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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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247.tnt3.re> 
날 짜 (Date): 2000년 11월 12일 일요일 오전 07시 45분 53초
제 목(Title): 장현근/ 인간, 콩 치우 


제가 예전에 역사보드에 퍼왔던 글입니다.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22일 목요일 오후 04시 51분 01초
제 목(Title): 장현근/ 인간, 콩 치우 


공자는 과연 살아날 수 있는가?
 
 

장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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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생. 85년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91년 중국문화대학 정치학 박사.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현). <순자정치사상에서의 '예'의 기능> 
<선진정치사상에서 '법'의 의미> <공자정치사상의 문화적 의의> <군자와 시민> 외 
논저 다수. 편저 : "중국정치사상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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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공자
  친(晉)의 사자 한 치(韓起)는 멀리 타이산(泰山)의 위용을 감상하며 
르우(魯)나라 접경을 넘어서고 있었다. 군사력이 강한 대국의 위용을 과시하려 
화려한 의상과 군장을 대동한 그는 기이한 정경에 행렬을 멈추었다. 봄꽃이 막 
사그라든 자리에 연초록 이파리가 녹빛을 더해가는 단아한 나무아래 예닐곱명 
아이들이 젯상을 차려놓고 엄숙한 모습으로 제문을 읽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를 자세히 보니 천, 지, 춘, 하, 추, 동의 방위가 적혀 있고 나아감과 
물러남에 절도가 있었다. 한 치는 혼자말로 뇌까렸다: "아직도 이 나라엔 
주례(周禮)가 살아있단 말인가?" 또 저만치에서는 꾀죄죄한 차림의 몇몇 아이들이 
넓은 소매속에 두 손을 싸넣은 -- 이 나라는 옛날부터 읍(揖)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 노인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이했다. 
친(晉)나라 같으면 칼을 들고 군사놀이를 하거나 위아래를 구분않고 치고받기 
일쑤인 아이들인데. 지난 번에 상업이 발달한 치(齊)나라에 들렀을 때도 그곳 
아이들은 웅성웅성 모여앉아 돌로 돈셈을 하거나 엄격한 벌칙을 정해 힘없는 
녀석들을 혼내주는 놀이나 일삼고 있었지 않는가. 
그 해 12살난 소년 콩 치우(孔丘: 공자의 본명, 기원전 551년에 남)는 남달리 
총명했다. 늘 양반가문의 옛 명예를 그리며 우울해 하시는 늙은 아버지와 길목에서 
강제된 한 번의 관계로 자신을 낳고 힘없이 살아가시는 소실 어머니가 안스럽기도 
하였으나, 그는 밖이 더 좋았다.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총기있던 그는 친구들 
사이에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형과 같이 나가더라도 항상 제사놀이의 집사였고, 
동네 어른들로부터 르우나라 역사인 춘치우(春秋)를 가장 열심히 듣고 외웠다. 
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고, 혹시 손에 들어오면 대나무를 엮은 책(冊)의 
가죽끈을 서너번 갈아끼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생계를 위해 창고지기를 하며 드나드는 물건을 셈하면서도, 귀족의 마굿간을 
관리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직장일도 성실히 했지만 머리가 커가면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남들처럼 결혼하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으나({論語}[公冶長][先進][季氏]), 마누라와 가족보다 사회와 
정치상황을 더 궁금해 했다. 왜 르우나라의 세 집안(季孫, 叔孫, 孟孫)은 야합하여 
자신의 윗사람인 군주를 제멋대로 갈아치우는 것인가? 왜 세상은 돈과 힘에 따라 
먹고먹히는 황폐한 지경에 이르렀는가? 어쩌다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사건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하극상이 빈발하는 것일까? 그는 친구들과 밤새워 술을 
들이키며 세상의 일과 정치사회의 개혁을 토론하였다. 그는 항상 논의를 
주도하였으며 폭넓은 지식을 전달하는 스승이었다. 

제자가 생기고 나이와 경륜이 익어가면서 종니(仲尼: 공자의 자)는 흔들리지 않는 
삶의 원칙을 마련하였다. 세상문제의 본질을 도덕성 부재에서 찾았으며, 문제의 
해결책을 도덕성 회복으로 삼았다. 도덕성의 표준은 저우(周)나라 초기 이상정치를 
펼쳤다는 원왕(文王)과 우왕(武王) 두 임금대의 문물과 제도, 그 해석은 그 
이상정치의 모든 기틀을 마련하고 실천한 우왕의 동생 저우꽁(周公)의 삶의 
방식으로 결정하였다. 종니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진다고 생각하여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사고부터 바꾸고저 하였다. 그리하여 온 사회의 가치가 
도덕을 지향하는 어진(仁) 세상을 만드는데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구체적 실천방향으로 그는 청년의 힘, 지식의 힘을 동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를 바탕으로 정치일선에 나서서 학문과 정치를 결합시키고 
싶었다. 자신이 안 된다면 그가 믿고 아끼는 제자들이라도 정계에 진출시켜 뜻을 
펴보고저 했다. 

그러나, 고집스럽고 자기 생각을 굽힐 줄 모르며 부도덕한 자와 아첨꾼을 
거리낌없이 힐난하는 성격으로 정치적 출세를 하기란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회재불우(懷才不遇)라, 온 몸 가득 재주를 품고 있으나 이를 풀어낼 자리를 얻지 
못했던 공자(중국인 孔子는 콩쯔로 읽어야 하겠지만 孟子, 荀子와 같이 그가 
중국인으로 우리와 친숙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우리에 익숙하므로 그냥 
공자.맹자.순자로 읽기로 한다)는 답답하고 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울분에 차서 세상을 살지는 않았다. 천성적으로 선생노릇을 즐겼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키워갔다. 제자를 출세시키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개혁가의 다소 비현실적인 이상주의나, 사명의식을 가진 사람의 약간 
독선적인 태도는 세상에 노련한 사람들에게는 불쾌감을 주지만, 젊은이들의 감탄을 
사게 마련이다."(크릴, 48) 몰려드는 수 많은 제자들을 그는 열심히 가르쳐서 
70여명에 이르는 탁월한 인재를 길러내었다. 게중엔 배반자 쯔까오(子羔)를 
포함해, 외교술에 능통한 쯔꽁(子貢), 충성스런 고집장이 쯔루(子路), 정치가적 
현실성이 몸에 밴 르우안 치우(?求) 등 스승의 생전에 스승보다 높은 관직을 가진 
자도 있었다. 

공자에게 오늘날의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권력요직인 사구(司寇)를 제수할만큼 당시 
르우나라 정치인들이 도덕적이거나 양심적이지는 못한 것이 확실하다. 탁월한 
학자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이 인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을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집권당의 고문과 같은 실권없는 명예직을 수여했을 가능성은 
있다. 물론 정치적 욕구와 사명감에 불타던 인간 공자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고 
길을 떠나 고달픈 유세길에 오른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환갑을 몇 해 안남기고 
있었다. 훌륭한 노학자의 강연을 들으려 일정한 대접을 한 귀족제후들도 있었고, 
그와 정견이 상반되는 사람이 집권하고 있는 나라에선 그의 유세 자체가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붉은 물이 들게 한다고 여겨 죽이려 들기도 하였다. 
츠언(陳)나라로 가는 길목에서 자신의 제자 쓰마 니우(司馬牛)의 형인 
후안퉤이(桓?)라는 쏭(宋)나라 대부에게 포위당할 때가 가장 비참한 인간적 고뇌를 
느꼈던 것 같다.({論語}[述而]; {孟子}[萬章上]) 

공자의 기나긴 유세일정은 소득없이 끝을 보았다. 고향 제자들이 엉망으로 변하여 
돌아가야겠다는 이유로 귀국한({論語}[公冶長]) 그는 비로소 현실정치 
참여욕구로부터 비교적 자유스러워진 듯하다. 그러나 천하를 주유한 공자의 행위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실패했지만, 그 후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 
국경을 넘나드는 수 많은 후배사상가의 전범(典範)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유세가 
갖는 역사적 무게는 실로 장하다 하겠다. 국경없는 자유로움이야말로 꿈을 가진 
건축가들에게 무한히 열린 가능성의 공간이다. 이렇게 중원(中原)을 넘나들며 말이 
될 수 있는 모든 말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우리는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부른다. 
기실 그들이 유세한 중원지역이란 오늘날 한반도 정도의 영토에 불과한 
것이었음에도 그들의 사상이 그려놓은 인류문화에의 궤적은 실로 장관이다. 그 
문을 연 위대한 공자, 그리고 삶과 시대와 더불어 고민하고 발버둥했던 인간 
공자가 여느 시대의 훌륭한 보통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저술과 교육에 몰두하다 
조용히 여생을 마친 것은 기원전 479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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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자의 꿈과 논어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10대의 꿈을 20대까지 유지하기 힘들고, 
20대의 꿈을 30에 유지하기 힘들다. 장년이 되면 꿈을 꾸기보다 고독한 마음으로 
옛 꿈을 반추하기 십상이며, 자신의 꿈을 자식에 기대하기도 한다. 너무도 
인간적이고 너무도 보통사람이었던 공자가 남달리 당시 젊은이들의 마음을 끌고, 
중국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고, 중국인과 동양인의 사랑을 받고, 마침내 인류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흔들리지 않은 꿈의 유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 
많은 유혹에도 자신의 꿈을 고집하였고, 지난한 삶의 역정에도 도덕사회라는 
최초의 꿈을 버리지 않음으로서 그는 항상 이상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기에 
현실에서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상이야말로 
현실을 비판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인 것을. 
꿈이 있었고 그걸 지킬 줄 알았기에 과한 행위도 인간다워 보인다. 희대의 음녀 
난쯔(南子)를 만난 것({論語}[雍也])도 꿈의 고집스런 실천을 위한 것으로 
간주된다. 무능한 아들 리(鯉)에 대해선 거두지도 이른 죽음에 슬퍼하지도 않던 
그가, 같은 잘못을 두 번 범하지 않고 보리밥에 맹물먹고 살면서도 도락을 즐긴 
애제자 옌 후에이(顔回)의 죽음을 두고 지나치게 슬퍼한 것({論語}[先進])도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진다. 나라일 때문에 늦게 도착한 제자 르우안 치우에게 
자기에게 먼저 상의하지 않았다고 투정하듯 꾸지람하는 모습({論語}[子路])도 
답답한 심경의 토로로 이해된다. 

하지만 공자의 꿈이 꿈일 뿐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확실히 현실적으로 보면 
춘추시대 말기 인물 공자의 일생은 {좌전(左傳)}과 {사기(史記)}의 기록처럼 
위대한 역정도 아니었고, 정치적 성공자도 아니었다. 그냥 왔다가 맑은 눈으로 
끝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고 살다 자기 방식대로 기도를 올리고 스러져 갔을 
뿐이다.({論語}[述而]) 그러나 그의 죽음앞에 엎드린 제자들을 보라! 생업도 
가정도 팽개치고, 고관대작도 스스럼없이 버리고 무덤앞에 꿇어 3년을 보내었다. 
공자의 꿈은 너울거리며 이들 머리 위를 날고 이들의 제자 위를 날고, 제자의 
제자의 머리 위를 날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중국인의 마음속에 살아나고 
실천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지식인으로 성공하였고, 교육자로서 성공하였고, 
이상의 최후적 승리자가 되었다. 


이러한 공자의 꿈과 이상이 가장 잘 녹아 있는 글이 {논어(論語)}다. 중국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이루기 전인 선진(先秦)시대 어떤 문헌에도 {논어}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결정적 맹점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의 학자들은 공자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자료가 {논어}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21세기를 몇 년 안남긴 
오늘날 한국인들이 공자를 이해하려 할 때도 역시 {논어}는 가장 좋은 표준이다. 
소위 오경(五經)을 포함하여 한(漢)대 이후에 성립한 어떤 의미의 문헌도 오늘날 
우리가 인간으로서 공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성립시기가 훨씬 
뒤인 {공자가어(孔子家語)}와 같은 책은 유교성립사 연구에는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때 그 사람 공자와 친해지는데는 아무런 효력도 발휘할 수 
없다. 

스무 살부터 아흔 살까지 70년간 한 번도 똑같은 강의를 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머릿속은 중화오천년문화사가 사전처럼 빼곡히 차 있다고 자부하던 치엔 
무(錢穆)는 생애 가장 감명깊었던 책은 역시 {논어}라고 술회하였다. 몇 년 전 
타계한 이 노학자는 나이가 들어 매 10년마다 이 책을 정독하였는데, 그 때마다 
삶과 세상의 의미를 달리 깨우치게 해주더라고 말하였다. 제자들과의 대화, 또는 
제자들이 기억하는 공자의 말씀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이야말로 꿈을 가지고 삶과 
시대를 고민하는 사람의 전형을 보여준다. 우리가 공자에게 인간적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선배학인들이 그토록 {논어}를 사랑한 이유도 
마찬가지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참 인간다움의 길을 고민하는 사람은 {논어}를 통해 매우 성실한 한 사람이 
거기 서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사회가 문제 있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논어}를 통해 왜와 어떻게에 대한 확실한 주장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꿈을 가지고 일생을 일관되게 살고 싶은 사람은 {논어}를 통해 이상을 
가꾸는 방법과 지조를 배우게 될 것이다.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생각하고 
지성인다웁게 행동하고 싶은 사람은 {논어}를 통해 빛나는 길(道)로 안내될 
것이다. 그래서 전통을 고민하고 현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언제고 {논어}를 
읽어야 한다. "쯔루야, 내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마.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論語}[爲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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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곡당한 공자
  사실 공자는 죽은 뒤에도 무덤에 편히 누워있질 못했다. 지금 산똥성(山東省) 
취후우(曲阜)에 있는 그의 묘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 한족(漢族)을 
경멸하던 서역 불한당 정권에 의해 파헤쳐지기도, 가장 최근의 것으론 1960년대 
공자비판(소위 批林批孔)운동 때 이마에 피도 안마른 젊은 것들에 의해 
파헤쳐기지도 했다. 이렇듯 유교에 대한 어느 시대의 어떤 비판이든 모두 공자로 
귀결되었는데, 이는 실존했던 공자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그 책임은 한제국때 
'부활당한' 성인 공자가 져야 하지 꿈과 희망을 먹고 살다 그렇게 죽은 그 때 그 
사람 공자가 질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21세기 새로운 한국을 꿈꾸면서 우리가 
되살려야 할 공자는 성인 공자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 공자의 꿈과 희망이다. 
한대의 유학(儒學)도 조선시대의 유교(儒敎)도 아닌 빗나간 세태를 비판하고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려 '학문과 정치 사이를 분주히 내왕하는 
유자(儒者)들'(沈成添, 115)의 그 시대양심을 되새겨야 한다. 
그 양심을 참되게 이해하고 그 정신의 끈을 이어 실천에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맹자(본명.孟軻)와 순자(본명.荀況)였다. 공자는 제자를 잘 두어 편히 눈감았고 
제자의 제자를 잘 두어 사상의 생명을 풍부히 할 수 있었다. 저우(周)나라 초기 
전성기와 같은 덕치(德治)사회를 구현하겠다는 공자의 이상을 한 마디로 종합하면 
인(仁)이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모든 덕목들의 맨위에 존재하고, 시대양심을 
가르는 원리원칙이다. 제자들의 인에 대한 질문이 있을 때마다 멋진 스승 공자는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으나, 역시 압축적인 표현은 
"극기복례(克己復禮)"({論語}[顔淵])다. 호방한 사내대장부({孟子}[?文公下])로 
제후들을 호령하고 인의(仁義)가 빠진 어떤 정책에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던({孟子}[梁惠王上) 孟子는 야당적일 수 밖에 없었고 그 바탕은 '극기'였다. 
꼼꼼한 학자로 제자백가의 학문적 성취를 집대성(장현근, 336)하면서 그래도 
왕도(王道)만이 진리임을 주장({荀子}[王制])한 荀子는 여당적일 수 밖에 없었고, 
그 바탕은 '복례'였다. 이 점에서 {맹자}와 {순자}도 공자를 이해하는 데 {사기}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닌다. 

이 둘이 밀고 당기며 중국정치사를 움직여가는 동력이 되었더라면 민의(民意), 
민본(民本)은 민주(民主), 민치(民治)로 전화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민주주의라는 우월한 정치문화에 자존심의 상당부분을 꺾고 사는 
오늘날 동양의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더 나은 자유를 만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로지 견고한 군함과 대포의 힘으로 비서양의 모든 것을 깔아뭉갠 서양에 
충정어린 군자(君子)의 충고를 들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은 폭력앞에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이란 먹고 살게 되고서야 꿈과 희망이 가능하다는 
속세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하여 통일과 정치적 안정, 
생산력과 제도를 무기로 한 친스후앙(秦始皇)과 법가이론의 현실성 앞에 
유가사상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후앙라오(黃老)사상과 같은 매우 정교한 
권모술수가 유가, 법가와 가당치 않게 어울리면서 그 정점에 섰던 
한우띠(漢武帝)에 의해 유가사상은 삶과 시대의 이상이란 초기 형태를 거의 잃게 
되었다. 저간의 복잡한 사정을 여기서 일일이 언급할 수 없다. 하지만 꼭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무력에 의해 통일된 중국최초의 제국이 출현했다는 점과 제국은 
정책의 통일성을 위해 절대로 다양한 사상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순자의 제자들에 의해 경전이 성립되어 가면서 공자는 성인(즉 神)이 되어가기 
시작하였고, 법가와 후앙라오가 장악한 정권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키워가기 
위해선 공자의 개혁, 맹자의 혁명은 얘기되어선 안되었다. 뺄 건 빼고 
전제군주에게 유리한 말들만 골라 성인의 말로 포장되었다. 이것이 통 
종수(董仲舒)의 소위 독존유술(獨尊儒術)의 실체다. 따지고 보면 공자의 직접 
제자들부터 위대한 스승에 대한 절대적 존경의 염 때문에 스승을 절대화하기 
시작하였다. 맹자대에 이르면 스승이면서 제자들을 상당히 무시하는 못난 
권위주의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는 '나도 여러 면에서 제자만 
못하다'({論語}[公冶長])는 공자의 상대적이면서도 겸손한 교수법과 다르다. 
어쩌면 공자의 가르침에 정통하지 못한 제자들이 스승에게 지고의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자식의 
패륜은 부모의 잘못이 크고, 제자의 패덕은 스승의 잘못이 크다는 사후반성주의의 
입장에 서면 공자 스스로도 일정부분의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겠다. 어쨋든 
이리하여 공자는 매우 권위적인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논어}에 따르면 산적처럼 길을 막고 통행세를 받는 행위는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더 많은 경찰을 투여하여 딱지를 많이 끊는 것이 
교통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틀려먹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요행을 바랄 뿐 세금에 달가워 않고 벌칙에 복종하지 않는다.({論語}[爲政]) 
매야말로 단기적 처방으론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장기적으로 이는 동물의 
세계이지 사람 세상이 아니다. 따라서 세상전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트는 훈련과 
교육, 즉 도덕사회를 만드는 것만이 가장 완벽한 방법이다. 정치가의 솔선수범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정점인 임금은 새벽부터 조깅이 아닌 도덕 수업을 받아야 
하고, 아들에 맡길 것이 아니라 학식있는 사람들을 많이 채용하여 끊임없이 그들과 
논쟁을 벌이며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여야 한다. 제국의 황제들이 이를 
받아들일리 없었다. 그래서 한(漢)제국시대 공자성인화작업은 모두 작전상 
편의이며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일 뿐 실존했던 공자와 무관한 것이다. 어쨋든 이 
과정을 통해 공자의 본질은 흐려지고 미세한 말절이 중심논리로 화하게 되었다. 

거기에 더 큰 한 몫을 한 사람이 바로 유생들 자신이다. 예언을 하고(讖), 그 
예언에 맞추어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한(緯) 사람들도 다름아닌 바로 
유생들이었다. 세금을 배가하고 토지제도를 귀족에 더욱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가고, 더 혹독한 형벌을 만든 사람들도 유자들이었다. 이건 공자의 진의가 
아니다.(기실 공자가 살아있을 때도 이런 배신을 한 르우안 치우와 같은 제자가 
있었고 인간 공자는 그를 문하에서 추방하였다) 유학은 이런저런 공자성인화 
과정을 겪으며 현실 정치상황과 결부되면서 관학(官學)이 되었다. 고시과목으로 
채택된 학문분야에서 발전을 기대한다는 건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 결과 옛 성인들의 말씀을 그저 '기술할 뿐 창조하지 않았다'(述而不作)는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生而知之) 성인이 되어 있었고 소왕(素王)으로, 
탕(唐)나라 때는 문선왕(文宣王)에 추증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인간 공자에게서 
느끼는 매력을 여기선 찾아볼 수 없다. 그 이후 탕쏭(唐宋)시대 이후 불교와 
도교의 강한 영향으로 새로운 현자들이 출현하고 공자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고자 유학은 획기적인 변화를 겪는다. 심(心)의 주관성이 우주와의 
호흡속에 강조되고 유학은 '제2기 발전'(뚜웨이밍, 167-8)을 맞게 된다. {논어}가 
매우 중시되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중시된 결과가 고시과목에 편입되는 것이라면 
좀 생각해볼 일이다. 이 시기를 예서 논하기엔 너무 벅차다. 다만 요점만 말하자면 
학문으로서(종교라 해고 무방하다) 유학이 일대 전환점을 맞아 원시유가의 내용과 
상당히 다른 새로운 창조를 이룬 것은 분명하지만, 그곳에도 우리가 찾으려는 인간 
공자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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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제 해결은 사람으로부터
  우리나라가 처음 받아들인 유학은 중국에서 한(漢)왕조이래 제도화된 유교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정치이데올로기로 크게 부각된 유학은 인간 공자의 사상이 아닌 
성인 공자의 유교, 즉 성리학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유교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고 할 때 그 비판대상은 성리학적 질서체계이며, 계승하려는 건 유교 
자체의 정신과 사회적 정합성을 창출하는 조화능력이다. 여기에 인간 공자가 
되살아날 가능성이 존재한다. 공자사상의 변형태, 또는 왜곡상에 대한 비판은 역시 
변형되기 전의 원형태가 가장 효과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새마을 노래와 향토예비군가를 줄맞춰 부르며 살아온 우리의 근대화과정은 실로 
'무엇이든지 만들어져야한다'는 논리와 '최대의 효율을 올려야한다'는 맹목적 
삶이었다. 그 결과 지금 60 이상 노인의 70%가 병이 있는 나라가 되었고, 아랫 
것이 윗 놈 패기를 다반사로 하며 심지어 자식이 애비를 죽이는 일도 심심치 않다. 
많이 건설하였고 많이 파괴하였다. 정렬문이 많은 것은 열녀가 그만큼 없었다는 
말인데, 지금 나이살이나 먹은 사람이면 누구나 도덕없음을 개탄하니 몇 백년 후 
우리의 후손은 이 시대를 얼마나 부도덕하게 볼까. 그러나 문제를 문제로 지적하는 
사람에겐 항상 그 문제에 대한 일정한 해답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근대 한국의 
도덕적 타락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의 해답을 갖고 있다. 즉 문제를 일으킨 것이 
사람이므로 해결도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고민하고 '유교와 21세기'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을 찾기 위해서다. 21세기 새로운 한국인은 단절된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이상을 꿈꿀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너무도 진부한 이 문제는 진부하기 
때문에 오래된 질문이고, 오래되었기에 누구나 아는 질문이며, 누구가 알기에 
해답이 항상 일정하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성립하기가 힘들고 경험적으로 근거가 
희박하더라도 시옹 스리(熊十力)의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면 본래 있었던 것에 
의거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창조할 수 없다"는 명제(甘陽, 620)는 
여전히 실효성이 있다. 

이는 1990년대 우리나라 지성인이 비로소 하게 된 고민은 아니다. 성리학의 기본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공소(空疏)한 도덕수양에서 벗어나 현실을 구할 실용적 
학문을 하자는 선구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동양의 내적(內的) 근대화의 
길을 마련한 사람들이라 부를 수 있는데 중국의 따이 전(戴震: 1777년 졸), 조선의 
정 약용(丁若鏞: 1836년 졸), 일본의 오규 소라이(荻生?徠: 1728년 졸) 등이 
그렇다. 그런데 다른 나라는 차치하고 한국만 볼 때 우리는 정 다산(丁茶山)의 
고민을 전혀 계승하지 못했다. 역사의 단절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과정이 
어떠했든 오늘의 한국은 몇 안되는 사대부(士大夫)들의 성인을 바래는('希聖') 
세상이 아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속인으로서 이(利)를 갈구하고,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그 속에서 옳은 뜻(義)을 찾아 단절을 극복해 보고자 한다. 단절의 
극복은 연결에 있다. 

요즘 중국에선 이에 관하여 '문화열'이란 주제를 달고 유학부흥, 
중체서용(中體西用), 서체중용(西體中用), 철저재건 둥 논의가 활발하다. 그런데 
21세기 한국을 꿈꾸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은 성리학을 부흥시키자는 것도 
아니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하여 전통정신을 몸통으로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배우자는 것도 아니요, 그 반대도 아니요, 완전한 사회혁명이 
필요하다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한국인을 만들어가자는 말이고, 그 한국인을 정 
다산과 퇴율(퇴계와 율곡)과 주 시(朱熹: 1200년 졸)와 공자로 연결해가자는 
말이다. 동양적인 것, 전통적인 것, 과거의 아름다운 사상과 문화에 대한 재현과 
극복의 논쟁을 이제는 뛰어 넘자는 얘기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인간상, 
그 사람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찾아보자는 말이다. 

지금은 누가 무슨 말을 했다든가 누구의 생각이 어떻다는 것은 별반 중요성이 없는 
듯하다. 누구도 나의 이 궁극적 고뇌를 해결해 줄 수 없으며, 내가 참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내게 지금 고민스러운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가 중요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 공자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그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서거나, 
그와 똑같은 행위를 하기 위해서라면 향교를 부활하고 한복을 입자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현실성이 없다. 이 쪽 지반 위에 탄탄히 두 발을 뿌리내리고 섰을 때 
생동하는 촉수는 역사 저쪽의 여기 저기를 마음껏 휘감아 연결할 수 있다. 우리 
한복은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으니 이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100리를 
출퇴근하고 의자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오늘에 발을 딛고 예스러움과 단정함을 
갖춘 한복패션을 생각하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마찬가지로 성인 공자의 삶이 
모범적이었으므로 이를 되새겨야한다는 주장과 도덕이 퇴락하고 정치사회적 
가치기준이 애매한 오늘의 고민에 발을 딛고 당시 인간 공자의 고민이 
어떠했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사회문제가 생겨나고 이를 극복하는 노력과 좌절, 그리고 다시 연결하는 과정이 
없이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조선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제국주의, 일제, 미국, 분단 그리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거치며 이 
땅의 사람들은 전통의 해석과 재해석 기회를 갖지 못한 체 배가 떨어진 것도 잊고, 
다리가 무너진 것도 잊고, 마침내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것도 잊고 살게 되었다. 
동양이고 서양이고, 고대인이고 현대인이고 사람은 참 고만고만하게 살아간다. 
장난에 취한 어린 시절, 이성에 미친 젊은 시절, 일에 팔린 장년 시절, 손주에 
미친 노년시절을 산다. 언제든 어디서든 삶의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울 땐 한 잔 
술에 잊고 산다. 그러나 역사의 짐을 밀고가는 지성인이라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꿈꾸는 새로운 한국인이라면 꾸 옌우(顧炎武: 1681년졸)처럼 "천하의 일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日知錄}[政勢])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망각이 아니라 극복이 아니겠는가. 인간 공자는 바로 거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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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자는 되살아날 수 있다
  전통을 얘기하고 전통회복을 외치는 것 자체가 이미 전통이 없어졌다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얘기하고 외치는 것 외에 마음을 돌아보면 -- 마음을 돌아본다는 
말은 동양사상의 정수이다 -- 전통은 없어질 수가 없다. 우리가 이 대지 위에 부는 
바람과 더불어 살고 이 땅 위의 푸성귀를 먹고 사는 한, 어머니의 정감어린 옛날 
얘기를 듣고 자라는 한 '끊임없이' 전통과 더불어 산다. 여기서 굳이 공자의 
사상이 어떻고 주장이 어떻고를 얘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 마음 가득히 살아 
움직이는 공자가 고여 있기 때문이다. 고여 있기 때문에 꺼낼 수 있다. 
전통의 비판적 계승은 전통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시대 한국의 
과제가 성리학의 극복, 또는 소위 '실학' 이래 300여년 극복과정의 완결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일지라도 바로 이 선결과제 때문에 고민한다. 분단의 극복과 이를 
통한 새로운 한국의 창출만이 이 땅에서 진정한 근대성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고민도 마찬가지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단절의 시간이 너무 길었고 
방기했던 세월이 너무 오래 되어 성리학 자체를 이해한다는 것만도 지난한 
과정인데, 어떻게 현실에 바탕한 연결을 생각하고 극복을 꿈꿀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찌보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한문을 배우고 원전을 읽어 그들의 사고와 
접하는 간고한 과정만을 옳다고 여기는 건 너무 권위주의적이고 배타적인 
학문방법이다. 우리 마음 속에 고여 있는 사람 정 다산을 꺼내고, 인간 공자를 
꺼내어 오늘 숨쉬고 있는 나와 일치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는지도 
모른다. 

공자는 전통과 현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통과 현대가 
오늘날보다 더 뒤범벅이 된 사회에서 양심적으로 전통을 고수했다. 그는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확실히 알았고 고집스럽게 이를 시정하려 노력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 사는 여러 모습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고,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제자들을 마음으로 설복시킬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숱한 노력을 기울였고 결과가 안좋으면 실망도 많이 했다. 그는 
열심히 산 사람의 모범이다. 무엇보다도 공자는 꿈을 끝까지 유지한 고집스런 
사람이었다. 

현대 한국의 대다수 지성인은 공자와 같이 전통과 현대를 고민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꿈의 유지와 이상을 실천으로 옮기려 줄기차게 노력하는 공자와 같은 
고집이다.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은 다른 일이면서도 같은 일이다. 그렇다고 
유세를 떠나라는 말도, 꿈과 이상을 정치와 목민(牧民)에서 찾자는 말은 아니다. 
문명의 동력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에 있다. 새로운 한국의 지성은 앎을 통해 
상상력을 키우고 실천을 통해 공자와 만나야 한다. 공자는 학자로서도 전통을 
알았고, 실천가로서도 전통을 알았다. 그가 안 전통은 저우나라 전성기의 
것들이지만 그의 전통에 대한 이해는 현대를 위한 것이었다. 공자사상의 
본질이야말로 곧 춘치우(春秋)판 전통과 현대이다. 

공자는 되살아날 수 있다. 전통과 현대가 뒤범벅된 사회일수록 공자의 
부활가능성이 높다. 혼란 속에서 전통회복을 외치는 선비들이 존재하는 한 공자는 
살아있는 전범이다. 제의(祭儀)의 예교주의(ritualism)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인간적인 삶을 표방하는 사회라면 공자는 훌륭한 선각자가 되어 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도덕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공자의 사유의 길은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그는 되살리려는 노력에 의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정의로운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언제든 그냥 살아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경험했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공자의 보수성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며, 
공자정신의 회복을 운위하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사회가 도덕적이냐 아니냐,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느냐 아니냐에 대하여 고민하는 보다 많은 인간 공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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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論語} 
{孟子} 

{荀子} 

H.G.크릴, 이성규역, {공자 --인간과 신화}, 서울: 지식산업사, 1996. 

沈成添, "論近人對儒之起源的推測", {史學彙刊}[臺北], 第6期. 

장현근 편저, {중국정치사상입문}, 서울: 지영사, 1997. 

뚜웨이밍, 김홍경역, "유가철학과 현대화"(한국철학사상연구회논전사분과 엮음, 
{현대중국의 모색: 문화전통과 현대화 그리고 문화열}, 서울: 동녘, 1992), 
139-186쪽. 

甘陽, 황희경역, "현대중국에서 유학의 역할과 나아갈 길"(위의 책), 616-6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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