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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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parsec ( 먼 소 류 )
날 짜 (Date): 2000년 11월 28일 화요일 오후 11시 57분 43초
제 목(Title): Re: [먼소류님께 답글(수레와 바퀴)]

먼저 전령 역할로 수고해 주시는 Tao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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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님이 바퀴학에 정통하시다는 건 이미 써 놓으신 글만으로도
짐작이 갑니다. 거기에 대해선 이의를 달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에 의해 생각이 제한당하기도 하지만 알고 있는 것 
때문에 오도되기도 합니다. 탁약이란 두 글자를 보고서 도올은 당장 얼마전에 그가 
읽은 로버트 템플의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 소개된 복동식 풀무의 
우수성과 그것이 가져온 철강기술 혁명에 생각이 미쳐 "이것은 복동식 풀무에 대한 
노자의 기술이다"라고 단정짓고서 신나게 썰을 푼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탁약이 
과연 풀무인지 "절구(? 또는 풀무?)"와 피리인지 다시 생각해볼 여지도 남겨놓지 
않고서 그렇게 신나게 썰을 푼 것은 `다른 사람은 잘 모르는 것을 나는 
알지롱'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런 것이야 인지상정으로 
봐줄 수 있다고 쳐도 노자도 과연 복동식 풀무가 가져온 혁명에 도올 자신만큼 
관심을 가졌을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야말로 학자로서의 자격을 의심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여튼, 구름님의 바퀴학 개론을 읽고 바퀴에 관심이 좀 생겨서 과연 통짜바퀴에서 
스포크 달린 바퀴로 변화한 것은 언제쯤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만약 구름님 
말씀대로 노자가 얘기한 것이 스포크형 바퀴가 가져온 기술혁신이라면 스포크 달린 
바퀴의 출현은 노자시대보다 많이 앞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혁명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시대라면 통짜바퀴와 스포크형 바퀴의 어떤 차이점이 바퀴의 시대를 
열었는지 비교 분석해 볼만한 일이라고 노자가 생각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주말이 끼었으면 서점에서 여유롭게 이런저런 자료를 뒤져봤겠지만 아직 그럴 
시간은 없고, 퇴근해서 집에 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서 바퀴의 역사에 대한 책이 
없나 잠시 뒤져봤습니다. 작은 동네 서점이라서인지 바퀴학 개론이라든가 바퀴의 
역사같은 책은 없고 자동차의 역사에 대한 얇은 책이 있길래 잠깐 훑어 봤는데 
반갑게도 바퀴의 발전사에 대한 지극히 간략한 설명이 실려 있더군요 기원전 
4000년경 수메르인이 통짜바퀴를 만들었고 기원전 3500년경에는 역시 수메르인이 
스포크가 있는 가벼운 바퀴를 만들었다고 사진과 함께 씌여있더군요. 물론 그 
시기가 최초의 발명시기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 바퀴들이 중국에 전래된 게 언제인지까지는 설명이 없으므로 알 수가 
없습니다만 노자가 살던 시대를 기원전 500년 경이라고 하는 설을 받아들이면 
스포크 달린 바퀴의 발명은 노자보다 최소한 3000년 정도 앞선 셈이고 통짜바퀴에 
대한 스포크형 바퀴의 우월성을 생각해 보면 노자가 알고 있는 바퀴는, 그가 
수메르 유적을 발굴해보거나 하지 않은 이상 스포크형 바퀴가 유일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바퀴는 이미 일상 생활 속의 물건이었고 
그것이 가져온 혁명의 결과를
벌써 오랫동안 향유하던 시대인데 노자가 스포크 바퀴가 통짜바퀴에 대비되는 
우월성을 언급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먼 옛날부터의 바퀴의 발달사를 한 눈에 보듯이 꿰차고 있는 구름님이나 그런 
역사를 배우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차이가 두드러져 보이겠지만 도덕경의 
해석상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노자도 과연 그 점에 주목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을 언급하듯이 단 몇마디로 슬쩍 언급하는 
구절에서 과연 일상생활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물건에 대해 먼먼 옛날에 
일어났던 기술적 혁명의 심오한 의미를 생각해가며 그런 말을 던졌을까 하는 
점이죠.

여러 번 얘기하지만 구름님의 바퀴이야기에 대한 불만은 그 점 뿐입니다. 스포크 
달린 바퀴가 가져온 변화를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고 구름님이 바퀴나 차의 역사에 
대해 모른다고 하는 얘기도 아닙니다. 자동차에 대해 연재를 하실 생각이라면 
재밌게 읽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다만, 노자의 이 부분에 대한 해석에 억지로 
연결시키는 것이 보기에 안좋을 뿐입니다. 

바퀴에 대한 또다른 혁명(타이어, 베어링 등)이 일어난지 백년도 안되는 오늘날과 
노자 시대는 바퀴에 대한 관심의 정도나 촛점이 달랐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바퀴에 대한 당시의 기술적 이슈중 하나는 바퀴통 중심의 축을 끼우는 
구멍을 깎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장자(외편, 천도 13장)에 인용된 바퀴장이 얘기는 
그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대론 된 선반도 게이지도 없던 시대에 장인의 
손맛에 의지하던 바퀴의 핵심 부품 제조공정 얘기도 그렇지만, 이건 여기서 중요한 
얘긴 아니고, 굳이 장자나 하상공을 들여대지 않더라도 일단 노자의 본문도 
三十輻共一곡爲車(혹은 爲輪)이라고 하지 않고 균일한 문장구조를 깨뜨려 가며 
여기서 爲車를 빼고 共一곡 다음에 바로 當其無로 들어간 것은 여기서의 其無가 
곡(의 중심)에 있는 빈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해주고 있습니다. 
노자가 말한 것이 '바퀴의 무'이며 이 바퀴의 무는 바퀴둘레와 바퀴통 사이의 무일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하셨는데, 이런 해석상의 가능성을 전면 부정하는 건 무리라고 
봅니다.


 
parse: /'pa:rs/ vt., vi. parsed, 'par·sing
[ < L pars (orationis), part (of speech) ] to break (a sentence)
down, giving the form and function of each part
parsec: not yet par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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