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KoreaUniv ] in KIDS 글 쓴 이(By): taurus (Siegfried) 날 짜 (Date): 1999년 11월 8일 월요일 오후 05시 37분 51초 제 목(Title): [수필28] 경 주 경주 김태길 팔자를 따라 타고난 두 다리가 유난히 길었다. 이것은 체질이 눈에 띄게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달음박질에 있어서 만은 같은 또래 어린이들을 대략 물리칠 수 있는 조건, 이를테면 만사에 공평 무사한 신의 섭리의 나타남이었다. 그즈음 '보통 학교'라고 불리던 국민학교의 연중 행사에 있어서 가장 컸던 것은 '추계 대운동회'였던 것 같이 기억된다. 대운동회는 대개 시월 말경 혹은 십일월 초순에 있었으나, 학교는 구월에 들어서자마자 벌써 그 준비에 바빴다. 학급마다 각 종목의 연습을 하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가장 관심 깊었던 것은 '백미도보'라고 불리운 단거리 경주였다. 연습 때마다 거의 틀림없이 첫째로 달릴 수 있었던 이 허약하여도 다리가 긴 어린이에게 저 '대운동회'는 하나의 영광의 날로서 고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운동회가 열릴 전날부터 우리 남자 어린이들은 흰 러닝 샤쓰, 검정 팬츠 그리고 홍백의 운동 모자를 쓰고 하루종일 살았다. 그리고 밤에 잘 때는 그것들을 착착 잘 개어서 머리맡에 모셨다. 드디어 운동회가 열리기로 된 날, 천지는 아침 안개로 자욱하였다. "안개가 끼면 비는 오지 않는다." 는 아저씨의 기상학적 설명에 안도와 감사를 느끼면서 아침 숟가락을 든다. " 든든히 먹고 가거라. 왼 종일 뛸 텐데." 외조모의 노파심이 상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괜찮아요. 배도 안 고픈 걸요. " 두어 번 뜨는지 마는지 숟가락을 놓는 어린이들의 마음은 벌써 만국기 휘날리는 운동장으로 달린다.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그 위에 옷을 더 입고 가야 한다." 당목중의 적삼을 내놓으시는 어머니를 '아무것도 모른다'고 단정하면서 동갑의 외사촌과 나는 샤쓰와 팬츠 바람으로 안개 낀 골목길로 용약 바람같이 사라졌다. 골목길을 나서면 꼬불꼬불 전답 사이로 뚫고 풀잎 끝에 아침 이슬 가득 찬 소로가 있으며, 이 소로를 지나면 미루나무 가로수들이 단풍에 시들은 신작로가 나선다. 농민들의 부역으로 주먹 같은 자갈이 빈틈없이 깔린 신작로는 마차 바퀴 지나간 두 줄기 평행선만이 겨우 판판하다. 운동회나 학예회 날 고무신을 신고 가면 틀림없이 잃어버린다는 상급생의 충고가 있었고 운동화나 양복은 '읍내 애들'만이 사용하던 시절인지라, 우리 농촌 아이들은 그저 맨발로 저 자갈길 십리를 아무 불평도 없이 달렸다. 어머니와 아주머니 그리고 형님과 아저씨가 점심 식사를 준비하여 뒤를 따른다는 약속에만 태산 같은 희망을 걸면서. 이 하루 대목장을 노리고 모여든 행상인들, 난 가게들의 "군밤이요!" "홍시가 싸구려"등으로 주변이 자못 소연한 가운데 행사는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되었다. 내 관심의 초점이었던 우리 일 학년 큰반 백미 경주의 차례가 왔을 때는 나의 '일등'을 보기 위하여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이 이미 '부형석' 에 자리잡고 있었다. 상품은 삼등까지 주기로 마련이다. 결승선 부근에는 고등과 학생들이 등수를 표시하는 기를 들고 기다린다. 흰 바탕에 빨간 줄 하나 그은 것이 일등 깃대, 둘 그은 것이 이등깃대, 그리고 셋 그은 것이 삼등 깃대, 자신 만만하게 출발선에 섰다. 그러나 호각 소리를 신호로 내디딘 스타트에 있어서 나는 아차 한걸음 늦었다. 악과 기를 다 써서 선두를 차지하려 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 스스로의 판단으로 볼 때, 분명히 이 등은 차지한 듯하여서 나는 이등 깃대를 잡으려 하였다. 허나 고등과 학생은 거절하고 딴 놈에게다 그것을 준다. 그럼 삼등인가 하고 삼등 깃대를 찾았으나 삼등 깃대도 이미 딴 임자를 만나서 교장석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너무 억울하고 허무하여 그저 울고만 싶은 심정. 이렇게 하여 나의 생후 최초의 경주는 끝났으나, 나의 불평은 집에 돌아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 어떤 애들은 호각도 불기 전에 뛰었는걸 뭐. " 하고 나는 말하였다. 그것보다 더욱 나쁜 것은 기를 맡아 보던 고등과 학생들이라고 욕설을 했다. 이 때 나보다 열한 살이나 위인 형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아니다. 고등과 학생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네가 잘못했다. 너는 흰 석회가루로 그려진 결승선으로 바로 다리지 않고 그 근처에 서 있던 깃대를 보고 달려갔다. 네 말마따나 너는 둘째로 달려갔다. 그러나 결승선에 들어가기 조금 앞에서 깃대를 잡으려고 옆길로 가는 상이에 뒤를 따르던 다른 아이들이 너보다 먼저 결승선을 지나는 것이다. " 이 말을 받아서 엽총장이 아저씨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 깃대를 잡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면 차례대로 깃대는 갖다 주는 사람이 있다. " 나는 물론 이 두 성숙한 사람들의 말이 포함할 수 있는 모든 뜻을 깊이 살피지는 못하였다. 아마 그 말을 던 진 본인들도 별달리 깊은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리라. 여하튼 그 다음해 운동회 때는 시키는 대로 앞만 보고 달렸으며, 그 결과 '상' 자 도장이 뚜렷이 찍힌 공책 세권 ! 저 숙망의 영광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깃대는 안중에 두지 말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라. 기를 가져다 주는 사람은 저절로 생기리라."는 말이 인생 전반에 걸친 교훈이 되 수 있다는 생각은 끝내 염두를 스치지 않았으며, 세월과 함께 경주와 깃대는 그대로 기억권외로 사라지고 말았다. --------------------------------------------------------------------------- ㅣ서점에서 좋은 책을 찾았을 때의 느낌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ㅣ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