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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enDiary ] in KIDS
글 쓴 이(By): mitmir (   )
날 짜 (Date): 2005년 8월 24일 수요일 오후 11시 01분 13초
제 목(Title): 시간, 그 쓸쓸함에 대하여



내가 처음 학교를 휴학하고 취직한 곳은 그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가는 연구소였다. 처음 들어가게 된 것도 소개였고 잠깐 있을 곳으로 
나쁘지 않은 연봉 때문이었을 것이다. 4개월이면 1년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계산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내부로 곪아터진 팀원들의 균열 속에 끼어 
들게 되어 일보다도 관계에 훨씬 부담감을 느껴야 했던 곳이었다.

그 팀에 학교를 같이 다닌 석사를 졸업한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녀에게 흐르는 
그 강렬한 세기의 아우라는 주위사람들이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나 그 균열된 틈사이에서 그녀는 내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주변 사람을 적과 아군으로 이등분하는 그녀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 나름대로 주변 사람에 대한 애착이 덜한 내게 그리 
부담스러운 존재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녀 덕분에 가기 싫은 피트니스센터에 끌려 다니다시피하여 살도 
많이 뺐고, 그녀의 주장대로 따르는 것이 나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곳을 그만 둔 이후에도 종종 연락을 하고는 했다.

그녀가 내가 그만 둔 이후 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내가 영향을 
미칠 범위도 아니었으며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의 비난에 
적당히 동조하는 것에서 그녀에게 만족을 주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조직 
속에서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은 결국 그 자신이 소외되기 마련이다. 스스로 
그만두기는 했지만, 그녀의 멀리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휴게실에서도 불평이 
많은 여자'라는 소문이었다.

그녀가 찾은 새 직장에서 당연히 나는 연구 혹은 분석을 담당할 줄 알았다. 
원래 공대 출신이기도 하거니와 영어가 딸리기는 했으나 수재라고 부르는 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을지 모르겠다. 그녀와 같이 일을 해보지 않아서 
얼마만큼 능력이 있는지는 잘은 몰랐으나 남들이 가진 편견에 나도 상당히 
동조하고 있었나 보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서울에서 직장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영업'을 하러 
대전에 가끔 내려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올라간 후 그녀를 
만나게 되었을 때 '한 달 후면 보험료가 인상되니 미리 가입하는 것이 
어때?'라고 입사 첫 달에 내게 보험권유를 했다. 나는 집문제도 남아 있었고, 
아직 적응하지 못한 그곳에서 부담이 많아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런데, 몇달이 지나 다시 '언니 만나자'라고 쓰지 않는 블로그에 한 줄 
남겼다. 실시간 알림을 사용하고 있는 그녀가 '언제 만나자는 거야'라는 내 
글에 바로 전화를 했고, 그래서 약속은 정해졌다.

오랜만에 만나 나는 어쨌거나 그녀의 현재 연애담과 이전 회사에서 친했던 
동기들의 섭섭함에 대해 들어주었다. 그런데, 문득 술자리에서 노트북을 꺼내 
내 종신보험료를 계산할 때 느꼈던 그 기분은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보험료를 계산했고, 8만원씩 60세까지 납입하는 상품을 
권유했다. 보장되는 질병에 대해 브로셔를 주거나 e-mail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회사의 방침이 아니라고 말했다.

집에 돌아와 곰곰히 계산해 보니 60세까지 납입한다면 2,880만원을 지불해야 
하며, 내가 60세까지 직장을 가질 수 없다면 보험료 납입 때문에 빵을 훔칠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 아닌가.. 

월요일 아침부터 터진 사건으로 분주했던 내게 전화를 한건 저녁 7시쯤이다. 
전화를 받을 시간이 없어 '나중에 전화할께'라는 말을 하는데 이번주에 
방문해서 나의 사인을 받아야 겠다고 말할 때 나는 가입의사가 0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밤 11시 퇴근을 하고 아직 씻지도 못한 그 시점에, 하루종일 
전화로 시달렸던 내게 그녀는 다시 전화했다.

"언니. 내가 사인 받으러 가려고 했는데.."
"이번주는 회사에서 나갈 시간이 없는데.."
"그래? 나 그쪽에 갈 일 있는데.. 그런데, 언니 내가 지난번 말한 내게 
사랑고백했던 회사 사람말이야."
"응. 그 얍실하게 생긴 놈?"
"그 놈이 기억 안난다는거 있지?"
"원래 그래. 술 먹고 기억 안나는 놈들이 좀 있지. 네 나이에 왜 그런거에 열을 
받고 그래."
"언니~ 나는 키스하면 사귀어야 하는데, 그놈이 나한테 키스했단 말이야."

서른 살된 씩씩한 그녀가 그런 가치관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적지 않게 놀랐으나 대꾸했다.

"(너 왜 그러니. 지금 네가 그런 일에 열받을 나이는 아닌데 뭘 그런거 가지고 
그러나. 정신좀 차려. 그리고 나 지금 전화 끊고 싶은데..)"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잊어. 그런 놈은 네가 열낼 가치도 없어."

"%^$&*^%$%*^$*ㅡ<$*"

그리고 약 10여분간 그녀의 장광설은 또 시작되었다.

나는 정말 쉬고 싶었다. 휴가철에 터진 사태의 수습이 내 담당은 아니었으나 
나는 말단직원이란 말이다. 나좀 제발 쉬게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녀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언니, 그럼 다음주에 가면 되는거야?"
"(미안해. 나 보험 가입 하고 싶지 않아. 특히나 싸인 받으러 온다니.. 내가 뭘 
설명을 들었는데, 난 아직 약관도 읽지 못했고, 그건 점심시간에 간단히 할 
문제가 아닌거 같은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글쎄.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아. 너도 뉴스 보았겠지만.."

아마도 그녀는 다음 주에 한 번 더 전화할 것이다.

내가 만약 거절한다면, 나도 그녀가 험담을 늘어놓았던 다른 사람들의 그룹에 
속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도 변하고, 원래 돈에 대해 밝았던 그녀였지만 그냥 그녀를 
생각하면 쓸쓸하기만 하다.
세상에 타인을 만날 때 진정으로 보고 싶어서 만나는 관계는 얼마나 될까?

어쩌면 모든 사람과의 관계는 필요에 의한 것 뿐일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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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을 피해 춤을 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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