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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sbison (M.BISON)
날 짜 (Date): 1993년06월18일(금) 12시12분35초 KST
제 목(Title): 위대한 음악가들 - 헨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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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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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델이 "독일의 베니스"에서 최초로 사귄 사람들중의 하나가 요한 마테손이었다.

헨델보다 네살 위인 이 젊은이는 18세기 만능의 독일의 뛰어난 산물 중의 하나였다.

(바이송...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음.) 그는 이미 아홉 살 때 여러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했고, 열 두 살에는 하프와 더블베이스, 바이올린, 플룻, 오보를 

마스터했다. 열 세살에는 법률 공부를 시작했으며 영어, 불어, 이태리어를 배웠다.

(슈퍼맨 !!) 열 다섯살에는 키일의 오페라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앗다. 열 여덟 

살에는 자신의 오페라를 만들어 냈다. 헨델을 만나게 된 스물 두 살때 그는 함부르크

주재 영국 공사관의 비서관이었고, 몇 개의 오페라와 미사곡, 오라토리오와 

칸타타의 작곽가였으며, 음악과 철학과 과학에 대한 몇몇 책의 저자였다. 그의 

야망은 살아있는 동안 매년 한 권씩의 책을 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야망을

 초과 달성했다. 83세로 죽을 때까지 그가 펴낸 책은 88권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단순한 책벌레나 은둔적인 음악가가 아니었다. 그가 이룬 놀라운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락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햇다. 그는 훌륭한 검객이었고, 

춤에도 뛰어났으며,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 호옹, 바이송의 이상향.)

 마테손과의 우정은 헨델에게 지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면에서도 도움을

주었다. (마따 마따... 싸움을 잘하는 친구는 언제나 든든하다. 여자들을 잘 꼬시는

친구도 아주 아주...... 흐흐.) 마테손은 헨델을 영국 대사인 시릴 윗치경에게 소개

시켜 주었는데, 음악 애호가인 그 영국 대사는 학생을 모아 헨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을 뿐더러, 뒷날 헨델이 영국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헨델과 마테손 두 사람이 선의의 경쟁자로서 그 자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엔 심각한 난관이 가로 놓여 잇었다. 그것은 젊지도 않고 매력적이지도 못한

북스테후데의 딸이었다. 당시의 관습에 따라, 북스테후데는 누구든 자기의 오르간을

이어받는 사람은 자기의 딸도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증말 선의의

경쟁을 했을것이다. 피튀기는 폭탄제거 ......) 마테손과 헨델은 북스테후데의 

생각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바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녀가 수반되는 한

 북스데후데의 오르간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함부르크로 되돌아왔다

(2년 후에 바하도 똑같은 일을 당했고 그역시 바부가 아니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들 두 젊은이는 심하게 다투었다. 이것은 그들의 

선의의 음악적 경쟁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이었다. 사건은 마테손의 오페라

'클레오파트라'의 공연에서 일어났다. 그 오페라에서 마테손은 지휘와 안토니 역을

동시에 맡고 있었다. 그는 무대에 오르지 않아도 욀 때에는 하프시코드 앞에서

지휘를 했고, 무대에 올라 자기 역할을 노래해야 할 때에는 하프시코드의 자리를

헨델에게 맡겼다. (우리의 헨델을 들러리 취급하다니....) 그런데 안토니의 죽는

장면을 끝낸 마테손이 하프시코드로 돌아왔을 때 헨델은 너무도 음악에 골몰한 

나머지 (사실 악도 좀 받쳐 있었을 것이다. 천하의 헨델을....) 자리를 비키려 하지

않았다. 극장을 나오면서 마테손은 헨델을 때렸고, 헨델은 마테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눈에 뵈는게 없었다. 천하의 싸움꾼한테 결투를....) 그들은 많은 사람이

모인 시장터에서 벌였으며 헨델은 단지 운이 좋아서 죽음을 면했다. 마테손은 헨델의

가슴을 자인하게 찔렀는데, 그 칼은 헨델의 외투에 붙은 커다란 쇠단추에 가로막혔

던 것이다.그래서 성미 급한 두 젊은이는� 서로 부둥켜안았고, 헨델의 첫 오페라 

'알미라의 행운'의 리허설 장소로 함께 떠나 버렸다. (바이송은 여기서 커다란 

교훈을 얻었다. 싸움잘하는 친구가 좀 얄미운 짓하더라도 꾹꾹 참아야한다. 헨델과

같은 재수는 항상 생기는� 게 아니다. 친구 한테 개처럼 터지느니 아부하는게 났다.)

 '알미라'가 공연외었을 때 (1705. 1. 8.), 헨델은 채 스무 살도 안 되었다. 이 

오페라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어, 헨델의 두번째 오페라인 '네로' 공연이 

시작될때까지  계속 공연되었다.

 헨델은 이제 오케스트라의 제 2바이올린 주자가 아니었다. 그는 작고과 음악 교습과

극장에서의 하프시코드 연주로 넉넉한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연예가의

들뜬 밤의 생활을 피했고 열심히 일했으며, 돈을 저축했고, 예술적 성취를 향한

길고도 힘든 여정을 끈기 있게 준비했다.

 그러나 중도에 장애가 있었다. 그이ㅡ 경쟁자들이 그의 빠른 성공을 시기했다.

함부르크 오페라단의 라인하르트 카이저는 더 이상 헨델의 작품을 공연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몇 개의 오페라를 직접 작곡하려 했다. 르러나 카니저는 

헨델의 콧대를 꺾으려 애쓰다가 오히려 자신의 코를 다치고 말았다. 그의 음악은

인기를 끌지 못했으며, 관객은 줄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극장의 경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카이저의 후임 감독은 오페라보다는 소극에 더 흥미가 있었고, "심각한 음악은 

관객을 피곤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즐거운 결혼으로 데뷔했다. 그는 썩 달가와

하지 않으며 헨델에게 오페라를 하나 의뢰했다. 헨델이 오페라 '플로린도와 다프네'

를 그에게 제출했을 때 그는 악보를 온통 삭제해서 "쾌락을 즐기는 귀에 맞도록"

고쳐 버렸다. 에제 헨델이 함부르크에 더 머무를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기 

작품이 가득 찬 두개의 상자를 들고 이태리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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