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usic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lokjh) <z.glue.umd.edu> 날 짜 (Date): 2003년 2월 5일 수요일 오전 05시 14분 34초 제 목(Title): [시사저널] “모차르트는 혁명가였다” "시사저널"에서 퍼 왔습니다. “모차르트는 혁명가였다” 1월27일로 탄생 247주년…정치적 생애 재조명한 글 싸고 논란 불멸의 음악가 모차르트(1726~1791)의 탄생 247주년(1월27일)을 맞는 올해도 변함 없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는 대대적인 기념 축제가 벌어진다. 하지만 정작 모차르트에 대한 이해는 그의 고향에서도 ‘완전한 허구’인 영화 <아마데우스>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아마데우스>가 선풍을 일으키던 해인 1984년,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룬 예사롭지 않은 글 한편이 발표되었다. 독일의 계간 문예지 <이비쿠스> 에 실린 <모차르트와 벤저민 프랭클린>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의 필자 하르트만 크레머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 천재로 만들어졌다. 발표된 지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유럽에서 많은 논란을 빚고 있는 이 글의 내용을 요약했다. 모차르트를 알려면 그를 덮고 있는 신화를 벗겨내야 한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재능을 타고난 천재, 그러나 언제까지나 세상 물정 모르던 소년 같은 공상가. 모차르트는 결코 이런 인물이 아니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 아버지(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 아들은 작곡학에 완전 통달했다’고 썼는데,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모른다. 모차르트가 어린 나이에 음악의 기본 법칙을 알게 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다. 레오폴드는 작곡뿐만 아니라 철학·문학·역사 등 다방면에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해에 그가 펴낸 바이올린 교본은 출간되자마자 바흐의 수제자들로 구성된 ‘북부 독일 학파’에서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았다. 이 교본에는 단순한 연주 기법이 아니라 음악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를 천재로 만든 것은 아버지 레오폴드의 체계적인 교육이다. 모차르트가 작곡에 대한 시야를 넓히게 된 또 다른 계기는 유럽 연주 여행이다. 그는 20년에 걸친 해외 체류 중 정치가들과도 교류했다. 스물두 살 때 미국 혁명의 전략가 벤저민 프랭클린을 파리에서 만났다. 모차르트가 해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오스트리아에는 때마침 개혁의 바람이 몰아쳤다. 1년 전 봉건 왕조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가 죽고 개혁 황제로 알려진 요셉 2세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요셉 2세는 미국 혁명 이념을 본뜬 개혁을 시도했다. 이 때 어린이 노동, 사형 제도, 종교 차별, 검열 등이 모두 폐기되었다. 모차르트는 이때부터 프랭클린과 교류하고 있는 개혁파 모임에 매주 참가하면서 음악 강의를 했다. 음악 교육은 연주회와 오페라 두 가지가 있었다. 연주회는 아무런 지식 없이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창(아리아)에서부터 작곡 법칙까지 알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교향악까지 청중 스스로 감상력을 높일 수 있게끔 조직했다. 모차르트의 작품들 가운데 당시의 사회 개혁 흐름을 무엇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오페라이다. 1781년에 초연된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은 요셉 2세가 같은 해 발표한 이교도 차별 금지 정책을 그대로 반영했다. 프랑스 극작가 보마셰가 만든 희극을 개작한 <피가로의 결혼>은 봉건 권력에 대한 공격을 담고 있다. 보마셰는 이때 프랑스 정부의 특명을 받아 영국 식민 세력과 싸우는 미국에 보낼 군자금을 모으고 있었다. 오페라 <돈 조반니>는 흔히 희대의 탕아 카사노바를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카사노바라는 실제 인물은 베네치아 귀족에게 고용된 밀정이다.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통해 오로지 폭력만 믿는 잔인한 인간상을 내세워 수세에 몰린 과두 세력, 베네치아 귀족의 가면을 벗겼다. 오페라 <마적>에서는 ‘밤의 여왕’과 이집트 사제 ‘자라스트로’ 두 세력이 대결한다. 무대는 온통 이집트 종교 상징물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은 당시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비밀 조직 프리메이슨을 상징한다. 18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된 프리메이슨은 과두제 세력의 비밀 조직으로서 공화파 세력을 뿌리 뽑는 것이 일이었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마적>에서 상징한 프리메이슨은 이들과는 전혀 다르다. 이 조직은 미국 독립을 지원하는 공화파의 집결지였다. 프랭클린을 비롯해서 그와 교류했던 유럽의 지식인들 그리고 모차르트도 공화파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마적> 마지막 장면에서 밤의 여왕은 자라스트로를 악의 세력으로 몰아붙인 음모가 폭로되자 무대에서 사라진다. 반면 자라스트로가 부르는 노래에는 공화파 프리메이슨의 휴머니즘이 담겨 있다. 밤의 여왕이 마리아 테레지아, 자라스트로가 요셉 2세를 지원하는 프리메이슨 수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마적>은 개혁에 저항하는 과두 세력에 대한 선전 포고이기도 하다. <마적> 성공과 모차르트의 죽음 모차르트는 적어도 1788년까지는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그가 말년에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만 고집해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때 모차르트가 직면했던 어려움이란 미국 독립과 관련된 국제 정세 변화였다. 영국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과두 세력에게 미국 독립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영국왕 조지 3세는 말 그대로 이성을 잃었다. 미국 독립과 같은 사태가 유럽 대륙에서 되풀이되면, 유럽 과두 세력은 그야말로 사망 선고를 받게 된다. 그들은 1786년 미국 헌법이 제정된 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유럽 공화파의 숨통을 끊으려고 반격 작전을 벌였다. 프랑스 혁명은 이들의 대역전극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프랑스 혁명은 미국 혁명과는 전혀 딴판이다. 혁명의 마지막에는 공포 정치가 판쳤고, 공화파는 하나하나 단두대에 올랐다. 프랭클린의 동지인 화학자 라브와지에는 ‘혁명에는 과학자가 필요없다’는 말을 들으며 처형당했다. 프랑스 공포 정치의 여파는 오스트리아로 밀려들어 요셉 2세는 개혁 정책을 대부분 포기했다. 모차르트 연주회도 1789년 모두 취소되었다. 그러나 2년 뒤 처음 공연된 <마적>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과두 세력은 또다시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마적>이 초연된 그 해 12월5일 숨을 거두었다. 그에게는 묘비도 없다. 아무도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왜 죽었는지 모른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후원자였던 교육문화 장관 스위텐 남작은 그 다음날 공직에서 물러났다. 모차르트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의 창조적인 정신 세계를 인지할 수 있는 불후의 작품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의 사고를 개발하고 새로운 음악적 천재들을 길러내야 한다. 그것은 모차르트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이다.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번역·요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