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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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Tao ( 烏有先生)
날 짜 (Date): 2000년 11월 30일 목요일 오후 04시 49분 04초
제 목(Title): 노자를 웃긴 남자(78)


 [주    제] 노자를 웃긴 남자(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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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에 이 글 시작할 때는 <춘추좌씨전>까지 디비서 인용문을 올리고 할 필요는 없

겠지 생각했다. 이상한 나라의 벗님들과 함께 도올의 개그쑈 감상하는 데 그런 노

가다씩 해야 될 일이 뭐 있겠노 하는 만만한 생각으로 별 생각없이 쓰기 시작했고,

쓰는 것 자체도 그저 손구락 가는 대로 두다다 두들겨서 히떡 올리고 그래왔다 말

이지. 근데 가마 보이 도올이 문제가 아이네. 이상한 나라의 국경을 벗어나서 다른

나라까지 이기 막 돌아댕긴께네 이국의 고수들이 나타나서 딴지를 거는디, 그 수준

이 그리 만만치가 않은기라. 까짓거 나는 도올이나 여 나타났으면 재밌겠다 생각했

는데 도올은 사실 걱정도 안했거든. 감히 앵기지도 못할거라고 접어 놨제.

  근데 개그쑈를 보면서 고전 원문들 하고 옥편까지 디비야 되는 불행한 사태가 빚

어지고야 말았다. 동생네 가서 옥편까지 하나 빌려왔는데 동생네라 해서 제대로 된

옥편이 있을리 만무하고 게우 찾아낸 기 '민성사'라는 데서 찍어낸 <활용 옥편>이

라는 거다. 꼭 휴대용 영어 숙어 사전 같은거다. 이 정도면 되겄지 뭐. 하이간에

  구르미는 게을러서 노가다는 딱 질색인디. 그래도 우짜겠노? 이것도 다 자업자득

인게라. 다음이나 보자. 12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是以聖人爲腹不爲目
  시이성인위복불위복

  故去彼取此
  고거피취차


  앞 문장을 고대로 조선말로 옮기면 '그래서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

는다'가 된다. 이 문장에서의 '위(爲)'는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의미인 '위하다'

로 읽으면 된다. 성인은 배를 채우기 위한 일은 하지만 감각을 만족시키는 일에 몰

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눈(目)'은 '눈으로 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

니라 앞에서 말했던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인 모든 향락'을 대표하는 말로서 쓴

것이다. '눈(目)'이 '감각적 쾌락'을 상징하는 말이라면 '배(服)'는 생명을 유지하

기 위한 '소박한 의식주'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성인은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정도의 배만 채우지 그 이상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쾌락이나 향락을 쫓지 않는다는 말이다. 음식을 먹더라도 배를 채우

기 위해 먹는 것이지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 바로 성인이라는 것이

다. 그렇다면 성인의 노동은 필요한 최소한도의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을 얻을 수 있는 정도의 노동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는 이유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필요량보다 많은 노동의 결과를 얻어서 어디에

쓰는 것이냐? 눈을 즐겁게 하고, 귀를 즐겁게 하고, 혀를 즐겁게 하고, 취미 생활

을 하고, 재물을 모으는데 쓴다.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은 해야 할 필요량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하고 그것으로  쓸데없는 짓에 인생을 낭비한다고 할아방은 생각하는

것이다. 할아방처럼, 성인처럼, 신선처럼 살아가는데는 사실 밭때기 한마지기면 충

분하고 하루 두 시간 노동이면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양 20마리만 쳐도 한 사람 입

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을 보면  앞서 할아방이 말했던 '면면약존,용지

불근(綿綿若存,用之不勤)'이 떠오른다. '현묘한 도는  가느다란 실처럼 이어져 영

원히  지속되지만 그 쓰임은 결코 부지런하지 않다'고 했던 말. 그렇다. 노자 할아

방의 주장은 그거다. 바로 '적게 먹고 가늘게 싸고 오래 살자'는 것이다. 천지의

도라는 것도 면면약존하는 것이고 용지불근이니 성인도 이와 같이 산다는 말이다.

  또 여기서 상기해야 할 말이 바로 '생지축지(生之畜之)'다. 짐승들처럼 산다는

것. 그게 뭐냐? 짐승들은 자기 먹을 것 외에 취하는 것이 없다. 맹수들도 배가 부

르면 눈앞에 사슴 새끼가 얼쩡거려도 쳐다 보지 않는다. 무리를 이루어 사는 초식

동물들도 그걸 안다. 그래서 사자 가족한테 한마리가 헌납되고 나면 나머지 넘들은

안심하고 풀을 뜯어먹는다. 물론 사자가 다시 배가 고파질 때 까지지만. 취미로 사

냥하는 동물은 없다. 그리고 먹지 않을 풀을 재미로 뜯어놓는 짐승들도 없다. 이런

짐승들이야 말로 오로지 '배를 위할 뿐이지, 결코 눈을 위하지 않는 성인처럼 산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절이 있을 거다. 앞에서 나왔던 말 '허기심,약기지,실기복,

강기골'이다. '마음을 비우고 뜻을 약하게 갖고 오직 배부르고 뼈만 튼튼하면 된

다'고 했던 말도 다 같은 맥락이다.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가 '먹고 사는데 필요한

이상의 것을 취하여 가지려고 발악을 하는 때문'이라고 할아방은 보는 것이다. 그

리고 그 이유가 '바로 눈과 귀와 혀를 즐겁게 하는 쾌락의 추구'에 있다고 보는 것

이다.

  <도덕경>에서 할아방은 초지일관 거듭해서 오직 한가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한가지가 무엇인지 이 글을 읽어온 사람이면 도올만 빼고는 다 아셨을 것이

다. 나는 할아방이 지금 이 시대의 사람 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지

무척 궁금하다. 압구정동의 번쩍거리는 로데오 거리와 포르노가 범람하는 인터넷

사이트와 정신이 혼란한 컴퓨터 게임과 번쩍거리는 유흥가의 불빛과 강 하나를 끼

고 천만 명이 모여 사는 대도시를 보면 아마도 할아방은 절망에 빠져 자살하지나

않을까 싶다. 21세기는 우리의 할아방이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21세기의

우리가 할아방의 권하는 바를 쫓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현실이다.

  노자와 21세기라. 21세기는 노자가 절망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노자를 쳐

다보아야 하고 쳐다볼 수밖에 시대이다.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노자의 유토피아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원래 유토피아는 갈 수 없는 나라

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법이니까.

  마지막 구절인 '고거피취차(故去彼取此)'는 '그러므로 성인은  이것을 버리고 저

것을 취한다'라고 번역되는 문장이다. 그렇다면 버리는 '저것(彼)'은 무엇이고 취

하는 '이것(此)'은 무엇일까? '저것'은 향락과 쾌락과 탐욕을 쫓는  삶이고, '이

것'은 도(道)를  쫓는 삶이다. 즉, 성인의 길이요, 신선의 길이다. 오직 살기 위해

필요한 것(腹) 이상을 탐하지 않고 구하지 않는 생활이다. 이 마지막 두 구절에 대

한 도올의 명 해설은 강아지 합창곡이다. 이어서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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