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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ch ] in KIDS
글 쓴 이(By): whbear (병국이!!)
날 짜 (Date): 1994년05월31일(화) 16시47분38초 KDT
제 목(Title): 연세춘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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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동하   (CHUNCHU )
[94/5/30]특집-창간41주년기념소설타임캡슐     05/29 11:36   331 line

윤후명 <69년 철학과 마침>

  창간 41주년 기념 소설 타임캡슐

  필자약력
  1946년 강릉에서 태어남
  연세대 철학과 재학중 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 당선되
  어 등단
  77년 시집 [명궁]
  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 당선
  소설집 [돈황의 사랑] (83)
         [원숭이는 없다] (89)
         [별까지 우리가] (90)
         [약속없는 세대] (90)
         [비단길로 오는 사랑] (91)
  중편 [돈황의 사랑]으로 제3회 녹원 문화상,
  중편 [섬]으로 18회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
  94년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로 제39회 현대문학상 수상

                                  Ⅰ

  좀 맥빠질지 모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지난 5월 14일 재
상봉행사에서 내가 어떤 여자와 만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라고 미리 밝힌
다.
  재상봉이라니? 이 말을 처음 들어본 사람은 아무래도 좀 어려운 말인 모
양인지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기 마련일 것이다. “재상봉이라는 게 있는데 
말야....”하고 몇몇 친구들에게 설명할 때마다 무슨 말인가 하고 빤히 쳐
다보곤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알듯하다는 표정이긴 했으나, 그래
도 뭔가 아리송한 기색이 역력했다.  말하는 투로 보아 그건 아닐 텐데 하
면서도, 일찍이  ‘백두산 상상봉’이라는 말이 있어서  우뚝 솟은 봉우리 
중의 봉우리를 나타냈던 것과 같이, 혹시 무슨 높은 봉우리를 지칭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심심풀이 삼아 국어 사전을 뒤적거려 본 나는 우선 이 낱말이 수
록되어 있지 않은  것에 은근히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비로소 그 
뜻을 살펴보았다.
  재상봉이라는 낱말은 그 사전에  없었다. 어, 그래? 하고 나는 내친김에 
상봉이라는 낱말을 찾아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아주 간단히 ‘서로 만나다
’라고 정의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냥 서로 만나는 게 아니라 다
시 서로 만나는 것을 뜻하는 낱말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재회라
는 낱말이  떠올랐다. 이야말로 ‘다시 만남’이라고  풀이되어 있는 것이
다. 
  재회.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비록 사전에는 단순히 ‘다시 만남’이라고만 되
어 있지만, 흔히 영화같은 데서  이 낱말은 오래 헤어져 있던 연인들이 다
시 만나는 이야기에 단골로 쓰이지  않던가. 재회,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낱말인가 말이다. 거기에는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었다. 아름답
고, 애달프고, 기쁘고, 슬프고, 노엽고.... 
  그런데 이 재회와 똑같은 뜻으로 만들어 쓰고 있는 재상봉이라는 무뚝뚝
한 낱말이 있는 것이었다. 재회  대신에 이 말을 굳이 만들어야 했던 사람
의 고충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역시, 재회란 너무 감상적이
고 감미롭기 때문에 좀더 무게있는  걸 고르다 보니 그리 되었다고 여겨지
는 것이다. 
  어쨌든 재상봉이라는 낱말은 사전에 없는 것하고는 상관없이 꽤 널리 쓰
이고 있는 것이었고, 게다가  얼마 전에는 나에게까지 중요한 의미를 띠고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만나는 친구들마다 “
재상봉이라는 게 있는데 말야....”하고  그들의 표정을 살피곤 했던 것이
다.
  대학교는 말하면 올해, 즉 1994년은 내게 재상봉의 해였다. 여기에는 약
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다른  대학교는 몰라도 연세대학교는 졸업한 지 25
주년이 되는 해를 재상봉의 해로  정하여 개교 기념일 행사에 그 졸업생들
을 초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것이 어
언 25년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 말이야 이렇게 쉽게 ‘25년’을 들먹이고
는 있으나, 나는 나도 모르게 ‘으음, 25년!?’하고 속으로 신음소리를 머
금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도대체 어느 순간에,  시쳇말로 누구 맘대
로, 25년, 이른바 4반세기가 흘러가버렸단 말이더냐!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아야 뭐  그리 신통한 일도 없었다. 해마다 누군가
는 한 사람 널름널름 잘도 타는 노벨상 하나 타길 했나, 벼슬길에 한번 올
라보길 했나, 사장 소리 한번 들어보길 했나, 한심한 세월이었다. 그저 이
러저리 시달리며 살아온 25년이었다. 나는 갈데없는 개띠니까 이를 일컬어 
‘개 같은 내  인생’이라고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4월 어느날 동기생 
박준기로부터 올해가 재상봉의 해라는 전화가 오기 전에도 나는 알게 모르
게 안달이 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몇년 전부터 벌써 올해의 재상
봉의 날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일찍이 졸업
을 하는 그때  벌써 25년 뒤의 재상봉을  기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물 
네살의 청년이 25년 뒤 마흔  아홉살이 어서 되었으면 하고 기다렸다는 것
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었
다. 나는 바로 그때부터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25년이 25일이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던 것이다. 
  터무니없는 조바심이었다. 25년은 실로  길었다. 그 세월은 ‘누구 맘대
로’도 아니요, 내 맘대로도 아니라, 우주 운행의 법칙대로 흘러간 것이었
다. 애증이 교차되는 365×25`=`9125(일)이 에누리 없이 흘러간 것이었다. 
그리하여 재상봉의 날이 온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지냈던가?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매우 모호할 수밖에 없다. 미리 말한 바도 있
고 해서 시시껍하기도 하려니와  도무지 언제 그 세월이 지났는지, 그것이 
과연 25년인지, 아니면  25일은 지나치더라도 25개월은 아닌지 얼떨떨하기
만 할 것이다. 이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학교 때 재상봉의 날 행사를 보았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그때 그 사람들
은 참으로 경이로운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외람되게 한마디로 늙은
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 내가 과연 저렇게 늙자
면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오랜 시들음이 쌓여야 할 것인가. 
  인생이란 켜켜이 쌓인 때의  층, 구태여 말하면 구적층의 모습이란 말인
가. 나는 참담했었다.  대강당에서 보던 그 광경은  마치 녹슨 훈장, 아니 
지나치게 말해 녹슨 삽을 보는  느낌이었다. 25년 동안 해온 것은 결국 늙
는 일뿐이었구나.
  그것은 결코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여겨졌었다. 그런 세월을 내가 
살아가리라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서는 것이었다. 25년이 그렇
게 후딱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하기야 돌이켜보면 그동안 꽤나  거창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르고 굴러 
여기까지 온 것이 사실이었다.
  보라.
  대통령의 이름만 해도  박정희에서부터 최규하, 노태우를 거쳐 김영삼에 
이르렀다. 우리의 공화국 이름만  해도 제3에서부터 제4, 제5, 제6으로 이
어져 드디어 ‘신한국’이라고까지 붙게 된 세월이었다. 나 개인이야 별볼
일 없이 시난고난 살다보니,  어즈버, 얼결에 흐른 세월이지만, 역사란 역
시 준엄하고 냉혹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적으로 보면 더한층 엄청난 
소용돌이가 있었다. 그것을 일컬어  천지개벽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소
련이 무너져  여러 민족의 독립국가들로 쪼개진  것이었다. 그 ‘소비에트 
소셜리스트’ 민주 공화국 연방이 그만 맥없이!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다 늘어놓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저 25년 동안
의 역사의 변천에 대해서는 책 몇백권, 아니 몇천권을 쓴다 하더라도 부족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새  내가 25년이라는 저 끔찍한 세월을 살
아와서 오늘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정도로 그치고 싶다. 처음부터 
내가 하고자 한 이야기는 그렇게 거창한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 
나의 재상봉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Ⅱ

  앞에서 나는 재상봉에 대해 오래  전에 벌써 안달을 하고 있었다고 분명
히 밝혔었다. 왜 그랬던가? 나는 막상 이 글을 쓰면서도 그 전말을 자세히 
털어놓기가 여간 망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는 수 없는 것이다. 처음 
<연세춘추>의 기자에게서 짧은 글을 한 편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무엇보다
도 먼저 퍼뜩 머리에 떠오른 것은 그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나는 순간 머리를 흔들었다. 
  그 이야기는  비밀이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가슴속에 꼭꼭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다. 결단코 입을 열어서는  안된다. 그 이야기를 넣어 놓은 타임
캡슐을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러나  곧이어 내 마음의 한구석에 그 이야기
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소리가 들리고 있음을  나는 들었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너무도 미미하여 전혀  무시해도 그만인 정도로 여겨졌으나 금세 
중폭되기 시작하여 마치 아우성이라도 치며 귀에 쟁쟁 들려오는 듯했다.
  그 이야기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 비밀에 날개를 달아 생명을 불어넣
어야만 한다. 
  아니, 무엇보다도 나 자신 그것을 묻어두고 지낼 인내심이 없었다. 언제
까지 그 비밀을 묻어두지 못할  바에야 이것이 오히려 털어놓아야 하는 기
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나는 당장은 그 이야기를 떠나서는 다른 어
떤것도 염두에 둘 계제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내  삶의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나는 다짐하
기에 이르렀다. 앞에서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고 억지를 쓴 ‘그 이야
기를 넣어놓은 타임캡슐’을 마침내 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타임캡슐이라는 말은  쉽사리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어떤면으로 
보나 이것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타임캡슐이란, 가령 오늘날 쓰이는 여러가지 물건들을 밀봉해 넣어놓은 것
으로, 먼 훗날 그것을  열어보게 함으로써 오늘날의 실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타임캡슐이 몇개인가 묻힌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짧게는 몇백년, 길게는 몇천년이 지나 열어 보게
끔 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내가 타임캡슐을 안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
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하나의, 나만의 타임캡슐  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25년 전에 나는 그 타임캡슐을 학교 뒷산, 총장 공관으로 올
라가다가 돌다리 조금  못 미쳐서 왼쪽으로 접어들어  얼마쯤 들어간 곳에 
묻어 두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나는 타임캡슐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잇
었었다.
  그리고 그때 내 옆에는 한 여학생이 함께 있었음을 밝혀야 하리라.

                                  Ⅲ

  거기에 무엇을 넣어두었던가?
  그것은 나도 다  모르고 있었다. 그 타임캡슐  속에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때 내 옆에 있던  그녀의 것도 함께 넣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엄
밀히 따지면 ‘무엇’을 넣었는지를 모른다는 말은 틀린 것이었다. 그것은 
서로가 뻔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편지였다. 서로  25년 뒤에 만나 꺼내  보기로 하고 비밀의 편지 
한 장씩을 써서 넣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모른
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 될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몇겹의 비닐로 꽁꽁 
싸고 또 유리병 속에 넣어, 언제 보아도 쉽게 눈에 띄는 커다란 참나무 아
래 파묻었던 것이다. 그  원시적인 것을 첨단 시대의 타임캡슐에 비교한다
는 것이 어줍잖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재상봉의 날이 다가옴에 따라 나는 점점 더 그 타임캡슐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남몰래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곤 했다. 
  그것을 파묻고 나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오래오래 입을 맞추었고, 그리고 
신촌 시장 쪽으로  걸어 내려와 연탄 화덕을  앞에 놓고 이별주를 마셨다. 
졸업과 함께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던 것이다. 지난 대학 시절 동안 우리는 
헤어졌다 만났다하기를 반복하면서 그래도 꾸준히 연인관계를 지속시켜 왔
다. 하지만 졸업이  다가오자 그녀는 갑자기 어떤  남자와 약혼을 했다 했
고, 그것으로 우리의 만남도 막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
만, 이미 군 입대 영장을  받고 있던 나는 우리의 헤어짐을 묵묵히 받아들
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서로 갈 길을  가는거야. 나는 비굴하고 비통하게 중얼거렸다. 그
뒤 25년 동안 나는 그때의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이상하게 비굴하고 비통
해지는 느낌이었다. 하기야 25년  동안이나, 지지리도 못나게 그따위 이별
의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찌 비굴하고 비통한 일이 아니
랴. 결국 그녀는 나를 떠났어도 나는 그녀를 결코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솔직히 말해 그랬다. 
  그렇다면, 나는 25년 동안  늙어온 지혜도 아랑곳없이 그 시절의 추억에
만 연연해왔단 말인가. 생각하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혜
는 무슨 말라 비틀어진 지혜.  그 세월은 내게 적당한 요령과 쓰잘데 없는 
권위 의식만 키워준게 아니던가  말이다. 적어도 25년전에 바라본 25년 뒤
의 나는 이보다는 진보된  중년의 사내였다. 이른바 불확실성의 시대에 그
는 보다 확실한 인격을 지닌 사회 중추 인물이었다. 
  아니, 나는 그때부터 내가 아무리 늙더라도 젊은 시절의 꿈과 이상을 읽
을까보냐고 마음을  사려먹곤 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나는 졸업 무렵의 
의식수준에 머무른 채 오늘에 이른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5월 14일, 재상봉의 날은 돌아왔다. 
  학교의 발전협력처인지 어디인지  하는 기관에서 행사일정표와 초청장이 
오고 몇몇 동기생들이 연락을 취해  오곤 해서 분위기는 어느 정도 무르익
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타임 캡슐에만 더욱 관심이 커질 뿐이었다. 나
는 행사일정표를 들여다보며 그녀를 만나 어떻게 단둘이 그곳으로 갈 것인
가 이리저리 궁리에 몰두하기 바빴다. 게다가 부부동반으로 행동하게끔 되
어 있었으니 여간 곤란한 노릇이 아니었다. 조바심이 났다. 
  그런 심정을 스스로 달래기 위해  나는 행사장을 향하는 동안 내내 “하
필이면 이런 날  비는 웬 비야”하는 소리를 몇번씩  되뇌지 않을 수 없었
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가랑가랑 내리는 날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나는 은근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문제는 사실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미 내 뇌리에 자리잡고 있
는 것은 그 시절 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녀의 모습
을 보고 싶다는 뜻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행사중인 백주년기념관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모습을 찾기에 바빴
다. 수많은 남녀들로 붐비는  그곳에서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
이 아니었다. 
  나는 여러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며 그녀의 모습을 더듬어 찾았다. 입
구 쪽에 있는 접수처를 몇번이고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안쪽의 강당을 뒤
져 보기도 하며 혹시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변해버려 내가 알아보지 못하
는 것이 아닌가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갑자기  무슨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오게 된 
것은 아닐까? 일부러 안 온 것은 아닐까? 
  나는 차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단과  대학을 알리는 팻말이 분명히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자리가  뒤엉킬 위험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
무데도 없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 행사를 잊어 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다닌 학과의 다
른 동기생들은 그럭저럭 거의 다 눈에 띄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다닌 
학과를 직접 밝히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넓은 이해를 바란다. 그럼으로
써 혹시 그녀가 입을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다.
  나는 그녀를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한  채 문과대학 팻말 바로 옆쪽에 자
리잡고 앉아 엉거주춤 행사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타임캡슐은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 혼자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길래 일찍이 ‘착각은 자유
’라는 우스갯말이 있었던가? 나는 내가 왜 여기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하는
지 알 수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재상봉 행사의 당당한 주인공이면서도 나
는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느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행사는 백주년 기념관에서 동문회관으로 옮겨 계
속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착각은 자유’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 열매를 스스로 거두지 않으면 안되
리라 생각되었다. 
  혼자라도 그곳에 가서 참나무 아래 유리병의 타임캡슐을 꺼내 보지 않으
면 안된다. 어떤 우스꽝스러운  결과가 거기서 확인된다고 해도 나는 달게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따위  어리석은 짝사랑은 이제 무덤 속에 쳐넣
어 버려야 한다. 50이 바로  내일인 주제에 창피한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나는 제법 과격하게까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눈꼽만큼도 마음에 두고 있
지 않은 일인데  나만 혼자 그러고 있었다는  것이 혐오스럽기 조차 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나는  거의 폭발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
런 가운데 그나마 행사장을 옮기기로 되어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나는 그 
어간을 이용하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조금도 틈을 안 주고 옆에 꼭 붙
어만 있는 아내에게 무슨 핑계든 둘러대고 잠깐 빠질 수 있는 기회는 그때 
뿐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행사장을 옮기기 위해 모두들 백주년 기념관을 나왔을 때 나는 아내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우산을 받쳐들고 그  숲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단비를 맞는 5월의 신록이 그야말로 싱그러웠다. 숲으로 접어들자 그 옛날
의 사연들이 나뭇잎 하나하나에 되살아 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나이 
먹은 나무라 할지라도  해마다 똑같이 여리고 풋내  나는 잎사귀를 피우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나는 웬지 새삼스럽게 여겨졌다. 공연히 눈물이 나는 
듯 했다. ‘그 옛날의 사연들’이 과연 어떤 것인지는 시시콜콜 밝히지 않
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 두 사람에
게만 주어졌던 사연이기 때문이다. 
  주위의 풍경은 꽤 많이 변했으나, 그 참나무는 저만치 위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반가웠다. 나는 허위허위  그리로 올라가서, 미리 염두에 두고 주
어 가지고 온 나뭇가지로 땅을 파헤쳤다.  비 온 뒤의 그 곳 땅은 옛날 유
리병을 묻을 때보다 훨씬 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쯤 파헤쳤을까.
  니뭇가지 끝에 와  닿는 감촉이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것을 들어냈다. 
옛날의 그 유리병, 비록  뚜껑은 삭아서 흐늘거리고 있었지만 틀림없는 그 
유리병, 그 타임캡슐이었다.
  감격스러웠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병 속에 비닐로 싸여  있는 편지를 꺼냈다. 아직도 
기억에 또렷한 그녀의 필체가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학과가 서로 달랐음
에도 불구하고 1학년 때의 필수 과목인 홍순민 교수의 교양불어에서 4학년
의 선택 과목인 진홍섭 교수의  고고학까지 상당히 많은 강의실을 함께 들
락거렸었고, 따라서 시험 때도 당연히 그녀의 노트로 함께 공부를 하곤 했
었다. 그녀의 낯익은 필체를 보자 그녀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다
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것은 ‘변함
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는 문구로 시작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못 오게 될 것 같아 며칠 먼저 왔다 감을 알립니다. 그러
니까 이 편지는  그 옛날 함께 넣었던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리석었던 
지난날의 제 선택을 부디 용서해주세요. 다만, 지금도 또 앞으로도 영원히 
그 잘못을  뉘우치며 멀리서 행복을  빌겠습니다. 사랑했습니다. 사랑합니
다. 사랑할 것입니다. 

  내용은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엔가 홀린 느낌이었다. 편지
에 씌어 있는 그대로 그것은 옛날의 그 타임캡슐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슨 
사정이 있어서 며칠전에 이미 다녀가면서 새로운 편지를 대신 넣어두고 간 
것이었다.
  안타깝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
음을 확인한 것만 해도  나로서는 큰 수확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그때의 
선택, 즉 섣부른 결혼을 나를 향해 뉘우치고 있지 않은가. 비록 이제는 돌
이킬 수 없는 것이긴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 편지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산길을 내려왔다. 멀리서 행복을  빌겠다는 구절이 마음에 걸렸다. 아마도 
그때 나를 떠났던 것에 자책감을 가진 나머지 괴로워하는 것이리라. 
  나는 이제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그녀를 적극적으로 찾아보아야겠다고 다
짐했다. 찾아서 무얼 어떻게 하려는 계획 같은 것은 있을 리 없었다. 그냥 
한번만이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Ⅳ

  학교의 공식 행사가 끝나고 저녁에는 학교 시절의 은사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공식 행사가 문제가 아니라 이 저녁 행사가 
차라리 더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 조우현, 박영식  두 교수를 모셨다. 박영식  교수는 조우현 교수의 
제자로서 25년 전에 우리에게 플라톤과 비트겐슈타인을 가르치던 전임강사
였는데 그동안 총장을 역임하고 물러난 바 있으니, 지난 세월의 엄청난 퇴
적에는 그만 할 말을 잃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어즈버’ 소
리를 지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비교적 가까운 장소라는 이점 때문인지 그곳 다른 방들마다 우
리 말고도 몇개의 학과가  각각 진을 치고 있었다. 의과대학은 플래카드까
지 내걸고 있었고, 신학과와 문헌정보학과 등도 그곳에서 은사를 모신다고 
북적거렸다. 그 가운데 그녀가  졸업한 학과까지 있다는 것은 우연일 것이
었다. 여기서도 나는 그 학과의 명칭만은 밝히지 않기로 하겠다.
  자, 이야기는 여기까지 왔다.
  우리의 은사 두 분은  화제의 꽃을 피워, 북핵 문제에서부터 대학입시문
제다, 정치 문제다, 세태문제다,  게다가 이른바 성희롱 문제까지 여러 방
면으로 견해를 피력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옛날의 강의 시간을 그립게 하고 
있었다. 그런중에 워낙 골초인  나는 식당 밖으로 빠져나와 담배를 한모금 
빨고 다시 들어가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번째 담배를 피우려 밖으로  나왔을 때라고 기억된다. 나는 조금은 낯
익은 얼굴 하나가 엉거주춤 서서 나와 같은 몰골로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그녀와 같은 학과의 동기생이 틀림없었다. 나는 다짜
고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도 나를 보더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는 표
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아는 체도 제대로 하지 않고 대뜸 그녀가 오늘 왜 
안 왔느냐고 마치 원망하듯 물음을 던졌다. 
  나는 그때의 표정을 너무나  또렷이 기억한다. 어리둥절한 듯한 그 표정
은 내게 차라리 괴기스럽기조차  한 것이었다. 그는 멍하니 그러고 있다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걔가 죽은 게 언젠데 
그래, 너 철학과의 글쓰는 친구지? 맞아, 기억나, 연세춘추 문학상에 시를 
써서 가작도 했고 말야, 걔가  죽은 건 벌써 10년도 넘지, 아마, 자살했다
고 그래, 아까운 애였지, 얼굴도 예쁘고 말야...
  그는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나는 황급히, 마치 중요한 
걸 잊어버렸다는 듯 로비  저쪽을 향해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겼다. 밖에는 
여전히 밤비가 내리고 있었고, 비에 젖은 불빛들이 환상 속에서인 듯 어른
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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쩝..힘들다..흐..
이거 마우스로 클릭해서 캡춰하는 방법말구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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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꼼     Postech Under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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