 
통분한 심정을 이기지 못해 폭음과 미친 짓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어머니의 엄격한 훈계를 받아들여 학문에 힘써 장차 「큰 유학자」
「큰 문장가」로 불리게 되는 바탕을 쌓았다. 


○유림의 정신적 지주 

심산이 만 40세가 된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그의 
생애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왔다. 

3·1운동의 준비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유림이 뒤늦게나마 움직여 
지도적 선비 1백37명의 독립선언 서명을 받아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평화회의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파리 장서」를 그가 휴대하고 우선 
상해로 밀행한 것이다. 

거기서 그는 석오 이동령, 성재 이시영,단재 신채호 등을 만났다.그들은 
「파리 장서」를 몇몇 구미어로 번역해 우편으로 보낼 것을 권했다.
그는 이 권고를 받아들여 그렇게 했으며,곧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돼 상해에 눌러앉았다. 

「파리장서」가 국제적으로 알려지자 일제는 국내의 유학자 5백여명을 검거했다. 
이것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제1차 유림단사건이라 부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심산은 국내외의 독립운동권에서 명성을 떨치게 됐다.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 국민당 지도자들과 사귀면서 중한호조회와 
한국독립후원회를 출범시키기도 했으며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거둔 뒤 
다시 상해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의 고문이 
되어 나석주를 국내로 잠입시켜 일제가 조선을 경제적으로 수탈하는 대표적 
도구였던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산에게도 불운이 닥쳐 만 48세이던 1927년 상해의 
영국인 병원에서 체포돼 본국으로 압송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그를 혹독하게 고문해 앉은뱅이로 만들었다.
그의 별호 벽옹,즉 「앉은뱅이 노인」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일제는 심산을 앉은뱅이로 만들어 놓고도 14년 징역형을 선고했다.그러나 
그의 병이 워낙 깊어 7년 뒤인 1934년 형집행정지로 대전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 그 이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11년 동안 그는 일제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 굽히지 않으면서 항일의 지조를 굳게 지켰다. 
그의 두 아들도 모두 항일 투사로 목숨을 잃었다.

일제가 항복을 발표하기 1주일 앞선 45년 8월 7일에 심산은 다시 구속됐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 전에 국내의 혁명동지들이 비밀운동기관으로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나를 남한책임자로 추대했는데 이 사실이 발각돼 여러 동지들과 함께 
검거됐던 것』이다. 

심산의 이 회고에 대해 약간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가 말한 건국동맹은 
여운형의 지하조직이었던 건국동맹을 뜻하는 것인가. 

그의 자서전을 보면 심산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때나 국내에서 감옥생활을 
하던 때 이미 여운형을 신임하지 않았는데 여운형이 책임자로 있던 건국동맹에 
어떻게 가입할 수 있었을까.더구나 이 때는 남북분단 이전인데「남한 책임자」란 
무슨 뜻인가. 


○인공수립 맹비난 

뒷날 밝혀진 여운형의 건국동맹 간부 명단에 심산은 없다. 또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바탕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것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변모시킬 때 심산은 반대한다.그렇다면 「건국동맹 
남한책임자」란 무슨 뜻인가. 

어떻든 다시 투옥된 심산은 8·15와 함께 곧바로 석방됐다.만 66세의 그는 
동지들의 재촉을 받고 상경해 건국사업에 이바지하고자 했다.그의 경륜은 임정을 
하루빨리 환국시켜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통일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의 해방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해방된 때로부터  2주일밖에 
안됐는데도 정당은 벌써 60여개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의 표현으로는 혼탁한 
상황에 대해 듣기가 싫어서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

심산은 이 무렵 민중당 당수로 추대를 받았으나 『정당의 치열한 
난투가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거절했다. 

이러한 노선의 심산에게 여운형과 박헌영 등이 주동이 된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 선포는 분노의 대상일 뿐이었다.이것과 관련해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통렬히 비판했다. 

『아! 신흥국가의 정식 정부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데 저 여,박등 
몇 사람이 하룻밤 사이 창졸간에 비밀히 모여서 저희끼리 서로 추천하여 
부서를 정하고 1천명도 못되는 무지한 시민을 모아 놓고서 
이게「조선인민공화국 정식정부」라고 선포했다니,저들은 정권을 잡기 위해 
국민을 기만한 것이다. 그 죄는 죽임을 당해도 쌀 것이다』 

여운형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준비하던 시점에, 우리가 제3회에서 보았듯, 
고하 송진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환국환영회를 조직하고 심산을 부회장으로 
추대했다. 

임정봉대론자인 심산은 추대를 받아들였다.그뿐만 아니라 그 조직을 모체로 
송진우가 국민대회준비회를 발족시키고 심산을 고문으로 추대하자 
그 자리도 받아들였다. 정당과 정치조직의 난립을 경계했고 인공을 비난했던 
심산이 이 2개의 조직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그가 임정 중심의 입장에 서 있었고 우익의 입장에 서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그의 이 입장은 우리가 다음에서 보게 되듯,해방3년의 공간에서 
일관되게 지켜지는데,그런데도 좌익은 반좌익의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단체로 「모시려고」 애썼다. 

심산을 비롯한 임정봉대론자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임정의 간부들은 
45년 11월과 12월 두차례에 걸쳐 귀국한 데 이어 46년 1월23일 
비상국민회의를 열고「자주적 과도정부」의 수립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이 때「저명한 민중지도자」로 8명이 지명됐다. 
북한의 고당 조만식을 빼놓으면 남한에서는 7명이 지명된 셈인데 
심산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지명됐다. 

 ○“신탁은 매국매족” 

비상국민회의는 일종의 국회격이었다.그래서 비상국민회의는 46년2월1일
정부격인 최고정무위원회를 구성했다. 심산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과 함께 최고정무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임정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사회단체로 인정할 뿐인 미군정은 
비상국민회의와 최고정무위원회 모두를 인정하지 않았다.남한에서는 자신만이 
하나뿐인 합법정부임을 강조한 미군정은 그리하여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를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그 이름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바꿨다.민주의원의 의장에 이승만,부의장에 
김규식,총리에 김구가 각각 선출됐다. 

심산은 이러한 변경에 대해 맹렬히 반대했다. 민족의 자주적 과도정부가 되기를 
자임하면서 출범한 최고정무위원회가 한낱 미군정 자문기관이 된다는 것은 민족과
국가를 파는 반역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민주의원 취임을 거부했고,「오늘날의 한반도 실정에 미루어 미군정 
자문기관으로나마 민주의원을 출범시킬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한 
이승만과 김규식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심산은 상해시절부터 이승만을 못마땅히 여겼다. 
이승만이 『조선을 일제 식민지에서 떼어내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는 
것이 낫겠다』는 취지의 위임통치론을 폈을 때 심산은 신채호와 더불어 
맹렬히 성토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승만이 위임통치론적 발상의 
연장선 위에서 미국에 「사대의부」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던 것이다. 

그처럼 민족의 자주에 대해 매우 민감했던 심산이 신탁통치 조항을 포함시킨 
「코리아에 관한 모스크바 의정서」에 반대하고,그리하여 반탁의 노선을 
밟았다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모스크바 의정서는 어느 무엇보다 남과 북을 통틀어 조선인의 통일임시
정부를 세우는 데 역점을 두었으니 찬성해 달라』고 끈질기게 간청하는 
좌익지도자들에게 『신탁통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
이라고 호령하며 내쫓곤 했다. 

같은 논리에서 그는 모스크바 의정서에 입각한 미­소 공동위원회에 맹렬히 반대,
『미­소공동위원회를 어떻게 해서든지 성사시켜 그 기초 위에서 
통일임시정부를 세워 보자』던 좌익 인사들과 일부 우익 인사들을 모두 
매국매족의 반역자로 몰아세웠다. 

이러한 처신은 심산을 정치적으로 외롭게 만들었다. 좌우익 모두로부터 경외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오로지 김구와 기맥을 통하고 지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치도 굽히지 않았으며 정계에서 초연한 채 유림의 재조직에 힘써 
성균관 재건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이끌었다. 

이 업적으로 그는 46년9월 성균관대학 초대학장으로,그리고 
53년 성균관대학이 종합대로 승격됐을때 초대총장으로 추대된다. 

48년에 들어서면서 남과 북에 각각 별개의 국가가 세워지게 될 전망이 
뚜렷해졌고,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그것을 막기위한 남북협상론이 제기됐다
심산은 그들과 발걸음을 함께 하면서 이른바 7거두성명을 발표하고 남한에서의 
단독선거에 반대함과 아울러 북한에서도 단독정부 수립추진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뒤 심산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화 경향에 자주 경고문을 
발표했다.51년에는 하야를 촉구하는 경고문을 발표했고 52년 부산 
정치파동때도 
국제구락부에서 초대 부통령 이시영 전국무총리 장면 전내무장관 조병옥등 
60여명의 지도자들과 이승만을 규탄하는 성명서 발표를 주도했다. 
이러한 반독재 투쟁으로 그는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됐다. 

                   
1960년 4·19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7·29총선을 거쳐 제2공화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민의원 참의원 양원합동회의는 대통령을 선출했다.
총 2백59표 가운데 2백8표를 얻은 윤보선이 당선됐는데 
정당 배경이 전혀 없고 벽옹이 된 만 81세의 노인 심산이 29표를 얻어 
차점을 기록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곧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대표로 통일운동에 나섰으나 
61년 5·16을 계기로 좌절을 맛보다가 62년 5월10일 서울 중앙
의료원에서 별세했다.향년 만 83세였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1990년에 성균관대 교정에 그의 동상이 섰다. 

◎약력 
△1879년 7월 10일 경북 성주군 사월리 출생 
△1905∼10년 을사조약에 항의 상소, 일진회의 한일합방론 
성토,대한협회 성주지부 창설,성명학교 창설 
△1910∼18년 망국에 대한 통분으로 한때 방황,어머니의 
훈계로 학문 정진 
△1919∼27년 파리장서사건 주도,임정 의정원 의원, 
제1차 유림단사건 주도,나석주의사 배후 지원 
△1927∼45년 본국으로 압송돼 고문을 받아 앉은뱅이가 
됨,14년형 받아 대구 대전 감옥 투옥 
△1945년 8월15일∼연말 8·15직전 재투옥,석방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환국환영회 부회장,국민대회준비회 고문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에서「저명한 민중지도자 8인」 
가운데 1인으로 지명됨,최고정무위원으로 선출됨, 민주의원 
취임을 거부,반탁운동에 참여 
△1946∼48년 성균관 재건과 성균관대 설립을 주도해 
성균관대 초대 학장이 됨,김구 김규식 등과 7거두성명 발표하고 
남북협상 지지 
△1951∼52년 이승만 하야운동 참여 
△1953∼56년 성균관대 초대 총장 
△1960∼61년 혁신계의 민자통을 중심으로 통일운동 참여 
△1962년 5월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별세,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짐 

◎어록 

△『나라가 임금보다 중하다.그러므로 임금의 명령이라도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혼미한 상태에서 내린 명령이라면 따르지 않는 것이 도리이다』
(1908년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을 성토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지 10년에 가정도 생명도 불고하였노라
뇌락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고문을 야단스럽게 할 필요가 무엇이뇨』
(1927년6월 고문하는 일본 경찰에게) 

△『지금 조선공산당이 소련의 지구적인 주둔을 원한다면 이것은 이리를 방안에 
끌어들이는 격이다.저 미군들도 반드시 이것을 빙자하여 철수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미소간의 틈이 반드시 이로 인해 벌어질 것을 걱정한다』
(1946년 1월 조선공산당 간부들에게) 

△『차라리 독립을 위해 죽은 귀신될지언정 신탁통치 노예는 절대로 되지 않으리.
인생이란 언젠가 죽게 마련인데 죽으면 죽었지 욕되게는 살지 않으리  』
(1946년초 지은 시 「신탁통치」)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1957년에 지은 시 「통일은 어느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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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rom now on, your life will be 
                                a series of small triumph, small failure
                                as it is life of all of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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