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doryoung (有心造) 날 짜 (Date): 2001년 1월 2일 화요일 오후 07시 57분 21초 제 목(Title): 퍼]박현 한국학 연구소장의 비판에 대한 답 홈페이지 도배 사건 때문에 한국학 연구소 소장이신 박현씨의 '누가 진짜 노자를 웃겼나'라는 글에 대한 답글을 못 올린 채 해를 넘기고 말았다. 우선 도올한테는 당(堂)을 붙여서 '도올당'이라 하면서 왜 구름한테는 '구름당'이라 안 하는거지? 다음에 박씨와 대면할 기회가 있으면 그것부터 따져 묻기로 하고 박씨의 글을 한번 살펴보자. ------------------------------------------------------------------------------- --------------------------------------------- 아무튼 도올당과 이씨의 번역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첫 문장부터 다르기 시작해서 끝 문장까지 9할 정도는 다르니 말이다. 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결론부터 말하겠다.“이씨의 한문문법은 이씨가 역사상 처음으로 만든 ‘특수하고도 유연한’문법이다. 이에 견주어 도올당의 한문문법은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이다.” ------------------------------------------------------------------------------- --------------------------------------------- 이게 박씨의 결론이다. 도올과 구름의 번역은 9할이 다르다고 하는 박씨는 이와 같은 결론을 뒷받침할 예문으로 불과 3개의 문장을 드는데 그쳤다. 그리고 '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과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의 근거를 댄 것이 없다. 더구나 박씨가 이게 옳다고 말하는 '번역'은 도올의 번역과 같지도 않고 구름의 번역과 같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박씨의 번역은 '툭수하고도 유연한 문법'에 의한 것도 아니고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으로 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긴데 그렇다면 박씨의 번역은 어떤 문법에 의한 번역인지 심히 궁금하다. 박씨가 예로 든 몇 안 되는 구절을 서로 비교해보자. 1. 道可道非常道 도올의 번역(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번역) ☞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구름의 번역(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 ☞ 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으나 언제나(꼭) 도여야 할 필요는 없다. 박씨의 번역(어떤 문법인지 알 수 없음) ☞ 허나 도올당의 번역에도 문제는 있다. 그는 可를‘말하다’로 옮겼는데, 이런 경우 可는 ‘여기다’는 뜻의 ‘以爲’가 축약된 것으로서 ‘여기다’ 또는 '판단하다’로 옮기는 것이 마땅한 바, 그런 것이 불분명하다. 아무튼‘도는 항상성에 달려 있지 않다’(道不于常)는 개념은 춘추전국시대의 유행어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면 문법을 창조하지 말고 스스로의 의식을 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이렇단 말이야. 도올의 번역을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번역'이라고 해놓고는 뒤에 가서 예로 든 문장을 가지고는 말하기를 '도올당의 번역에도 문제는 있다'고 해. 그럼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번역'이 왜 문제가 있을까? 그건 좋다 치고 구름의 번역은 '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에 의한 것'이어서 틀렸고 도올의 번역은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다면 박씨는 '어떤 문법'에 의해 번역을 하며 그 번역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해야 하는데 박씨는 자기의 번역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 버리고 두 사람의 번역에 '다 문제가 있다'고 해버리니까 보는 사람들만 다시 한번 헷갈리게 만들고 말았어. 씨의 말대로 '가(可)'를 '이위(以爲)’가 축약된 것으로서‘여기다’또는 '판단하다’로 놓고 번역을 해보자고. 그럼 어떻게 될까? '도를 도라고 여길 수도(판단할 수도) 있지만 도는 도가 아니다.' 이렇게 되는가?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보기에 이거야말로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 같은데. ' 남의 답이 틀렸다고 말할 양이면 정답을 보여 줘야지. 안 그래? 틀렸다고 만 하고서 '정답은 각자가 생각해 봐' 하는 식의 학문은 아무라도 한다. 그렇게 할 바에는 세상에 대학교수라도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또 보자고. 구름의 번역을 '특수하고도 유연한 번역'이라고 말하는 박씨의 이유가 이렇게 되어 있거든. ------------------------------------------------------------------------------- ------------------------------------------- 물론 이씨의 이런 번역은 틀렸다. 먼저 앞 서술부의 술어인 可와 뒤 서술부의 부정사인 非는 어떤 한문에서도 결코 짝을 이루지 않는다. 可와 짝을 이루는 부정사는 非가 아니라 不(弗)이다. 다음으로, ‘반드시’라는 뜻의 必자가 생략되었다고 하더라도, 부정사는 역시 非가 아니라 不이어야 한다. 따라서 可道와 非常道는 결코 병렬된 두 개의 서술어가 될 수 없다. ------------------------------------------------------------------------------- ------------------------------------------- 박씨도 고전의 원문을 그렇게 찬찬하고 깊이 있게 안 보는 것과 한문 공부가 덜 된 것은 도올하고 비슷해 보인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의 문장에서 '道可'와 '非常道'가 결코 병렬된 두 개의 서술어가 될 수 없다면 도올의 번역(지금까지 이 구절에 대한 대부분의 번역)인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야 말로 엉터리란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도올의 번역은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번역'이라고 하니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 도올의 번역에서 가(可)는 '~이라고 하면'으로 옮겨졌고, '비(非)'는 '아니다'로 옮겨졌으므로 이것이야말로 가(可)에 대응하는 부정사로 비(非)을 사용한 잘못 된 번역이다. 맞지? 그러나 이 문장에서 '비(非)'가 부정하는 것은 앞 문장의 '가(可)'가 아니라 바로 뒤따라오는 '상(常)'이다. 즉 '가(可)에 대한 비(非)'가 아니라 '상(常)에 대한 비(非)'다. '상(常)'이란 글자는 '언제나(늘) 그러함'을 말한다. 이 상(常)을 부정하는 글자는 '비(非)'이지 '불(不)'이 아니다. 비상구(非常口) 또는 비상연락망(非常聯絡網)이란 말은 있어도 불상구(不常口)나 불상연락망(不常聯絡網)이란 말은 없다. '상(常)을 부정하는 비(非)'를 '가(可)를 부정하는 비(非)'로 볼 정도라면 아직도 도덕경을 가지고 훈수를 하고 나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박씨의 주장에 따른다면 도올의 번역이야 말로 특수하고 유연성이 넘치는 황당한` 번역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즉 구름의 번역은 문법상 전혀 하자가 없다. 박씨가 하는 말 '도는 항상성에 달려있지 않다'는 말은 번역의 정오가 아니라 '항상성이 없는 것'이 '도냐' 아니면 '도라는 이름이냐'하는 해석상의 차이에서 전통적인 번역과 구름의 차이를 찾을 일이다. 또 다른 박씨의 지적을 살펴 보자 ------------------------------------------------------------------------------- ----------------------------------------- 하나 더 들어보자. 이씨는 두 번 째 장에서 ‘天下皆知美之爲美’를 ‘세상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꾸며진 아름다움이면’이라고 옮겼다. 도올당은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고 옮겼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이 또한 원칙적으로 도올당의 번역이 옳다. 그렇다면 이씨 번역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씨는 허사인 之자의 다양한 용법을 무시했다. 이 경우, 之자는 독립적 문장을 예속된 절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안다’는 문장과 ‘그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독립적인 문장을 묶어서 “나는 ‘그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로 만들 경우, ‘그가 … 것’의 내용은 목적어절이 되는데, 그렇게 만드는 허사가 바로 之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살펴보자. 天下는 주어가 되며, 皆知는 서술어가 되고, 美之爲美는 목적어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씨는 목적어절이 제 생각대로 풀어지지 않는다 하여 마음대로 끊었는데, 그런 문장은 춘추시대이래 어디에도 없었다. ------------------------------------------------------------------------------- ---------------------------------------- 박씨는 한문의 문법은 아는 듯 한데 적용을 틀리게 하고 있다. 앞서의 예에서 보았듯이 박씨가 설명하는 문법에 따를수록 오히려 올바른 것으로 증명되는 것은 바로 구름의 번역이다. '지(之)'가 독립적인 문장을 목적어절이 되게 만들 때 그 목적어절은 '지(之)' 이하의 문장이다. 즉 이 문장에서 목적어절은 '미지위미(美之爲美)'가 아니라 '지위미(之爲美)'다. '지(之)'가 만드는 목적어절은 '지(之)'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한문의 기초다. 도대체 어떤 문헌에서 '지(之)'의 앞뒤에 있는 글자들이 모두 목적어절이 되더란 말인가? 다시 한번 풀어 보자. 주어는 '천하'다. 서술어는 '개지미(皆知美)'다. 모두 아름답다고 안다. 무엇을? '꾸며진 아름다움'을, 즉 '지위미(之爲美)가 목적어절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보자. ------------------------------------------------------------------------------- ------------------------------------------ 이씨는 爲자에 대해서도 너무 일면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도올당이 이 글자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爲라는 글자는 분명히 ‘함’이다. 다만 그것은 ‘行’이라는 글자와 달리 ‘목적의식적인 함’을 가리킨다. 이 글자가 ‘위하여’의 뜻으로 쓰이는 것도 그 때문이며, 때로 以와 엮여서 ‘여기다’나 ‘판단하다’로 쓰이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爲가 거짓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 것은 꽤 뒷날의 일로, 위 문장을 옮기면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으로’쯤 될 것이다. 요컨대 이 문장에서 爲자는 ‘여기다’의 뜻으로 쓰였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여김’이니 조금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와 비슷한 맥락의 문장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유행이었다. 예를 들어 ‘어울림을 어울림으로 아는 것’(知和以和) 등이 있는데, 이런 논리는 전국시대 변설가들의 애용구로도 되었던 바, ‘국책’(國策)이란 문헌만 살펴보아도 그런 용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 -------------------------------------------- 이상하다. 박씨의 말은 전부 다 구름의 번역과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으니 말이다. 위(爲)가 목적의식인 함'이라 하는데 이 말이 무엇인가? 바로 '꾸밈'이다. 목적이 무엇인가? 어떤 저의를 말한다. 못난 것을 잘나게 보이고자 하는 목적,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꾸미려는 목적,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 목적, 이와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둔 행위가 '위(爲)'다. 즉 노자가 말하는 무위인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가 아닌 것'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위(爲)'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경>의 '위(爲)'는 '함'으로 번역하면 안 되는 것이고 '꾸밈'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 박씨의 모든 주장은 구름의 번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내용인데 결론을 이상하게 내려놔서 읽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함'이라 번역하면 <도덕경>의 모든 내용이 번역이 불가한 이상한 글이 되어 버림을 우리는 알았다. '위(爲)'는 결코 수식없는 '함'이 아니라 '꾸밀려는 함'이다. 본의는 '함'이 아니라 '꾸밈'이다. '위(爲)'를 도올처럼 '함'으로 번역하는 것은 '조작한다'라는 말에서 '조작'을 빼고 '한다'만 남긴 것과 마찬가지다. '한다'는 빼도 관계없다. '조작'이라 해도 뜻은 통한다. '조작한다', '가식한다', '위장한다'에서 중요한 것은 '조작'과 '가식'과 '위장'이지 '한다'가 아니다. 모든 설명은 '구름의 번역이 맞고 도올은 틀렸다'인데 결론만 '구름의 번역이 틀리고 도올이 맞다'인 글이 박현씨의 글이다. 박씨의 글 전문을 보실 분은 이 게시판의 27번 글을 보시기 바란다. 구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