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usic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lokjh) <y.glue.umd.edu> 날 짜 (Date): 2003년 1월 8일 수요일 오전 11시 26분 55초 제 목(Title): [문화] “버린 자식 다시 품는 정성으로” "문화일보"에서 퍼 왔습니다. “버린 자식 다시 품는 정성으로” 김승현/hyeon@munhwa.co.kr '아침이슬' 의 작곡가 김민기(52·극단 학전 대표), 그는 참 맑은 사람이다. 실제로 만나면 '저항가수' '민주화의 기수' 등 이미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 있는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투사 이미지는 전혀 찾기 어렵다. 숫기가 좀 부족한 모범생같은 인상에 가끔씩 하회탈 같이 파안대소하는 그를 보면 영락없는 천진한 어린아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군가풍의 일반 운동가요와는 달리 가슴 깊숙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맑은 진정성이 있다. 새해를 맞아 그가 새 작업을 시작했다. 80년대 대학가와 노동운동계를 풍미했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앨범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장의 불빛'은 내 마음의 빚이야. 내 자식인데 낳아 놓기만 하고 마치 고아원에 버린 기분이거든. 이번에 제대로 한번 키워볼꺼야." 3일 오후 서울대학로 극단 학전의 사무실을 찾았다. 문예진흥원에서 김씨의 '공장의 불빛'앨범제작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학전 사무실 안쪽에 마련된 2평 조금 넘는 자신의 방에서 올 3월 홍콩 아트페스티벌에 참가할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무대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에세 "왜 '공장의 불빛' 앨범을 만드느냐"고 묻자 그는 이같이 답했다. 노동현장의 애환을 담은 노래굿 ‘공장의 불빛’은 그가 78년 10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기 꼭 1년전 만들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내내 이 작품에 매달렸어. 그리고 봄에 송창식의 연습실을 빌려 녹음을 했지. 한밤중에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다 담요로 가리고, 환풍기도 옷으로 꼭꼭 틀어막고 작업했어. 마스터 테이프를 두 갠가 만들었던 기억이나. 그리고 복사를 해서 돌리고는 혼자 경기도 전곡에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 모든 책임을 혼자 감당하기 위해서였지.” 그는 이 노래굿 테이프와 관련한 모든 책임을 혼자 지려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의 그 엄혹한 시절, 이 테이프는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이상의 충격을 줄 것이 확실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자기 혼자 모든 것을 했으며, 마스터 테이프는 어디에 숨겨뒀는지 모른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걸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마스터 테이프를 어디다 숨겨뒀는지 모른다. “그 마스터 테이프가 있으면 작업하기가 조금은 편할텐데 도대체 기억이 안나. 내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세게 마인드컨트롤을 걸었는지 ‘공장의 불빛’에 관련된 기억이 파편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아. 그래서 이 작품에 미안한 감도 가장 많지. 아까도 말했지만 무책임하게 자식을 낳고 그냥 고아원에 내버려 둔 기분이거든. 하여튼 이 테이프가 나오는데 가장 고마운 사람은 송창식이지. 자기 작업실에서 만든 것이 밝혀지면 얼마나 큰 고초를 당할지 뻔한데도 빌려줬으니 말이야. 송창식이 없었으면 ‘공장의 불빛’은 그나마 햇빛도 보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는 79년 봄 모든 것을 정리하고 홀로 전곡에 내려가 수도승처럼 땅을 갈았다. 곧 겪을 모진 고생을 이기기 위해 마음밭도 함께 깊이 갈았다. “그런데 잡혀가지 않았어. 박정권이 무너진 뒤 80년초 전두환씨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내가 이 테이프를 만든 사실이 밝혀졌는데, 당시 실세중의 하나인 H씨가 김민기를 잡아들이면 또하나의 김지하를 만든다고 놔두자고 강력히 주장했다고 들었어.” ‘공장의 불빛’은 현재의 노래 분위기에 맞게 편곡중이다. 민요조의 노래를 부를 가수만 하나 선정됐을 뿐 아무것도 잡힌 것이 없다. 올 상반기에 앨범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지만 잘 될지는 의문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작업스타일 때문이다. 이왕하는 김에 스타급 가수들을 기용해 녹음을 하면 앨범 흥행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이 앨범을 누가 돈 주고 사겠어. 그냥 버린 자식 가여워서 매만지는 거야. 거기에 문화사적 의미를 조금 부여해주면 고마울 뿐이지”라고 정색을 하며 대답한다. 하긴 그렇다. 돈을 위해서라면 그가 지금 극단 학전을 운영하고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가만히 앉아 들어오는 인세 수입만으로도 그 자신은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억대씩 빚을 얻어가며 작품을 만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3월 6일부터 8일까지 아시아 최고의 공연예술축제로 평가받는 제31회 홍콩 아트페스티벌에 초청된 ‘지하철 1호선’의 공연을 마치고 다시 원주 토지박물관에 들어갈 예정이다. 지난해처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틀어박혀 공부할 예정이다. ‘지하철 1호선’의 후속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빅3는 학전의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에이콤의 뮤지컬 ‘명성황후’, 공연기획사 PMC의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후속 ‘몽유도원도’와 ‘난타’의 후속 ‘UFO’가 모두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조심스럽다. ‘지하철 1호선’의 후속마저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우리나라 창작 공연예술의 중대한 위기국면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 나야지.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歌舞伎)와 노(能), 분라쿠(文樂)를 무시하면 안돼. 판소리, 마당극 등 우리 전통의 힘도 중요하지만 아시아적 정체성을 갖는 그런 공연양식을 만들어야 세계에 나갈 수 있어. 이게 ‘지하철 1호선’과 함께 베를린, 베이징, 도쿄 등을 순회하면서 얻은 결론이야.” 김승현기자 hyeon@munhw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