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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IST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 <203.237.101.114>
날 짜 (Date): 2003년 3월 11일 화요일 오전 11시 09분 15초
제 목(Title): 연구비 


시계를 잠시 지난해 봄으로 돌려보자. 서울 안암동 고려대 한 강의실. 교수 
몇몇을 비롯, 박사 학위 소지자 20여 명이 모였다. 비장함과 설렘이 교차하는 
얼굴들이다. 박사들에게 월 200만원씩을 1년간 지급하겠다는 학술진흥재단의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한 회의이기 때문이다. 월 200만원이라. 시간 
강사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 

당초 모두 함께 참여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응모하기로 했으나 회의 도중 긴급 
속보가 전해졌다. 다른 연구소에서도 대형에 응모하기로 했는데 그쪽은 
한국학이고 명망도 있기 때문에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 학교에서 두 
개가 되기는 어렵다는 현실론이 대두했다. 약간의 술렁임이 있었고 교수들은 
구수회의에 들어갔다. 

회의를 마친 교수들은 이 모임을 두 개의 중형 프로젝트로 나누어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약 20분 후 회의는 속개됐고 저마다 예측과 
정보를 바탕으로 설전을 펼쳤다. 합의를 못하자 투표에 돌입, 두개로 쪼개는 
것으로 결론났다. 이제 모든 것은 다시 시작이다. 주제도 새로 잡고 서류도 
다시 만들고 인원도 재편성하고. 모든 것이 한 가지 목적, 즉 돈을 따내기 위해 
재편된 것이다. 몇 시간에 걸친 회의도 모자라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전략 
수립에 몰두했다. 

이로부터 얼마 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 독일에서 13년 만에 학위를 받고 
귀국해 시간강사로 5년을 보낸 석원영(가명·44·서양철학 전공) 박사는 비슷한 
처지의 박사들 모임에 앉아 있었다. 

모두 소식을 듣고 있었다. 곧 눈먼 돈이 나온다는 것을. 그런데 이들은 교수의 
간택을 받지 못했다. 프로젝트에는 반드시 교수가 포함돼야 했고 교수가 
박사들을 골랐던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제외된 이들은 학회에서도 응모할 
수 있으니 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물론 대학 연구소가 학회보다 유리하다는 
풍문을 듣고 있었지만 달리 방법은 없었다. 외인부대인 이들은 응모에 
필수요건이라는 연구공간을 급히 확보한 뒤 용감하게 서류를 제출했다. 

결과는 탈락. 들리는 이야기로는 중량감 있는 교수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고 
했다. “에이, 이 참에 전업을 해버려”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웬걸, 가을에 
추가 모집이 있단다. 다시 정보를 수집하고 판세를 분석하고 회의에 회의를 
거듭, 교수를 모셔와 재응모했다. 이번에는 성공. 하지만 찜찜한 일이 생겼다. 
받은 돈 중의 일부를 찬조금으로 내놓았으면 하는 의사를 학회쪽이 전한것이다. 
돈이 부족했던 석박사는 돈을 내놓을 수 없었다. 학회와의 관계가 미묘해졌다. 

지난해 12월 드디어 돈을 받은 석 박사는 원없이 책을 샀다. 원서만 
150만원어치 샀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 잠이 안 왔다. 도서구입비 200만원이 
따로 책정되어 있기에 아무 부담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 달이 지나자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다. 마음이 안정되니 공부할 마음도 절로 
생겼다. 

그런데 공부가 낯설게 느껴진다. 지난 5년간 시간강사로 너무 혹사당한 뒤라 
공부 리듬이 끊긴 것이다. 마침 독일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메일을 
보내왔다. 영국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그동안 쓴 논문을 파일로 
보내왔다. 열어보니 수준 높은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이 즐비했다. 우울했다. 

1월 말쯤. 실사단이 조사를 나왔다. 연구 공간이 제대로 확보되었는지, 영수증 
처리는 깔끔한지 1시간 반 가까이 살폈다. 연구 내용을 검토할 수는 없으므로 
시설과 영수증만 확인한 것이다. 

3월 현재, 석 박사는 1년이 짧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1년 후에는 뭘 먹고 
사나. 강사노릇을 계속 해야 하나. 이 프로젝트를 1년 더 연장할 수 있다고 
하는데 학술진흥재단의 의도에 부합하려면 어떻게 서류를 작성해야 하나. 결국 
또 정보 수집에 나서야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그런데 참, 프로젝트의 주제가 
뭐였지?

철학자 탁석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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