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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guest (          ) <s210-94-107-26.t> 
날 짜 (Date): 2000년 8월  1일 화요일 오전 01시 43분 31초
제 목(Title): [펌]물리와 컴퓨터


물리학과 첨단기술 1999년도 10월호 특집

물리와 컴퓨터 : 지난 50여년 
이 관 수

1930년대 말 컴퓨터가 여러 곳에서 개발되기 시작한지 근 60년이 되었다. 물리는 
초기의 컴퓨터를 개발하고 널리 퍼뜨린 원동력이었고, 다시 컴퓨터는 물리를 하는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때로는 컴퓨터가 아니었으면 하기 어려웠을 발견도 있었다. 
아주 최근에야 기록되기 시작한 이 복잡하고 방대한 역사를 여기서는 간단히 
훑어보기로 한다. 

1930년대
1930년대의 물리학은 대형 계산기와 인연이 없었다. 이 시대의 대형 계산기는 거의 
전부가 펀치카드 계산기였는데, 펀치카드 계산기의 선두주자였던 IBM사가 처음으로 
곱셈이 가능한--- 즉 과학기술 계산에 사용할 만한---모델을 내놓은 것은 
1931년이었다. 그럼에도 펀치카드 계산기를 사용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었다. 
극소수의 예외는, 유사한 계산을 무수히 반복해야했던 소수의 천문학자들이었는데 
이들 중 대표격인 컬럼비아 대학의 에커트(W. J. Eckert, 1902­1971)조차 "곱셈은 
가장 비싼 연산이다. ... 따라서 될 수 있는 한 곱셈을 피할 방도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고할 정도였다. 과학기술자들에게 이는 그렇지 않아도 고가인 
펀치카드 계산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연히 물리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써오던 계산자를 사용하였고, 간혹 연구비에 여유가 있을 때는 곱셈이 
가능한 작은 탁상용 계산기를 사용하였다. 계산자와 달리 탁상용 계산기는 연습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탁상용 계산기로 계산하는 일은 똑똑한 
학부생들에게 훈련 겸 아르바이트 거리로 주어졌다. 유명한 리처드 파인만(R. P. 
Feynman, 1918­1988)도 물리 연구를 처음 접해 본 것도 이런 일거리를 
통해서였다. 


물리학자들 컴퓨터를 고안하다 

 
그림 1. 
  
 
 
그림 2. 아타나소프가 제작하던 계산기(1942년).
  
대형 계산기와 물리학은 거리가 멀었지만, 대형 계산기를 컴퓨터로 변모시킨 
사람들은 물리학자들과 물리 계산 문제를 풀려는 엔지니어들이었다. "컴퓨터"와 
계산기의 차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계 최초로 완성된 전전자식 범용 
계산기 ENIAC을 개발(1942­1946년)한 모클리(John W. Mauchly, 1907­1980)와 
에커트(J. P. Eckert 1919­1995) 외에도 독일의 콘라드 쭈제(Konrad Zuse, 
1910­1995. 1936­45년에 독자적으로 컴퓨터 Z1-Z4 개발)나 미국의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존 아타나소프(J. V. Atanasoff, 1903­1995. 1937­41년에 전전자식 
계산기 개발 시작), 하버드대학의 하워드 아이켄(Howard Aiken, 1900­1973. 
1937­43년에 최초의 범용 초대형 기계식 계산기 Harvard Mark I 개발) 등을 
컴퓨터의 발명자로 거론하는데, 쭈제와 에커트 외에는 모두 물리학자였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1930년대 중반부터 물리 문제를 계산하려다가 알맞은 계산 수단이 
없어 보다 나은 계산 수단 개발에 뛰어들었다. 

항공기 엔지니어였던 쭈제가 1930년대 초부터 기계화하려고 고심했던 문제는 
유체(공기) 내에서 고속으로 이동하는 물체(비행기 날개)의 진동을 기술하는 연립 
미분 방정식 풀이였다. 이는 항공역학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항공역학은 괴팅겐 
대학의 물리학 교수였던 프란틀에 의해 응용물리학에서 분화된지 10여년 밖에 안된 
분야였다. 쭈제는 1936년부터 자신이 구상한 계산기를 자기 집 거실에서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아타나소프는 1930년 위스컨신 대학에서 헬륨의 유전율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는 학위논문을 위해 몇 달씩이나 탁상용 계산기를 돌리면서 
물리연구에 새로운 계산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아타나소프는 
아이오와주립대학으로 부임해간 이후에도 자기의 물리 연구에 필요한 여러가지 
계산장치를 시험해보다가 1937년에 진공관으로 고속 계산기를 만들 수 있음을 
깨닫고 한 대학원생과 함께 제작에 착수하였다. 이 두 사람이 1941년까지 사용한 
비용은 대학에서 지원받은 650 달러에 불과하였다. 
 
그림 3. 로스 알라모스의 IBM 계산기(1945년).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로스 
알라모스에 와서야 처음으로 대형 펀치카드 계산기를 보았다.
  
 
그림 4. ENIAC의 프로그램실(1946년). 이곳에서 로스 알라모스의 물리학자들이 
비밀리에 열핵반응을 계산하였다.
  


하버드 대학 물리학과의 대학원생이었던 아이켄은 진공관의 특성에 관한 
학위논문을 준비하다가 비선형 연립 미분방정식들을 아주 많이 풀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졌다. 1936년 그는 MIT나 컬럼비아 대학의 계산 설비들을 조사한 끝에 
새로운 디지털 계산기를 만들 결심을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켄은 IBM사 
경영진에 접근하여 설득할 수 있었다. IBM사는 명문대학 하버드에 과학연구에 
사용할 설비를 제작·기증한다면 좋은 선전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아이켄이 
응용수학교수로 채용된 하버드대학 공학대학원에 "자동 계산 공장"을 만들어 
주기로 1939년에 결정하였다. 

ENIAC 개발을 제안하고 주도한 모클리는 1932년 존스 홉킨스 대학 물리학과에서 
분자 분광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능하다는 평판이었으나 미국 물리학 
연구의 초점이 분자에서 원자핵으로 넘어가던 참인데다가 대공황이 겹쳐 그는 쉽게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필라델피아 근교의 한 작은 지방 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에 주어진 일은 교양 물리를 가르치는 것 뿐이었고, 연구에 
대한 지원은 도저히 기대할 형편이 아니었다. 모클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직접 
실험을 하지 않아도 연구할 수 있는 주제를 찾다가 기상학에 주목했다. 지구 
곳곳에서 관측된 방대한 기상 관측 자료는 고립된 모클리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많은 관측 자료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계산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모클리는 기상학 연구와 동시에 빠르고 쉬운 계산 
수단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모클리는 1940년 6월 아타나소프를 방문하여 
그가 제작중인 계산기에 대한 설명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자 미육군의 화기 탄도표 계산을 맡은 펜실베니아 대학에 합류하여 에커트를 
만났다. 에커트는 레이더 개발에 참여했던 덕에 진공관에 정통한 엔지니어였다. 
모클리와 에커트는 곧 의기투합하여 1942년 8월에 대형 범용 진공관 계산기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계산기 이름을 ENIAC이라고 정했다. 

이들은 모두 연구에 필요한 도구를 연구자가 직접 개발하는 물리 연구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 쭈제는 자기집 거실에서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아타나소프가 대학에서 지원받은 연구비는 4년간 650달러에 불과하였다. 아이켄은 
결과적으로 IBM사가 거대한 "자동계산공장"을 만들어 주도록 설득할 수 있었지만, 
그가 후원자를 구한 것 자체가 자기가 직접 컴퓨터를 만들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모클리의 노력도 에커트와 함께 ENIAC을 구상할 때까지는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미육군이 ENIAC 개발에 처음 책정된 예산 15만 달러는 
말단 부서의 한 대령이 알아서 결정할 수 있는 규모에 불과한 것이었다. 즉 최초의 
컴퓨터는 무명의 물리학자나 물리 문제를 풀려는 엔지니어가 소규모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핵물리와 컴퓨터의 보급 


"컴퓨터"란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한 계산기 ENIAC은 1945년 가을에 시험 가동에 
들어가 1946년 초 공식 완성되었다. 이미 2차대전이 끝난 다음이라 전쟁 
중에서처럼 화기 탄도표를 서둘러 계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전략적으로 컴퓨터 개발에 막대한 금액을 계속 투자하였다. 컴퓨터의 
대수와 성능 그리고 컴퓨터 사용 가능 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한때 
아이켄이 전세계에 컴퓨터가 두 대가 있으면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는 전개였다. 이 과정에도 물리학자들이 깊숙이 개입하였는데, 
이번에는 출중하고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뛰어들었다. 

1943년 초 미국은 로스 알라모스에 뛰어난 물리학자들을 모아 본격적인 핵폭탄 
개발에 들어갔다. 많은 어려움 중에서도 꽤나 골치 아팠던 문제는 고온ㆍ고압 기체 
내에서 고속 충격파 및 그러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연쇄 핵반응에 대한 계산이었다. 
이런 계산은 실제 핵폭탄을 설계할 때 꼭 필요한 것이었다. 로스 알라모스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1903­1957)을 고문으로 
끌어들였고, 한스 베테(H. Bethe, 1906­),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1908­), 리처드 파인만, 니콜라스 메트로폴리스(N. Metropolis, 1915­)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Born, 1901­1954) 등 쟁쟁한 대가들과 
다음 세대를 이끌 젊은 물리학자들도 투입하였지만, 만족스런 해결책은 나오지 
못했다. 아무리 계산 과정을 단순화·분업화하고 탁상용 계산기 대수를 늘려도 
도저히 주어진 시간 내에 계산을 마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44년에 
IBM사의 대형 펀치카드 계산기를 10대나 들여와서 어느 정도 상황을 개선할 수 
있었다. 이로서 물리학계를 이끄는 쟁쟁한 물리학자들과 후일 "컴퓨터의 
아버지"라고도 불리게 된 폰 노이만이 처음으로 펀치카드 계산기 같은 대형 
계산기를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림 5. IBM사의 STRETCH 컴퓨터.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와의 계약 아래 1956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몬테 카를로 모의실험 코드를 100배 이상 빨리 실행할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달성하지 못했다. 최초의 수퍼 컴퓨터 계획이었는데, 여기서 
개발된 기술들이 1965년 발표된 전설적인 System 360의 기반이 되었다.
 
로스 알라모스에서 계산할 과제는 자꾸 늘어만 갔기 때문에 폰 노이만은 백방으로 
더 빠른 계산기를 찾았지만 별 성과가 없다가 1944년 8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우연히 ENIAC 개발팀 사람이 말을 건 탓에 ENIAC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ENIAC은 중요하지도 유망하지도 않은 프로젝트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형 고속 계산기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절감하고 있던 폰 노이만과 로스 알라모스의 물리학자들은 거의 즉시 
ENIAC 계획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다. 특히 폰 노이만은 ENIAC팀의 구상들을 
완벽하게 정리하여 프로그램 내장형 컴퓨터---오늘날 사용하는 컴퓨터---의 개념을 
내놓았다.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는 1945년 가을 ENIAC의 시험 가동이 가능해지자마자 
메트로폴리스가 이끄는 팀을 펜실베니아대학으로 보내 텔러가 주창하던 열핵폭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계산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계산은 1급 비밀이었기 때문에 
메트로폴리스 팀의 계산은 ENIAC개발팀의 설명과 시범을 보고 ENIAC개발팀을 
내보낸 다음 작업하는 형태로 연말까지 진행되었다. 이리하여 물리학자들이 컴퓨터 
개발과 사용의 노하우를 고스란히 전수 받은 첫 번째 집단이 되었다. 그들이 
핵폭탄 개량은 물론 다른 물리 연구에도 컴퓨터를 적극 활용함에 따라 컴퓨터는 
필수 불가결한 전략 자원으로 인식되어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컴퓨터 발전에 대한 로스 알라모스 출신 물리학자들의 공헌은 광범위하였다. 
한동안 메트로폴리스와 페르미가 ENIAC 상에서 계산해 보았던 원자핵 분열 계산을 
시험삼아 해보는 것이 컴퓨터의 정상 작동 여부를 판가름하는 방법으로 쓰이기도 
했다. 오늘날 프로그램의 구조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흐름도(flow 
chart)---고등학교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도 로스 알라모스에서 1950년대초 
메트로폴리스와 폰 노이만 등이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전후 여러 대학과 
연구소의 컴퓨터 개발 계획은 거의 대부분 로스 알라모스 출신들이 기획하고 
추진하였다. 이 무렵 등장한 컴퓨터 회사들과는 달리 물리학자들의 목적은 물리 
연구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발 과정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공유하여 기술을 빠르게 발전시켰고, 수많은 학생들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컴퓨터 산업이 성숙하는 1950년대 중엽까지 컴퓨터 발전은 핵물리를 
중심으로한 미국 물리학계와 정부가 이끈 것이었다. 


모의실험의 등장 


IBM의 펀치카드 계산기와 ENIAC을 사용해본 경험은 물리를 연구하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내었다. 모의실험(simulation)이 등장한 것이다. 메트로폴리스 팀이 1945년 
가을에 열핵반응 계산을 할 당시 만해도 모의실험을 한다는 뚜렷한 의식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1947년 초 로스 알라모스에서 스타니슬라브 울람(Stanislaw M. 
Ulam, 1909-1984)과 존 폰 노이만이 몬테 카를로 방법을 개발할 때는 이미 자연을 
"흉내낸다(mimic)"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성자들의 확산을 흉내내기 
위해 난수를 사용하였다. 중성자 한 개를 펀치카드 한 장에 일대일 대응시킬 수 
있다는 점도 이 계산이 자연에 좀 더 가까운 것이라는 생각을 강화시켰다. 

이 무렵이면 나선 은하의 운동을 추적한 조지 가모브의 계산이라든지 폰 노이만의 
시험적인 일기 예보 계산 같이 미분방정식의 수치해를 구하는 계산도 등장하였지만 
그것들보다는 몬테 카를로 방법이 자연 현상을 더 잘 흉내낸다는 생각이 널리 
펴졌다. 왜냐하면 가모브의 계산이나 일기 예보는 대상 물리계를 단순화한 
거시적인 모형을 사용하였던 반면, 이 무렵의 모든 몬테 카를로 계산은 입자 하나 
하나를 펀치 카드에 일대일 대응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계산 능력의 한계 때문에 
소수(100개 내지 1000개)의 입자로 이루어진 계에 대해 거친 어림셈을 해보는 
수준이었지만, 확률적인 양자 세계를 난수를 써서 흉내낸다는 착상은 여러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림 6. 1955년에 발표된 한 몬테 카를로 모의실험 결과. 원자량 64인 핵에 
200개의 '양성자'가 투사되는 경우를 계산하였다. J. W. Meadows, Phys. Rev. 98, 
744 (1955).
  
 
그림 7. 중력에 의한 975만개의 입자의 운동에 대한 모의실험(1997년). 모의실험의 
규모와 정교함이 195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였고, 모의실험 결과도 
컴퓨터를 이용하여 시각화하게 되었다. 
출처( http://loki-www.lanl.gov/results/ )
  


1950년까지 행해진 몬테 카를로 계산들---원자폭탄 개량이나 수소폭탄 가능성 
타진을 위한 로스 알라모스의 계산, 원자핵에 쏘아진 중성자의 산란에 대한 마빈 
골드버거(M. Goldberger, 1923­)의 계산, 그리고 우주선 샤워에 대한 로버트 
윌슨의 계산 등---은 확률적 현상의 특성을 좀 더 잘 파악해서 보다 나은 해석적 
이론을 만드는데 도움을 받고자 행해졌다. 이런 계산들은 대개 "수치 
실험(numerical experiment)"이라고 불렸고 오늘날 사용하는 "모의실험"은 
물리학자들이 사용하지 않는 군대 용어였다. 하지만 계산법이 더 정교해지고, 
컴퓨터의 계산 용량이 점차 커지면서 그리고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물리 연구에 
컴퓨터를 이용하는 법을 익힌 세대가 등장하면서 점차 몬테 카를로 계산 자체도 
물리 연구로 여기는 경향이 짙어졌다. 그와 함께 핵물리의 확률적 세계를 넘어 
몬테 카를로 방법의 사용 범위도 넓어졌다. 비확률적 현상을 빨리 계산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1950년대 후반에는 결정의 성장이나 분자 사슬의 
성질 그리고 아이징 모형 등 고체 물리 분야에서도 몬테 카를로 계산 결과들이 
발표되었다. 1960년대 들어 마침내 "모의실험"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모두가 모의실험의 확산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모의실험에 대한 우려는 
종종 단지 모의실험만 한 대학원생에게 물리학 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가라는 
논란이나 모의실험은 기껏해야 자연이 아니라 모델에 관한 연구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1970년대 
들어서면 모의실험이 진짜 실험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았다는 징후가 
도처에서 나타났다. 미국과 유럽의 거대 가속기 연구소들에서 실험 결과와 
모의실험 결과를 비교해서 양자가 부합해야 실험이 성공한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험과 컴퓨터 


1950년대 후반 미국은 전미반자동방공망(SAGE) 건설에 착수하였다. 레이더망과 
방공부대를 컴퓨터로 연결시키는 이 사업은 전 미국의 프로그래머의 2/3가 
거쳐갔다고 할 만큼 거대하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컴퓨터는 다른 기계를 
제어하는 기계로 변모하였다. 오늘날 이 변신의 먼 결과를 가전제품에서 각종 실험 
기기까지 여러 가지 기계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실험장치를 컴퓨터로 제어하게 된 것도 큰 변화를 낳았지만, 정작 컴퓨터 이전의 
실험 물리학자가 가장 놀랄만한 변화는 컴퓨터가 실험 결과를 "읽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미 19세기말이면 실험자가 현상을 자기 눈으로 직접 관찰하지 않고 사진 
건판이나 전압계·전류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관찰하는 경우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사진이나 전기 장치들은 현상을 충실하고 투명하게 기록하거나 변환하는 장치로 
여겨졌지 실험 결과에 어떤 판단을 내린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또한 어떤 결과가 
의미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철저히 실험가의 몫이었다. 

이런 상황은 1954년 거품상자가 발명되면서 급격하게 바뀌게 되었다. 이미 
1920년대부터 각종 입자 물리 실험 장치들이 사진을 수백 장씩 쏟아내었지만, 
거품상자는 차원이 달랐다. 버클리대학의 루이 알바레즈(Luis W. Alvarez, 
1911­1988)가 경고하였듯이 거품상자는 불과 하루만에 한 무리의 물리학자들이 
일년 내내 바쁘게 분석해야할 만큼 엄청난 양의 사진을 쏟아 내었다. 
 
그림 8. CERN이 1965-68년 사이에 건설한 거품상자 Gargamelle.
  
 
그림 9. CERN의 자기 테이프 보관소. 거품상자에서 찍은 사진은 컴퓨터에 의해 
수치화되어 이곳에 보관된다.
  


사이클로트론의 원산지인 버클리에서는 사진 분석 과정을 판단과 지시를 담당한 
물리학자와 물리학자의 지시를 따르는 여성 인력이 교대로 작업하는 형태로 
분업화하였다. 반면에 버클리와 경쟁 관계에 있던 유럽의 CERN에서는 루 
코와스키(Lew Kowarski, 1936­1973)의 주도 아래 1960년부터 사진 분석 과정을 
철저히 자동화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거품상자에서 나온 필름을 인화해서 광전판 
위에 놓고 2 미크론 단위로 빛을 쪼이면서 광전판의 전류를 측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10초만에 필름 한 장에 나타난 여러 입자들의 궤적을 전부 수치로 바꿀 수 
있었다. 

반자동화된 알바레즈 방식에서는 물리학자가 자기 눈으로 직접 궤적을 확인하고 
어느 궤적이 흥미있는 것인지를 직접 판단하였지만 코와스키 방식에서는 컴퓨터가 
입력된 수치들을 이용하여 궤적이 있는지 또 어떤 궤적이 의미가 있는지를 
계산하였다. 자연히 CERN에서는 물리학자들이 궤적 인식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하였다. 즉 한쪽은 물리학자가 주체적인 판단을 중시한 반면, 다른 쪽은 
기계적인 계산을 통해 걸러낸 결과만이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두 입장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1964년 독일의 칼스루에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코와스키가 자신들의 방식을 
설명했을 때 충격과 비판이 섞인 반응이 나왔다. 컴퓨터에 익숙해진 전후 세대의 
물리학자들에게도 코와스키의 방식은 너무나 급진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물리학은 
물리학자들이 예견하지 못했던 결과들을 발견해왔기 때문에 발전해왔는데, 어떻게 
미리 정해진 절차에 따라 판단하는 컴퓨터가 예견되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만일 코와스키가 주창한 방식을 따른다면 앞으로 새로운 실험이란 것이 
이미 저장된 수치값을 새로운 알고리즘으로 분석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지 
않겠는가? 미리 정해놓은 틀을 통과한 결과만 본다면 실험을 통해 무엇을 새롭게 
배울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코와스키는 자신들의 방식이 아니면 일년에 수백만 
수천 만장씩 나오는 사진을 도저히 분석할 수 없고, 컴퓨터가 물리학자가 유심히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진의 양도 몇 만장에 달하며, 결국은 모든 
고에너지 물리 연구는 이렇게 자동화된 시스템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코와스키의 극단적인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대세는 그가 예견한 
방향으로 흘렀다. 1960년대의 컴퓨터는 예산이 많은 가속기 연구소들에서나 
사용하는 대형 컴퓨터가 대표하였지만 1970년대 들어 미니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실험결과를 컴퓨터로 처리하는 것은 대학의 작은 
과에서도 가능한 일이 되었다. 1971년에 등장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점차 컴퓨터로 
제어하는 실험장치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하였다. 1980년대의 PC혁명은 
컴퓨터의 이미지를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공공시설에서 개인이 마음대로 
활용하는 도구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하여 이제는 컴퓨터로 처리된 실험 결과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사라졌다. 1960년대의 대형 컴퓨터의 계산이 
물리학자의 판단을 대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면 지금은 컴퓨터를 통해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컴퓨터로 통해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의외의 발견들 


코와스키 반대자들의 생각과 달리 미리 정해진 규칙을 따라 난수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계산할지라도 컴퓨터는 1950년대 초반부터 예견하지 못했던 결과들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그림 10. 페르미가 MANIC을 기계어로 프로그램하면서 작성한 흐름도(1953년 경).
 
1953년 페르미는 로스 알라모스를 방문해서 울람과 존 파스타로부터 그 전 해에 
완성된 MANIAC을 프로그램하는 방법을 배웠다. 폰 노이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 
컴퓨터는 당시로서는 최신형이었다. 페르미가 시험삼아 짠 프로그램은 양쪽 끝이 
고정된 현의 진동을 계산해보는 것이었다. 그는 현에 작지만 비선형인 힘이 추가로 
작용한다면 파형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복잡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는 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계산 값이 예상대로 나오기 시작하자 안심한 페르미와 
울람, 파스타는 커피를 마시며 환담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프로그램을 
정지시키는 것을 깜빡 잊었음을 깨닫고 다시 살펴보았을 때 놀랍게도 파형이 처음 
상태와 아주 비슷해졌음을 보았다. 초보 프로그래머인 페르미가 무언가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코딩하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의 머리글자를 따서 FPU 
문제라고 불리는 이 계산은 컴퓨터가 직관을 뒤집는 결과를 내놓은 첫 번째 
사례였고 비선형 역학계에 대한 컴퓨터 연구의 효시가 되었다. 
유명한 또 다른 사례가 1961년 MIT에서 나왔다. 기상학자인 에드워드 
로렌즈(Edward Lorenz 1917­)는 그 전해부터 기상 변화 모형을 만들어 다양한 
초기 조건을 주며 계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한번 계산해본 결과를 
다시 반복해보기로 하였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초기 조건을 다시 입력하지 않고 
프린트된 중간 결과를 넣었다. 한 시간 후 돌아와 보니 출력된 결과는 처음 계산 
결과와 전혀 달랐다. 원인은 그가 종이를 절약하기 위해 컴퓨터가 사용하는 
여섯자리 숫자를 세자리로 출력했고 두 번째 계산할 때 원래의 여섯자리 숫자 대신 
프린트된 세자리 숫자를 입력한 탓이었다. 그래도 두 값의 차이는 0.03 % 남짓에 
불과하였다. 상식적인 판단대로라면 이렇게 작은 차이가 그렇게 엄청난 차이를 
낳을 리 없었다. 로렌즈는 복잡한 수식을 사용했기 때문인가 하고 수식을 간단히 
바꾸어가며 살펴보았는데, 비현실적일 정도로 단순한 수식에서도 초기 조건이 
약간만 달라도 완연히 다른 계산 결과가 나오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는 
원인의 조그마한 차이는 결과의 조그마한 차이를 낳을 것이라는 호이겐스 이래의 
일반적인 믿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럼에도 로렌즈의 연구는 
기상학 저널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1960년대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1970년대 
중엽이 되어서야 재발견되어 카오스 이론이란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거미줄 


1954년 유럽 12개국의 공동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소로 출범한 CERN은 처음부터 
거미줄 같았다. 상당히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구성된 미국의 가속기 연구소들과 
달리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CERN은 각 참여 국가들의 연구 자율성이 상당히 
인정되었다. 그래서 연구조직도 상대적으로 분산되어 구성되었다. 또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더 뚜렷이 구별하는 유럽의 문화 때문에 두 집단은 서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들은 가속기를 중심으로 연결되었는데, 가속기 또한 
거미줄 같은 배선에 얽혀 있었다. 더 큰 가속기가 추가로 건설되고 기존 가속기의 
여러 부분이 여기 저기 교체되면서 이런 복잡성은 계속 심화되었다. 1980년대 들어 
급증한 컴퓨터와 컴퓨터 통신망도 복잡성을 더했다. 부서마다 각기 다른 기종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채택하는 통신 프로토콜도 달랐다. 어떤 부서는 아예 독자 
프로토콜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다행히 1985년부터 점차 인터넷 프로토콜인 
TCP/IP가 주도적인 프로토콜로 자리잡았지만 느슨하게 구성된 채로 점점 더 
거대해지는 조직 내에서 정보를 효과적으로 나눌 필요성은 절실해지기만 하고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3월에 제출된 한 제안서는 CERN의 상황을 느슨하게 구성된 
조직의 구성원이 계속 바뀌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따르면 
구성원이 CERN에 2년정도 머무는 것이 보통인데, CERN의 조직과 설비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제안되거나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거나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계속 바뀌었다. 더욱이 실험이나 검출기를 바꿀 필요성은 대개 한 그룹 
안에서 제기되는데, 그 때마다 어떤 분야 또는 누가 그 변화의 영향을 받을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누가 이 프로그램을 짰는가? 이 프로젝트에는 어떤 
연구실이 관계하는가? 이 장치는 어떤 시스템과 관련이 있는가 ? 등등의 정보를 
질서 정연하게 수집하고 배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이 제안서가 
제시한 방안은 바로 웹이었고 1991년 처음으로 구현되었다. 같은 해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구현된 고퍼와 웹은 둘 다 키워드에 기반한 하이퍼텍스트 체계였다. 
그러나 고퍼는 정돈된 위계 질서를 가진 체계인 반면 웹은 거미줄 같이 위계 없이 
연결된 체계였다. 웹은 곧 스탠포드 선형 가속기 센터를 필두로 유럽과 미국의 
가속기 연구소들로 퍼져 나갔다. 고에너지 물리학계는 일찍부터 국경을 초월하여 
문화와 관습을 공유하였기 때문에 다른 가속기 연구소들에게도 웹은 알맞은 
도구였다. 그러다가 최초의 1993년 그래픽 웹 브라우저인 모자익이 등장하면서 
웹은 연구소와 대학을 넘어 폭발적으로 팽창하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 곳곳을 
변화시키고 있다. 


도약 


1981년 파인만은 MIT에서 열린 계산 물리 학회에 초청받고 자신이 무엇을 발표할지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2차대전 중 로스 알라모스에서 계산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계산기의 가능성을 경험하였지만 전후의 컴퓨터 발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물리와 컴퓨터의 관계에 대해 숙고한 것은 근 40년만의 
일이었다. 

파인만의 발표는 컴퓨터 모의실험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가 
보기에 모의실험은 대부분 양자계를 대상으로 삼지만 컴퓨터는 원칙적으로 
고전역학적 기계였다. 그래서 모의실험은 결국 양자역학적 상태변화를 고전적인 
방식으로 기술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때 필요한 정보의 양은 시간에 따라 
지수함수적으로 늘어났다. 예를 들어 10초 동안의 양자역학적 변화를 계산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1초 동안의 변화를 계산하는데 걸리는 시간의 열 제곱 정도로 
늘어난다. 파인만은 이 문제를 골칫거리로만 여기지 않고 상황을 뒤집어 보았다. 
그는 모의실험의 목적이 실제 실험과 같은 결과를 계산해 내는 것이라면 실제 
실험을 양자계에 대한 고속 계산과 마찬가지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파인만의 발상은 3년 후 옥스퍼드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도이치(David Deutsch)의 
논문으로 이어졌다. 그는 보편적 양자 컴퓨터를 기술하고 현재 모든 컴퓨터의 
이론적 모형인 튜링 기계가 보편적 양자 컴퓨터의 고전역학적 대응물임을 
지적하였다. 이 논문은 양자 계산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 올렸고, 1994년에는 
벨연구소의 피터 쇼어(Peter Shor)가 양자 컴퓨터를 이용한 인수분해 알고리듬을 
발표하였다. 오늘날 사용되는 컴퓨터 보안용 암호화 체계는 모두 숫자가 커질수록 
인수분해에 걸리는 시간이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점에 기초하고있다. 그런데 
쇼어의 알고리듬을 이용할 수 있다면 큰 숫자를 아주 빨리 인수분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기존의 컴퓨터 보안 체계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중대한 
발견이었다. 이런 놀라운 결과가 물리학자들의 이론적 연구로 간주되었던 분야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컴퓨터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을 배우기 시작하고 또 물리학자들이 
물리학자로서 컴퓨터 연구에 대거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림 11. NEC가 1999년 4월 28일 발표한 양자 컴퓨터 소자의 구조도. 쿠퍼쌍 
위에서 움직이는 전자들이 한 양자 비트를 이룬다.
 
자연히 양자 컴퓨터를 실제로 만들어 보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초기의 시도는 진공 
중에서 자기장으로 이온을 가두고 극저온으로 냉각시켜 몇 양자 비트 규모의 양자 
컴퓨터를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실험들은 양자 컴퓨터를 구현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함을 증명했지만 동시에 양자 컴퓨터의 실용화는 요원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런 실험들을 근거로 도이치는 100년 후쯤이면 양자 컴퓨터가 
실용화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8년 5월 로스 
알라모스의 아이삭 추앙(Issac Chuang)이 이끄는 팀이 상온에서 클로로포름 액과 
NMR 기술을 이용하여 양자 컴퓨터를 만들었다고 발표하였다. 단지 2 양자 비트 
규모였지만 그들은 실제로 데이터를 입력하고 계산 결과를 읽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올해 4월 일본의 NEC사는 한 양자 비트 역할을 하는 고체 
소자를 개발하였다고 발표하였다. NEC는 이 기술 덕분에 10년 안에 양자 컴퓨터가 
실용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들의 공언대로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1990년대 전반의 예상보다는 훨씬 빨리 양자 컴퓨터가 실용화될 것이다. 

50여년 전에 계산기와 그 사용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처럼 1990년대 들어와서 
컴퓨터와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식에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50여년 동안의 
변화보다 더 거센 변화가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는 물리를 통해 
얻은 통찰과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관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물리학과 컴퓨터의 역사에 관한 연구로 박사과정을 이 수 중이다. 
(kslee@plaza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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