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9년 7월 6일 화요일 오전 04시 27분 46초 제 목(Title): 한국일보/한글전용의 개조 번호 : 45/253 입력일 : 99/07/05 18:16:44 자료량 :37줄 제목 : [지평선] 한글전용의 개조 자료원 : 한국일보 국가보훈처는 7월의 독립운동가로 한글학자 주시경(1876~1914)선생을 선 정해 갖가지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한글을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시대에 한글연구와 보급운동에 일생을 바친 선구자의 공로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 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독립신문 회계겸 교보원으로 일하던 1896년 5월 그가 조직한 국문동식회는 뒷날 한글학회의 초석이 되었고, 최초의 국어문 법 교본인 「대한국어문법」은 나라글을 널리 씨뿌린 국민교과서였다. ■그러나 그가 한글전용과 띄어쓰기 실천의 개조(開祖)였다는 보훈처의 발 표에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 보훈처 보도자료에는 그가 1896년 4월 7일 독 립신문 창간에 참여하면서 자주적으로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실천한 것으 로 돼 있는데, 일부 국어학자들은 이 통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기문 전 서울대 교수는 독립신문이 서재필박사 주도로 창간됐고, 최초의 한글전용 공문서인 창간호 사설을 쓴 사람도 서박사였다고 주장한다. ■독립신문 창간사설은 50% 이상이 한글전용과 띄어쓰기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 한글전용의 이유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 띄어씌기의 필요성이다. 주시경선생은 독립신문 창간 보름 전 서박사를 처음 만났고, 당시 그는 배재학당 학생 신분으로 사설의 내용과 형식에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창간사설이 서재필박사 작품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이교수의 주장이다. ■이교수는 뒷날 주시경선생 저서의 내용을 이런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 1906년에 나온 대한국어문법 서문이 국한문혼용이었고 1914년에 나온 저 서에도 띄어쓰기가 제대로 돼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립신문에는 광 고까지도 철저히 한글 뿐이었음을 들어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는 서박사의 확고한 철학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 일부 국어학자의 소수의 견일 뿐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국학의 뿌리를 밝히는 본격적인 연구가 있 기를 기대한다.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