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Japan ] in KIDS 글 쓴 이(By): pkp (~~~pkp~~~) 날 짜 (Date): 1999년 10월 3일 일요일 오후 11시 56분 36초 제 목(Title): 소니 공동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 타계 (도쿄=연합뉴스) 이홍기 특파원 = 일본의 전후 경제부흥의 상징적 인물로 오늘날의 소니왕국을 건설한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소니 명예회장이 3일 폐렴으로 입원중인 도쿄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78세. 모리타 회장은 탁월한 국제감각과 선견지명을 가진 경영자로 지난 46년 도쿄의 뒷골목에서 고(故) 이부카 마사루(井深大)씨와 함께 도쿄통신공업사를 설립, 세계적인 가전.음향 그룹으로 키웠다. 나고야(名古屋) 출신으로 오사카(大阪)대 이학부를 졸업한 그는 창업 당시 '큰 회사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해 기술의 힘으로 조국의 부흥에 이바지한다'는 설립 취지서를 발표,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12년후 소니로 개명한 회사는 테이프 레코더와 세계 최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비롯, 컬러 TV, 워크맨 등 독창적인 제품을 잇따라 내놓으며 뛰어난 대외 마켓팅력을 발판으로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모리타 회장은 소니의 재정과 영업활동을 총괄했으며 초창기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TV 수상기 수출을 위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공격적인 시장개척을 최선봉에서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미 3대 방송사의 하나인 CBS와 제휴, 음악분야에도 진출하는 등 사업의 다각화에 노력을 기울인 그는 지난 71년 사장에 취임했으며, 76년부터는 회장으로 활약했 다. 미일 양국의 유력인사들로 구성된 미일현인(賢人)회의의 일원으로 헨리 키신저 전 미국무장관 등과도 두터운 교분을 유지, 양국간 무역마찰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막후 조정에도 힘썼다. 일본의 보수논객으로 현 도쿄도 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씨와 함께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공저, '미국은 10분 앞밖에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해 미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지난 86년부터 92년까지 게이단렌(經團連) 부회장으로도 활약했으며, 93년에 뇌출혈로 쓰러진 뒤 94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으며, 그동안 하와이 등지에서 요양을 해왔다. 소니를 공동 창업, 주로 기술부문을 담당해온 이부카씨는 97년 12월 89세로 사망했다. aad52640@pop01.odn.ne.jp(끝) 1999/10/03 14:27 송고 * * * * * < 인물 > 타계한 모리타 아키오 소니 명예회장 (도쿄=연합뉴스) 이홍기 특파원 = 3일 타계한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소니 명예회장은 `메이드 인 저팬(Made In Japan)'을 세계속의 상품으로 끌어올리며 전후 일본의 경제부흥을 주도해온 대표적인 경영자. 탁월한 국제감각과 선견지명을 바탕으로 일본의 패전 이듬해인 46년 설립한 조그만 전파상이 오늘의 소니 왕국으로 발전할 때까지 `글로벌 스탠더드(국제표준)'를앞장서 실천해온 기업가로도 알려져 있다. 공동 설립자인 고(故) 이부카 마사루(井深大)씨가 기술부문을 맡는 동안 모리타씨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시장개척에 전념해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소니(SONY)'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웠다. 미국 생활중 '미국에서 팔리는 것은 세계에서도 팔린다'는 확신에 따라 서툰 영어에도 불구하고 직접 판매점을 도는 등 발로 뛰며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판 일화는 유명하다. 나고야(名古屋)에서 300년 넘게 양조장을 경영해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대단한 음악 애호가로 축음기에 몰두한 것이 계기가 돼 대학도 오사카(大阪)대 이학부에 진학했다. 전시중 해군의 위탁학생으로 선발돼 군사용 과학기술을 연구하던 중 한 연구모임에서 기술자인 이부카씨와 만나 의기투합한 것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는 훗날 '그때 아무일도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15대째 가업을 이어 양조장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라고 술회한 적도 있다. 전후 일본에 테이프 레코더를 보급시켰으며, 세계 최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내놓아 세계속의 기술력을 인정받기 시작한데 이어 워크맨으로 세계 청소년 문화를 바꿔놓기도 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무장관 등 미국내 유력인사들과 두터운 교분을 갖고 있어 일제의 급속한 해외 진출로 미일 양국간의 무역마찰이 불거졌을 때는 양국간의 막후 채널로 조정역을 맡았다. 현 도쿄도 지사로 일본의 대표적 보수 논객인 이시하라 신타로씨와 함께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공저, '미국은 10분 앞밖에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해 미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경쟁력의 원천은 제품의 매력에 있다'는 철학을 갖고 있는 그는 일본 기업가들이 저가를 무기로 한 시장 점유율 제1주의로 치닫고 있는 일본식 경영의 혁신을 역설해왔다. 55세에 테니스를 배우고 60세에 스키를 시작할 정도로 젊음을 잃지않았으나 지난 93년 테니스를 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요양에 전념해왔다. 게이단렌(經團連)회장이 유력시되던 시기였다. 일본 재계에서는 국제화를 위한 자기책임과 불굴의 도전정신을 몸으로 실천해온 그의 타계에 대해 '21세기를 앞두고 모리타 회장과 같은 국제인을 잃었다'며 큰 충격을 표시하고 있다. aad52640@pop01.odn.ne.jp(끝) 1999/10/03 16:01 송고 ~~~~~~~~~~pkp~~~~~~~~~~~~~~~~~~~~~~~~~~~~~~~~~~~~~~~~~~~~~~~pkp~~~~~~~~~~~~ ^_^ 키즈의 아저씨 pkp palindrome ^L^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