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ilosophyThought ] in KIDS 글 쓴 이(By): magdo ( 막 도 ) 날 짜 (Date): 1998년03월23일(월) 07시48분04초 ROK 제 목(Title): Re: Asymmetic problem from death 살고 죽는 것을 단지 관성으로 무식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물질을 다루는 물리학도라서... 하루 하루 살아나가는 것이 관성화되면 그것을 멈추는 것이 싫어집니다. 매일 매일 살던 사람보고 그만 살아라 하면 반항하는 것이 당연할 듯 싶습니다. 직장 다니던 사람보고 집에가 애보아라 하면 반항합니다. 단지 보수와 야망의 문제라기 보다는 생활의 관성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사회라는 고도의 조직된 역사적으로 달려가는 관성 시스템이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생산라인을 두고 아이를 만들어내 사회의 속도에 맞도록 끌어올리는 장치 ( 문화, 학교, TV ) 를 이용합니다. 여러분은 그 속도에 끌어올려질 때까지 느끼던 반감을 잊지 않고 있겠지요? 부모의 말을 않듣고 학교에 가려하지 않고.... 심지어 신생아도 자궁에서 나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대칭성이 잘 맞는 것 아닙니까? 속도를 올리기도 어렵고 속도를 내리기도 어렵고. 왜냐하면 관성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갑작스런 단절이 아니라면 별 반감없이 죽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가며 천천히 생활을 정지시켜 나가는 것. 단지 현대 사회가 그런 것을 등한히 할 뿐이죠. 특히 휴전상황이고 고도성장의 기치를 내건 우리나라에선 더욱.... 그리고 탄생과 죽음이 비대칭적으로 보이는 것은 감정이라는 것이 작용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우리가 객관적으로 혹은 시대가 오래 지난 인물의 일생 을 조감해 본다면 매우 대칭적으로 파악 될 수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00 년 에 태어나서 이런 저런일을 하고 00 년에 죽다. 시간은 평평하게 깔리고 그는 나타났다 사라질 뿐 입니다. 평평한 시간을 일으켜 세우고 굴곡지게 하는 것은 인간의 희망, 공포, 기대와 같은 감정의 소산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것은 생의 관성이라 부를 수도 있는 살아가는 동력이고요. ////그들이 본 그곳은..... 그래서 그들은 지구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