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KoreaUniv ] in KIDS 글 쓴 이(By): chs (외로븐 똘) 날 짜 (Date): 1997년11월07일(금) 09시11분02초 ROK 제 목(Title): [마음101] 노란 작업복 셔츠 그 노란 작업복 셔츠는 긴 소매에다 앞쪽에는 검은 실로 박은 큼지막한 주머니가 네 개나 달려 있었다. 한눈에 반할 만한 멋진 옷은 아니었지만 실용적인 옷인 건 분명했다. 나는 그 옷을 대학 신입생이던 1963년 겨울,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왔다가 발견했다. 집에서 방학을 보내는 여러 즐거움 중 하나는 엄마가 쌓아 놓은 허드렛 물건들을 샅샅이 뒤지는 기회를 갖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뜻밖의 멋진 물건을 발견하는 일 은 드물었다. 엄마는 정기적으로 옷정리를 하셨고, 안 쓰는 살림살이들은 그때그 때 처분하는 성격이셨다. 나머지 물건들은 종이가방에 넣어 현관 입구의 벽장에 넣어 두셨다. 하루는 엄마의 물건들을 뒤지다가 나는 이 큼지막한 노란 셔츠를 발견했다. 세월 이 흘러 색이 약간 바래긴 했지만 아직 충분히 입을 만했다. 나는 생각했다. "미술 수업 시간에 옷 위에다 이것을 걸쳐 입으면 안성마춤이겠는데!" 엄마는 내가 그 옷을 챙기는 걸 보더니 말씀하셨다. "너 그 낡은 옷을 가져 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 옷은 내가 1954년에 네 남동생을 임신했을 때 입었던 거란다." "미술 시간에는 아주 완벽한 옷이에요, 엄마. 아무튼 고마워요!" 나는 엄마가 더 말리기 전에 얼른 셔츠를 여행가방 속에 집어 넣었다. 그렇게 해서 그 노란색 작업복 셔츠는 내 대학 기숙사 옷장의 한 부분을 차지하 게 되었다. 난 그 옷이 너무 맘에 들었다. 대학 시절 내내 그 옷은 나와 함께 있 어 주었다. 어떤 작업을 할 때나 그 옷은 잘 어울렸고 또 편안했기 때문에 다른 옷들을 쉽게 물리쳤다. 졸업 전에 솔기가 헤져 다시 박기는 했어도 그 오래된 옷 은 아직도 몸에 걸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졸업 후 나는 콜로라도 주의 덴버 시로 거처를 옮겼다.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도 나는 그 옷을 입고 짐을 날랐다. 그리고 집안 청소와 빨래를 하는 토요일 아침에 도 그 옷을 입었다. 가슴께에 두 개, 아래쪽에 두 개 달린 네 개의 주머니는 걸레 와 왁스와 광택제들을 넣는 데 아주 제격이었다. 그 이듬해 나는 결혼했다. 임신을 했을 때 나는 그 노란색 작업복 셔츠가 서랍에 처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꺼내 배가 남산만 하던 시절 내내 그 옷을 입고 다녔다. 우리는 콜로라도 주에 살고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일리노이 주에 있었기 때문에 나의 첫 임신 기간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없는 것 이 못내 아쉬었다. 하지만 그 셔츠가 나에게 가족들의 보호와 따뜻한 염려를 기억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엄마가 임신중일 때 그 옷을 입으셨다는 것이 생각 날 때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 옷을 품에 안아 보곤 했다. 1969년 내가 첫딸을 출산했을 때 노란색 셔츠는 적어도 15년 이상된 옷이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나는 팔꿈치를 덧댄 뒤 세탁해서 잘 다렸다. 그런 다음 그것을 종이가방에 포장해서 엄마에게 보냈다.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셔츠 주머니에 이런 편지를 남겼다. "이 옷이 아직도 엄마에게 잘 맞기를 바래요. 엄마가 정말 멋져 보이실 거예요!" 엄마는 내가 보낸 그 '진정한' 선물에 고맙다는 편지를 써 보내시면서 노란색 작 업복 셔츠가 정말 편하고 좋은 옷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 후로는 그 옷에 대해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이듬해 남편과 딸과 나는 덴버 시에서 세인트 루이스로 이사를 했다. 도중에 우리 는 엄마의 집에 들러 몇 가지 가구를 실어 왔다. 며칠 뒤 식탁을 옮기다가 나는 식탁 밑바닥에 노란색 테이프로 큼지막한 봉투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봉투 속 에는 바로 그 셔츠가 들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엄마와 나 사이에 하나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다음 번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셔츠를 엄마와 아버지가 주무시는 침대 밑 매트리 스와 스프링 사이에 몰래 넣어 두었다. 엄마가 그것을 발견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르지만, 거의 두 해가 지나서야 나는 그 옷을 돌려받았다. 이때쯤 우리 가족은 숫자가 불어났다. 이번에는 엄마가 나보다 더 심했다. 엄마는 셔츠를 우리집 거실 램프 밑바침 아래 다 숨겨 놓으셨다. 세 아이의 엄마인 내가 집안 청소와 램프 옮기는 일을 매일 할 수 없으리란 걸 아셨던 것이다. 마침내 셔츠를 찾아냈을 때 나는 그 옷을 입고 동네 자선 바자회에서 싸게 사온 가구들을 수선하고 광 내는 작업을 했다. 그러느라 셔츠에 얼룩이 생겼지만, 얼룩 은 오히려 그 옷에 내력을 더해 주었다. 불행히도 우리의 삶 역시 얼룩으로 가득 차 있다. 내 결혼은 처음부터 거의 실패에 가까운 것이었다. 가정 상담소에서 몇 차례 시도 를 한 끝에 마침내 남편과 나는 1975년에 이혼을 했다. 세 명의 아이들과 나는 일 리노이 주로 이사갈 준비를 했다. 그곳에 가면 적어도 가족과 친구들의 심리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짐을 싸는 동안 깊은 절망감이 나를 압도했다. 나 혼자서 어린 세 아이들을 키워 낼 수 있을지 막막했다. 또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비록 카톨릭 계통의 학교를 졸업한 뒤로 성경을 자주 읽지는 못했지만 나는 마음의 위안을 찾 아 성경책을 꺼내 뒤적였다. 에베소서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갑옷으로 너를 무장하라. 이는 싸움이 끝났을 때 너희가 똑바 로 서 있기 위함이라." 나는 내 자신이 하나님의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을 상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내가 그 얼룩 묻은 노란색 작업복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었다. 그렇다! 그것은 엄마가 입었던 하나님의 사랑의 갑옷이 아니던가! 나는 자 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노란 셔츠가 지난 여러 해 동안 내 삶에 가져다 준 즐거움과 따뜻함을 기억했다. 나는 용기가 새로워졌다. 어쨌든 미래는 두려운 것만은 아니었다. 새 집에 도착해 짐을 풀고 기분이 더 나아지면서 나는 엄마에게 셔츠를 돌려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번 방문했을 때 나는 그것을 엄마 서랍장 맨 밑칸에 잘 개 어서 넣었다. 그 서랍칸에는 철 지난 스웨터들만 들어 있어서 엄마가 금방 열어 볼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내 삶은 눈부시게 진행되었다. 나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좋은 일자 리를 구했으며, 아이들도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다. 일년 뒤 창문을 닦으려다가 나는 노란 셔츠가 청소 도구를 넣어 두는 작은 방의 종이가방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새로운 것이 덧보태져 있었다. 가슴 호주머니 상단에 밝은 초록색으로 '나의 주인은 패티'라고 써 있었다. 나는 물러 나지 않고 내 색실 상자를 들고와 그 뒤에 몇 글자를 덧붙였다. 그래서 이제 셔츠 에는 이렇게 써 있게 되었다. '나의 주인은 패티의 엄마.' 나는 다시 한번 헤진 부분들을 실로 꿰맸다. 그런 다음 내 친한 친구 해롤드의 도 움을 받아 그것을 엄마에게 돌려 주었다. 해롤드는 또다른 친구를 시켜 버지니아 의 앨링턴에서 그 셔츠를 엄마에게 우편으로 부치게 했다. 우리는 소포 꾸러미에 다 엄마에게 선행 표창장을 받게 되었다고 알리는 편지를 동봉했다. 공식적인 상 장으로 보이도록 해롤드가 교감으로 있는 고등학교에서 상장을 인쇄했다. 상장을 수여하는 단체는 '빈곤 퇴치 협회'였다. 이 무렵이 내 인생의 행복한 시기였다. 그 상품 꾸러미를 푸셨을 때 엄마의 얼굴 이 어떠셨을까! 물론 엄마는 그것에 대해 입을 다무셨다. 이듬해 부활 주일날 엄마는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우리집 을 방문하면서 부활절 정장 위에 그 오래된 셔츠를 입으시고 왕처럼 당당한 걸음 걸이로 걸어오셨다. 마치 그 옷이 엄마가 입고 있는 의상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나 한듯이. 나는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활절 식사 도중에 나 는 웃음을 참느라 사레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은연중에 정한 법칙 대로 그 옷에 대해선 절대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셔츠를 벗어 내 집 어딘가에 숨겨 놓으시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우리 집을 떠 나실 때 '나의 주인은 패티의 엄마'를 코트처럼 팔에 얹고 문을 나가셨다. 한 해가 지난 1978년 7월에 해롤드와 나는 결혼을 했다. 우리의 결혼식날 우리는 흔히 있는 짖궂은 장난들을 피하기 위해 친구의 차고에 우리 차를 숨겨 놓았다. 결혼식이 끝난 뒤 남편이 차를 몰고 우리는 위스콘신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도 중에 나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차 안에 있는 쿠션을 끌어당겼다. 그런데 쿠션이 덩어리처럼 뭉쳐 있었다. 그래서 지퍼를 내리고 안을 확인했더니 그 속에 예쁜 종 이로 포장된 선물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해롤드가 나를 놀래켜 주기 위해 숨겨둔 선물인 것으로 생각했다. 하 지만 해롤드 역시 나처럼 놀란 표정이었다. 포장을 뜯어 보니 안에는 새로 다림질 한 노란색 작업복 셔츠가 들어 있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사랑이 필요하고 또 그 사랑에는 유머라는 양 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엄마는 나에게 일깨워 주려고 하셨던 것이다. 셔츠 윗주 머니에는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29절까지의 귀절을 읽으렴. 너희들 둘 다를 사랑한다. 엄마가." 그날 밤 나는 호텔 방에 비치돼 있는 성경책을 펼쳐 그 구절을 찾아냈다. "나는 너희에게 선물을 남기노라. 곧 마음과 가슴의 평화가 그것이니, 내가 너희 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처럼 쉽게 부서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음 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라. 나는 떠나 지만 다시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너희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 지께로 감을 너희는 기뻐하라. 이제 일이 이뤄지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너희가 나를 믿게 하기 위함이라." 그 셔츠는 엄마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엄마는 내 결혼식 3개월 전에 루 게릭 병이라고 알려진 근위축 경화증 진단을 받 으셨다. 그것도 말기였다. 엄마는 13개월 뒤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장 례식날 나는 그 셔츠를 엄마의 무덤에 함께 묻어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 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엄마와 내가 16년 동안 나눴던 사랑으로 가득한 게임의 생생한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큰 딸이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다. 그것도 미술 전공이다. 모든 미술 학 도들은 수업시간에 큰 주머니가 달린 작업복 셔츠가 필요하지 않은가! ------------------------------------------------------------------------------- 사랑에서 또 한가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만이 아는 그들의 사랑의 증표가 생긴다... 다른이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지만... 그들 둘사이에는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바라보는 것만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미소를 짓게 하는...그런 작고 소중한... 아주 작은 것들에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의 의미가 생긴다... 둘만이 알 수 있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리고 둘의 사랑이 끝이라고 느껴질 때 쯤... 그 의미는 또다른 사랑을 시작하여 새로운 의미로 만들어질 수 있다... 자식으로 부모에게 받은 사랑은... 부모가 되어 다시 자신의 자식으로 이어진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은... 영원히 이어져 나갈 수 있는... 사랑을 물려주는 것일 것이다... 그 사랑이 듬뿍 담긴 아주 작은 의미도... 영원히 이어져 나갈 수 있도록... 난 오늘도 밤새 작은 귀걸이 한쪽을 떠올리리라... 내 사랑의 의미를 느끼며...... 억지로가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럽게 누구나에게 만들어진... 작은 사랑의 의미들을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랑의 의미들이 끝없이 이어기도록.......... 오늘의 야그 끄~~~~~읕... 안그래두 긴 글에다가...덧붙인 말이 넘 길어젼네...쩝... 죄송합니다... 가을밤은 역시나.......... (저는 전날 밤에 미리 글을 써놓고 아침에 글거서 올리거덩요...:) 네가 쉴곳이 없어서 못견디게 괴로울때는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나는 거기쯤 있을께 내가 생각하는 거기쯤이 네가 생각하는 거기쯤과 같으면 난 항상 거기쯤 있을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