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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enDiary ] in KIDS
글 쓴 이(By): mitmir (   )
날 짜 (Date): 2005년 8월 22일 월요일 오전 01시 51분 29초
제 목(Title): 베르가못향이 들어간 얼그레이티



11시쯤 집에서 나왔다. 휴가기간은 이미 끝나고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며 차 
사이로 끼어들기를 여러 번, 북쪽으로 향하는 등뒤로 내리쬐는 햇볕. 오랜만에 
환하게 높아진 하늘, 달려가지만 자꾸만 달아나는 구름들.. 내 눈은 점점 
흐릿해지는 것 같아 휴게소에 내렸다.

공기는 서늘하다. 숨을 내쉰다. 흐릿해진건 졸음 때문이 아니라 적막한 좁은 
공간 속의 요란한 엔진소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라디오를 켜고 나는 알지도 
못하는 가사를 따라 소리를 내어 본다. 바보스럽다. 

집에 돌아와 밥솥을 열었다. 이미 상해 버린 붉은 빛의 밥알들을 버리고 다시 
쌀을 씻는다. 허기를 때우고 나니 졸음이 눈을 덮는다. 어둠이 내릴 무렵 다시 
일어나 수퍼마켓으로 향한다. 맥주 한 병을 담고, 소고기와 야채들을 담는다. 
부엌칼을 하나 샀다. 쇼핑을 하면서 무기 하나를 들고 있다는 것이 기분이 
좋아졌다. 깜깜한 지하주차장도 두렵지 않다. 돌아와 다시 부지런히 칼질을 
한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올리고 마늘을 넣고, 온갖 양념으로 신선하지 않은 
야채들을 넣은 찌개의 맛은 텁텁하다. 

밥을 먹으며 영화를 본다. 누군가와 극장에서 보았더라면 피식 웃을 법도 한 
장면들이 지나가지만, 나는 무표정하게 화면을 쳐다 본다. 설거지를 할 즈음 
엔드크레딧과 함께 영화 음악이 흐른다. 

먼지가 뽀얗게 내린 홍차통을 열고 한 스푼을 떠내어 커피메이커에 넣는다. 
베르가못향이 들어간 얼그레이홍차의 유통기한은 2005년 9월 17일이다. 아직 반 
통 이상이 남아 있다. 600cc의 물을 넣고 내린 홍차를 음미한다. 진한 향기가 
익숙해져 올 무렵 약간의 현기증을 느낀다. 가득 내린 홍차를 냉장고용 병에 
넣고, 또 한 번 내린다.  

주말은 끝난다. 8월도 이제 2/3가 지났다. 시간은 내 마음을 조금씩 좀먹고, 내 
살들을 조금씩 상하게 한다. 시간의 벌레는 몸 속에서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눈을 감는 그날에는 슬며시 저 깊은 곳에서 하나 둘씩 
기어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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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을 피해 춤을 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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