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parsec ( 먼 소 류 ) 날 짜 (Date): 1999년 11월 16일 화요일 오후 11시 42분 36초 제 목(Title): [번역 부분] 정신의 단일성 산술적인 역설: 정신의 단일성 우리의 과학적인 세계상 안에, 지각과 의식이 있고 생각하는 우리의 에고가 왜 포함되지 않았는가는 다음 다섯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그것 자체가 그 세계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상 전체와 동일하며, 따라서 부분으로서 그것에 포함될 수 없다. 그러나 당연히 여기서 우리는 산술적인 역설에 부딪히게 된다. 즉, 이러한 의식있는 에고가 엄청나게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반해 세계는 단지 하나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개념이 스스로를 만들어 내는 방식에서 초래된다. '개인적인 의식의 몇개의 영역은 서로 중첩된다. 그것들 전체가 겹치는, 모두에게 공통적인 영역은 '우리 주변의 실제 세계'의 구조물이다. 그 모든 것과 더불어 한 가지 불편한 느낌이 이런 질문과 함께 남는다: 나의 세계는 당신의 세계와 정말 같은가?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 감각을 통해 투사된 그림으로부터 구별되는 '하나의' 실제 세계가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그림들은 실제 세계와 닮았는가, 또는 후자, 즉 세계 '자체'는 아마도 우리가 지각한 것과 매우 다를 것인가? 그런 질문들은 교묘하지만 필자의 의견으로는 그것은 논의의 주제를 혼동시키기 매우 쉽다. 그것들에는 적절한 답이 없다. 그 모든 질문들은 하나의 근원에서 튀어나오는 모순이거나, 그런 모순으로 이끄는데, 그 근원을 나는 산술적 역설이라고 부른다. 즉, 그것들의 정신적 경험으로부터 하나의 세계가 조합되어 나오는 다수의 의식있는 에고이다. 갯수 역설의 해답은 앞서 말한 종류의 질문들을 제거하고 그것들이 가짜 질문들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갯수 역설로부터 탈출하는 두 개의 방법이 있는데, 둘 다 (고대 그리이스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고, 따라서 완전히 '서양적인') 현재의 과학적 사고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정신나간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방법은 라이프니츠의 끔찍한 모나드 원칙 안에서 세계를 여러 개로 만드는 방법이다: 각각의 모나드는 그 자체로 세계가 되며 그들간의 정보교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모나드들은 '창문이 없다'. 그것들은 '대화 불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은 '예정된 조화'라고 불리운다. 이 제안에 설득당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더우기 이것이 갯수 역설을 어떻게든 누그러뜨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당연히 단 하나의 대안만이 남아있다. 즉, 정신 또는 의식의 통일이다. 그들의 다수성은 단지 표면적일 뿐이고 사실은 하나의 정신만이 있다. 이것은 우파니샤드의 원칙이다. 그리고 우파니샤드 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강력한 편견들에 의해서 반박되지 않는다면 신과의 신비적인 합일의 경험들은 이런 태도를 수반한다.그리고 이것은 그런 태도가 동양에서보다 서양에서는 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파니샤드 전통 외부에서 하나의 예를 들면 13세기 이슬람교 시대의 페르시아 신비가 아지즈 나파시가 있다. 이것은 프리츠 마이어의 논문 에라노스 연감(1946)에서 발췌했으며 그의 독일어 번역으로부터 번역한 것이다: 동물의 죽음과 함께 그 영혼은 영혼의 세계로, 그 육체는 육체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때 육체만이 변화한다. 영혼의 세계는 하나의 단일한 영혼으로서 육체의 세계 배후에 빛처럼 서 있으며, 그것은 어떤 하나의 생물이 태어나면 창문처럼 그것을 관통하여 비춘다. 창문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세계에 더 적거나 더 많은 빛이 들어온다. 그러나 빛 자체는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10년 전 올더스 헉슬리는 '영속성의 철학(?, The Perennial Philosophy)'이라는 귀중한 책을 출판했다. 그것은 가장 다양한 시대의 가장 다양한 민족들의 신비가들로부터 발췌한 선집이다. 당신이 원하는 곳 어디든 펼치면 비슷한 종류의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인종, 다른 종교에 속했으며 서로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던, 수백, 수천년의 세월과 지구상에서의 가장 먼 거리에 의해 서로 떨어져 살았던 사람들 사이의 기적적인 의견일치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양사상에 대하여 이 원칙은 별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며, 불쾌하고 환상적이며 비과학적이란 딱지가 붙어있다. 어쨌든 그것은 우리의 -- 그리이스적인 -- 과학이 객관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것은 인지의 주체인 정신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지점이야말로 우리의 현 사고방식이 보완되어야 할 바로 그곳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아마도 동양사상으로부터 약간의 수혈을 받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수혈은 항상 응혈을 방지하기 위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과학적 사상이 도달한 논리적 정밀성을 잃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장소,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정신 상호간과 지고의 정신과의 동일성이라는 신비적 가르침을 위해 한가지 사실이 주장될 수 있다 -- 라이프니츠의 끔찍한 모나드론에 반해서 동일성 원칙은 의식이 결코 복수(plural)로서 경험되지 않고 단수(singular)로서만 경험된다는 실증적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보다 많은 의식을 경험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세계 어디서건 일어난 적이 있다는 정황증거의 흔적도 없다. 만일 필자가 같은 정신 안에 하나보다 많은 의식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동어반복으로 보일 것이다 -- 우리는 그 반대의 상황을 거의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거의 요청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좀 더 상세한 논의를 하려고 하며, 그것을 찰스 쉐링턴 경에게서 인용하여 확증하고자 한다. 그는, 드물게도, 대단한 천재이면서 동시에 건전한 과학자였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그는 전혀 우파니샤드 철학에 경도되지 않았다. 이 논의에서 필자의 목적은 아마도 나중에 건전함과 논리적 정밀성을 희생시키지 않은 채 동일성의 원칙을 우리 자신의 과학적 세계관과 동화시키기 위한 길을 닦는 데 기여하려는 것이다. 방금 필자는 우리가 하나의 정신 안에서 의식의 다수성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의식의 다수성이라는 말을 정확히 발음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경험에 대한 설명도 될 수 없다. "다중 인격"이라는 병리학적인 경우에조차도 두 인격은 서로 교대하며, 그들은 결국 하나의 장을 함께 점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특징적인 양상일 뿐이고 그 두 인격은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꿈이라는 인형극 안에서 우리는 꽤 여러 배우들을 조정하는 끈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그들의 대사와 연기를 조정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 중 하나만이 나 자신, 즉 꿈꾸는 사람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곧장 연기하고 말하는데, 그러면서 또다른 배우가 어떻게 응답하고 나의 다급한 요구를 충족시켜 줄 것인지를 간절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그로 하여금 내가 좋아하는 무엇이건 연기하고 말하게 시킬 수 있는 경우는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 사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꿈에서 "또다른 사람"은, 감히 말하건대, 대체로 깨어있는 삶 속에서 나를 반대하는 심각한 장애물로서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어떤 것의 인격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술된 이상한 상황의 일들은 대부분의 옛날 사람들이 그들이 꿈 속에서 만난 살았거나 죽은 사람, 또는 신이나 영웅들과 실제로 대화를 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이유임이 거의 틀림없다. 그것은 잘 사라지지 않는 미신이다. 기원전 6세기 초에 에페수스의 헤라클리투스는 그것을 강력히 부정했는데, 그런 명료함은 그의 모호한 유작들 안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계몽된 사고의 주창자라고 믿었던 루크레티우스 카루스는 기원전 1세기에도 여전히 이 미신에 매달려 있었다. 필자는 그것이 우리 시대에는 아마도 드물겠지만 완전히 멸종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좀 다른 문제로 가 보자. 필자는 필자 자신의 의식있는, 필자가 하나라고 느끼는 정신이 정신이 어떻게 해서 필자의 몸을 이루는 세포들 (또는 그 일부)의 의식의 집적에 기원해서 생겨날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해서 필자의 삶의 매 순간이 그것들의 결과물일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어떤 사람은 우리들 각자가 그러한 '세포들의 연방'이라는 사실이, 만일 가능하다고 한다면 정신이 다수성을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가능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연방' 또는 '세포 국가(Zellstaat)'라는 표현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은유로 간주되지 않는다. 쉐링턴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를 구성하는 부속 세포들 각자가 자아 중심적인 개별 생명이라고 언명하는 것은 단순히 상투적인 말이 아니다.그것은 설명을 위해 단순히 편의상 하는 말이 아니다. 신체의 구성 성분으로서의 세포는 시각적으로 구분된 단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단위 생명체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삶을 꾸려 간다. ... 세포는 단위 생명체이고, 한편 우리의 생명은 완전히 세포 생명들로 구성된 단위 생명체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더 세밀하고 더 구체적으로 부연될 수 있다. 뇌 병리학과 감각 수용에 대한 생리학적 조사는 감각 중추가 여러 영역에 따라 지역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지지하는데, 그 극단적인 독립성은 놀라울 정도여서 우리로 하여금 그 지역들이 독립적인 정신 영역과 연관되어 있다고 기대하게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특별히 특징적인 경우는 다음과 같다. 먼 경치를 두 눈을 뜬 채 보통의 방법으로 보고, 그 다음에 오른쪽 눈만 뜨고 외쪽 눈을 감고 보고, 그 다음 그 반대로 해서 보면 별다를 차이를 느낄 수 없다.심리적인 시각 공간은 세 경우에 모두 똑같다. 아마도 이것은 망막 위의 대응되는 신경 말단에서 오는 자극이 '지각이 만들어지는' 뇌의 동일한 중추로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예를 들면, 우리 집의 출입문 손잡이와 침실 문 손잡이가 부엌문 위에 매달려 있는 동일한 종을 울리는 것과 같다. 이것은 가장 쉬운 설명이지만 틀린 설명이다. 쉐링턴은 깜박임의 임계 주파수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실험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필자는 그것을 되도록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해 보겠다. 실험실에 설치된 미니 등대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1초당 매우 많은 , 말하자면 40이나 60, 80, 또는 100번의 섬광을 발한다. 섬광의 주파수를 증가시키면 어떤 특정한 주파수에서 깜박임이 사라지는데, 그것은 실험의 세부사항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관찰자, 즉 두 눈으로 보통의 방법으로 그것을 보고 있는 관찰자를 가정하면 그는 연속된 빛을 보게 된다. 주어진 환경에서 이 임계 주파수가 초당 60회라고 하자. 이제 두 번째 실험에서는 다른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이, 적당한 장치를 써서 두 번의 섬광마다 한 번은 오른쪽 눈에, 그 다음은 왼쪽 눈에 섬광이 비추도록 하여, 각 눈은 초당 30회의 섬광만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만일 자극이 같은 생리적 중추에 전달된다면 이것은 아무런 차이도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출입문의 버튼을 2초마다 누르고 내 아내가 침실 문의 버튼을 마찬가지로 2초마다 누르되 나와 번갈아 누르면 부엌의 종은 매 초마다 울릴 것이고, 이것은 우리 중 하나가 매 초마다 각자의 버튼을 동시에 누른 것과 똑같다. 그러나 두 번째 깜박임 실험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오른쪽 눈에 초당 30회의 섬광과 그와 엇갈리게 왼쪽 눈에 초당 30회의 섬광을 보여 주는 것은 깜박인다는 느낌을 제거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두 눈이 다 뜨여 있다면 그 2배의 주파수, 즉 오른쪽 눈에도 60회, 왼쪽에도 60회의 섬광이 필요한 것이다. 쉐링턴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두 눈으로부터의 보고를 결합하는 것은 대뇌 기작의 공간적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오른쪽 눈의 상과 왼쪽 눈의 상이 두 관찰자 각각에게 보여지고, 그 두 관찰자의 정신이 하나의 단일한 정신으로 합쳐진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의 감각이 각각 처리된 다음 심리적으로 하나로 합쳐진 것과 같은 것이다. ... 그것은 마치 각각의 눈이 상당한 정도의 존엄함을 갖춘 별도의 감각중추를 지니고 있어서 각각의 감각중추 안에서 그 눈에 바탕을 둔 정신적 과정이 완전한 인지적 수준까지 전개된 것과 같다. 그것은 생리학적으로 시각적 하위-뇌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한 하위-뇌가 2개 있어서 하나는 오른쪽 눈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왼쪽 눈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구조적 연합 보다는 행동의 동시성이 그들의 정신적 협조를 가능케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매우 일반적인 고려가 뒤따르는데 그중에서 필자는 가장 특징적인 문장만을 골라 냈다: 이렇게 해서 여러 개의 감각 양식에 기반을 둔 의사-독립적인 하위-뇌들이 있는가? 최상층 뇌 안에서 오래된 '다섯' 감각은 구제불능으로 서로 통합되어 더 높은 질서 아래 가라앉기보다는, 여전히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각자 별도의 영역으로 구별되어 있다. 정신은 어느 정도까지 경험의 시간적 일치에 의해 심리적으로 큰 규모로 통합되어 있는 것일까? ... 그것이 '정신'에 대한 질문이라면 신경계통은 한 독단적인 세포로의 중앙집권에 의해 통합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각각의 단위가 하나의 세포인 백만겹의 민주주의를 공들여 이룬다. 하위 생명으로 구성된 구체적인 생명은 비록 통합되었지만 그 합산적 성격을 드러내 보이며 스스로를 협동하는 생명들의 미세한 촛점들의 모임이라고 선포한다. ... 그러나 우리가 마음으로 시선을 시선을 돌리면 거기엔 이러한 모든 것은 없다. 단일한 신경세포는 결코 미세한 뇌가 아니다. 몸의 세포 구조는 아무리 들여다 봐도 '정신'에서 나온 것일 필요는 없고 ... 하나의 단일한 독단적인 뇌 세포는 최상위의 많은 세포로 된 층보다 정신적 반응에 더 통일되고 비원자적인 특징을 보증해 주지 못할 것이다. 물질과 에너지는 구조에 있어서 작은 알갱이 모양인 것처럼 보이는데 '생명'도 그러하다. 그러나 정신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필자는 필자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인용했다. 쉐링턴은 생체 내에서 실제로 진행되는 일에 관한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서 하나의 역설과 씨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솔직함과 절대적인 지적 성실성으로, 그것을 감추거나 설명해 버리려고 하지 않고(흔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했다) 그것을 용감하게 드러내고 있다.그것은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과학이나 철학에서 어떤 문제이건 그 해답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인 반면에, 그것을 '멋진' 문구로 바르는 것은 진보를 가로막고 모순을 (영원히는 아니지만, 누군가 그 사기를 알아챌 때까지) 지속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쉐링턴의 역설은 또한 산술적인 역설, 즉 숫자의 역설이고, 필자가 믿는 바로는 그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필자가 본 장의 앞부분에서 같은 이름을 붙였던 역설과 많은 관련이 있다. 앞의 것은, 간략히 말해서 다수의 정신으로부터 결정화된 하나의 세계이다. 쉐링턴의 것은 표면상 다수의 세포생명, 또는 달리 말하면 그 각각이, 우리가 그것을 하위 정신과 결부시켜야겠다고 느낄 만큼 상당한 존엄성을 지닌 다수의 하위 뇌에 바탕을 둔 하나의 정신이다.그러나 우리는 하위 정신이란 마치 다중정신과 마찬가지로 흉악한 기괴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 그것은 누구의 경험에서도 대응물을 갖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필자는 두 역설 모두 우리 서양의 과학체계에 동양의 정체성 원칙을 흡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정신은 그 본질상 단일한 것이다.필자는 이렇게 말하겠다: 정신들의 전체 수는 단 하나라고. 필자는 그것을 감히 그것을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특이한 시간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신은 언제나 지금 있다. 정신에는 실제로 예전이나 나중이란 것이 없다. 기억과 기대를 포함하는 현재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의 언어가 이것을 표현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또한 필자는, 누군가 그것을 말해달라고 한다면, 지금 필자가 과학이 아니라 종교에 대해 --그러나 과학에 반하지 않고 오히려 과학적 연구가 흥미를 잃고 앞에 내놓은 것에 의해 지지받는 종교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쉐링턴은 말하길: '인간의 정신은 우리 행성의 측면에서 봤을 때 최근의 제품이다'라고 한다. 필자는 물론 동의한다. 그러나 만약 첫번째 단어(인간의)가 빠져 있었다면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일찌기 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 있다. 홀로 세계의 형성을 반조하는 숙고하고 의식있는 정신이 이 '형성'의 과정 중 어느 한 시기에서야 겨우 , 우연히, 그것도 확실하게 특정한 생명 형태를 돕는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그들의 보존과 번식을 뒷받침하는 매우 특별한 장치와 결부되어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것은 물론이고 기이하게 보일 것이다 : 뒤늦게 나타나고 그 특별한 발명품(뇌) 없이도 스스로를 유지시켜 온 많은 다른 생명 형태들을 뒤잇는 생명 형태들. (종의 수로 본다면)그들 중 매우 적은 일부만이 '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기 전에는 모든 것이 빈 객석을 향한 공연이었을까? 아니면 아무도 관찰하지 않는 세계를 세계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고고학자가 오래 전에 사라진 도시나 문화를 재구성할 때, 그는 그 장소, 그 시대에 표현된 인간의 행동, 감각, 사상, 느낌, 기쁨, 슬픔 등에 있어서 과거의 인간 생활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수백만년 동안 존재했으면서 그것을 알고 관찰할 어떠한 정신도 없었던 것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존재했었는가? 이것을 잊지 말자: 우리가 그랬듯이 세계의 형성이 의식있는 정신에 반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상투적인 문구, 하나의 구문, 우리에게 친숙한 은유에 불과하다. 세계는 단 한 차례 주어졌다. 아무 것도 반조되지 않았다. 원본과 거울상은 동일하다. 공간과 시간 속에서 확장된 세계는 우리의 표상(관념)에 불과하다.경험은 --버클리가 잘 알고 있었듯이 -- 그것이 그것 외에 어떤 다른 것이라는 조그마한 단서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전 수백만년 동안 존재했던 공상과도 같은 세계는 꽤 우연하게도, 필자가 쉐링턴의 말로 기술하고 싶어질 정도로 거의 비극적인 과정을 통해 자신을 관찰할 뇌를 만들어 냈다. 에너지의 우주는 우리가 알기로는 고갈되어 가고 있다.그것은 운명적으로 종말이 될 평형을 향해 가고 있다.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평형점. 그러나 생명은 멈추지 않고 진화해 왔다. 그것을 둘러 싼 우리의 행성은 그것을 진화시켰고 진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정신이 진화한다. 정신이 에너지 체계가 아니라면 어떻게 우주의 고갈이 그것에 영향을 미칠까? 그것은 무사히 계속될 수 있는가? 우리가 아는 한 항상 유한한 정신은 작동하는 에너지 체계에 부속되어 있다. 그 에너지 체계가 작동하기를 멈추면 그것과 함께 작동하는 정신은 어떻게 될까? 유한한 정신을 만들어 냈고 만들어 가고 있는 우주는 그 때에는 그것을 사 라지도록 놓아 둘까? 그러한 고려는 어떤 면에서 당황스러운 것이다.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의식있는 정신이 갖는 흥미로운 2중의 역할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무대이며, 이 모든 우주의 과정이 일어나는 유일한 무대, 또는 그 모두를 담고 있고 그 외부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릇, 또는 상자이다. 다른 한 편으론, 우리는 이 부산한 세계 안에서 의식있는 정신이 어떤 매우 특정한 기관(뇌)에 묶여 있다는 인상, 아마도 거짓 인상, 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 특정 기관은 동식물 생리학에서 의심할 바 없이 가장 흥미로운 기관이지만 아직은 독특하지 않다. 왜냐 하면 다른 많은 기관들처럼 그것은 결국 그 소유자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기여할 따름이며, 그것이 자연선택의 과정 속에서 정교해진 것은 바로 그 목적(소유자의 생명 유지)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화가는 자신의 큰 그림 속에, 또는 시인은 그의 긴 시 속에, 아닌 체 하는 종속적인 인물을 도입하는데, 그는 바로 그 자신이다. 오딧세이를 노래한 시인은, 필자가 짐작컨대, 페니키아인의 홀에서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여 패배한 영웅을 감동시켜 울게 하는 눈 먼 음유시인으로서 자신을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그들이 오스트리아 땅을 지날 때 전체 서사시의 저자일 것으로 의심되는 시인을 만난다. 뒤러의 제성인 그림에서 두 무리의 신자들이 하늘 높은 곳에 있는 성삼위를 둘러 싸고 기도하고 있는데, 위에는 축복받은 무리가, 땅에는 인간의 무리가 있다.후자 속에는 왕들과 황제들과 교황들이 있는데, 또한, 필자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빼놓아도 좋았을 부차적인 인물로서 화가 자신의 초상도 들어 있다. 필자에게는 이것이 당혹스러운 정신의 이중 역할에 대한 최선의 유비이다. 한편으로 정신은 전체를 만들어 낸 예술가이지만 완성된 작품 안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부속물로서 그것이 빠져도 전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아직 세계상의 제작자인 우리 자신의 정신을 은퇴시켜서 정신이 세계 안에 자리잡지 못하게 하지 않고서는 매우 이해하기 쉬운 세계의 모습을 마들어 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초래된 전형적인 모순 중의 하나에 직면하고 있다고 선언해야만 한다. 정신을 세계 안에 우겨 넣으려는 시도는 결국 필연적으로 어떤 어불성설을 만들어 낸다. 일찌기 필자는 이와 똑같은 이유로 물리적인 세계상은 인식의 주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감각적 성질을 결여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 모형은 색깔도 소리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같은 이유에서 과학의 세게는 의식적으로 관찰하고 수용하고 느끼는 주체와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모든 것을 결여하거나, 또는 박탈당했다. 필자가 말하는 바는 첫째로 윤리적 및 미적 가치들, 모든 종류의 가치들, 전시된 모든 것의 의미와 목적에 관계된 모든 것을 뜻한다. 이 모든 것들은 없을 뿐 아니라 순수하게 과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유기적으로 삽입될 수 없다. 만일 어린이가 색칠용 밑그림에 색을 입히듯 그것을 끼워 넣으려 해도 그것은 맞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 모형에 다짜고짜 들어가도록 만들어진 것은 어느 것이던 과학적인 사실 주장의 형식을 취하게 되고,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틀리게 되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다.'생명을 경외하라'는 알버트 슈바이처가 근본적인 윤리 강령을 정리한 것이다. 자연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 자연은 생명을 세상에서 가장 가치없는 물건인 양 취급한다. 생명이 수백만 번이나 만들어진 것은 대체로 곧장 없어지거나 다른 생명을 먹여 살리기 위한 먹이로 내던져지기 위해서였다. 이것이야말로 항상 새로운 생명 형태를 만들어 내는 주요한 방법이었다. '고문하지 말라, 고통을 가하지 말라!' 자연은 이런 율법에 무지하다. 자연의 피조물은 영원한 투쟁 속에서 서로를 파괴하는 데 의존한다.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은 없으며 오직 생각이 그렇게 만든다.' 어떠한 자연적 사건도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도 않다. 가치란 없으며, 특히 의미와 목적도 없다. 자연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유기체의 합목적적인 환경 적응을 얘기한다면 그것은 말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잘못 이해된 것이다. 우리의 세계상의 틀 안에서 봤을 때 잘못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오직 인과적인 연쇄만이 있을 뿐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모든 전시물들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우리의 질문을 향한 우리의 모든 과학적 조사의 절대적인 침묵이다. 우리가 더 주의깊게 관찰할 수록 그것은 더 목적이 없고 어리석게 보인다. 진행되는 연극은 분명히 그것을 관찰하는 정신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이 관계에 대하여 과학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명백히 터무니없다. 정신은 그것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연극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태양이 결국엔 식고 지구가 얼음과 눈의 사막으로 변하게 되면 그것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듯하다. 말할 것도 없이 같은 표제 아래 나오는 악명높은 과학의 무신론에 대하여 짧게 언급하겠다. 과학은 자꾸 되풀이해서, 그러나 부당하게도, 이 악평을 감수해야만 한다. 모든 인격적인 것을 제거하는 댓가를 치룸으로써 겨우 접근 가능하게 된 세계 모형 속에서는 어떠한 인격적인 신도 그 일부를 형성할 수 없다. 우리는, 만일 신이 경험된다면, 그것은 직접적인 감각 수용이나 그 사람 자신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실감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들과 같이 신은 공간-시간 그림에서 빠져 있어야 한다. 필자는 공간과 시간 속 어느 곳에서도 신을 찾을 수 없다. -- 그것이 정직한 자연주의자가 할 수 있는 말이다. 이것 때문에 그는(아이러니컬하게도:역주) '신은 영이다'라고 쓰여 있는 교리문답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부터의 비난에 부딪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