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14일 월요일 오전 08시 12분 57초 제 목(Title): 퍼온글/김영옥 한국인들은 외국어중독증? [73] 제목 : [김영옥의 서울 스케치③] 한국인들은 '외국어 중독증?' 중국에서 들풀처럼 살아온 조선족들은 1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 언어를 보존해 왔다. 그것은 또 오늘을 사는 조선족들을 지탱하는 자긍심이자 힘이 돼왔다. 그러 나 그러한 자존심은 중국이라는 타지가 아닌 고국에서 오히려 뭉개졌다. 국제화 시 대, 외국어 바람이 분 한국이라지만 실생활에서 저질러지는 외국어 남용은 아무래 도 ‘이상한’ 풍경이다. 지식인들은 물론 기업인, 주부 심지어 시골 촌부의 입에 서도 낯선 외국말들이 거침없이 튀어나온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自己卑下인가, 아 니면 일시적인 시대 流行인가. ----------------------- 중국에 사는 2백만 조선족들이 한결같이 조상에게 고마워하고 감격해 하는 것이 있 다면 바로 세종대왕과 그가 만들어 낸 한글일 것이다. 우리 문자를 1백년 넘게 간 직하고 지키면서 살아온 조선족을 보면 더 이상 거창한 말이 필요없는 정도다. 그 들이 얼마나 한글을 자랑스러워하고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보여 주는 말이다. 중국 조선족자치주인 옌볜에 가 보면 그러한 느낌은 더욱 또렷해진다. 간판마다 윗 줄에 한글이 적혀 있고 아래쪽에 한자가 있다. 이곳을 찾았던 한국인들은 새삼 “ 중국 속에 마치 작은 한국이 있는 것 같았다”며 뿌듯한 감동을 전한다. 우선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조선족 스스로 오랜 세월의 풍파와 12억명이라는 거대한 대륙인구 속에서 부대끼면서도 우리 민 족과 언어에 끈질기게 애착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조선족의 자긍심을 허물어뜨린 것은 뜻밖에 그토록 간절하게 그리던 고국의 현실체험이었다. 한국을 다녀갔거나, 한국인을 만나 본 조선족들이 털어놓 는 말들은 한결같다. “한국인들은 우리가 타국에서 그토록 몸부림치며 지켜온 한글을 왜 이렇게 비천하 게 대하는가.” 2년 전 운 좋게 학생대표 자격을 얻어 서울로 수학여행을 다녀간 어린 조선족 중학 생의 입에서도 똑같은 푸념이 터져나왔다. “한국에 가 보니 한글이 그렇게 값이 없더군요. 그럴 바에야 중국에서 한글은 배 워 무슨 전망이 있습니까. 대학입시 경쟁에서 세가지 언어(한글·중국어·외국어) 를 모두 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중국사회에서 출세하려면 오히려 어려서부터 중국어·영어를 먼저 배우는 게 나은 것 아닙니까?” 평소 자식에게 민족언어를 극성스럽게 교육시켜왔던 그 학생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고 했다. 한국에 갈 때까지만 해도 한국과 한 글에 대한 자긍심이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아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그는 “아들의 정신적 갈등을 진정시키느라 고생했다”고 털어 놓았다. 한국인들의 거리낌없는 영어 사용, 거리에 넘치는 영어 간판 앞에서 ‘이방인’이 기 이전에 민족적 자긍심을 품어온 조선족 동포들로서는 이해 못할 곤혹스러움에 시달린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현상이 한국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화·국제화를 위한 표징 인가. 또 조선족들은 그런 ‘숭고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 촌스럽게 ‘딴지 ’를 걸고 있는 것인가. 아시다시피 중국에는 한국에 비해 문맹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반면 국어인 중국어 는 물론 영어를 잘 구사하는 중국인들도 엄청나게 많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영 어를 미국인 뺨칠 정도로 잘한다 해도 그들 입에서 중국어와 영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들어볼 수 없다. 미국 등에서 공부하고 온 유학파 젊은이들에서도 예외가 없 다. 중국인들이 일상에서 영어와 모국어를 혼용하는 것을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만 큼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우선 양쪽 국민의 의식 차이를 논하기에 앞서 국가적인 노력부터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중국에서는 무엇보다 언어·문자를 엄하게 관리하는 위원회가 조직돼 큰 효 력을 발휘한다. 중국에서는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할 외래어가 있으면 위로부터 중국말로 적합한 뜻을 찾아내고 통일된 말을 만들어 낸다. 텔레비전·컴퓨터 등 보편적인 명사라 해도 어김없이 電視(텔레비전)·電腦(컴퓨터 ) 등 중국말로 완전히 토착화해 버린다. 형상적으로 표현한다면 남의 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삼키고 소화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시골 촌부 입에서 영어가 튀어나올 줄이야…” 한국에서 통용되는 ‘스튜어디스’란 말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는 스 튜어디스를 ‘공중소저’(空中小姐)란 고유어로 만들어 냈다. 조선족들도 그에 상 응해 스튜어디스를 ‘공중아가씨’로 부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노력들이 한 국과 비교해 볼 때 백번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는 아직도 비행기를 탈 때 습관적으로 스튜어디스를 공중아가씨로 표현한다. 그 때 곁에 한국인이 있으면 그들은 십중팔구 ‘푸하-’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 다. 그러나 나는 민망한 체험을 겪고 지내면서도 마음 속에는 늘상 한국인들이 스 스로 한글을 지키고 갈고 닦아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언어 사용에서 해외동포들, 특히 중국 조선족들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을 흔히 저지른다. 자기 언어·문자에 벅찬 자긍심을 안고 오 랜 세월을 인내해 온 조선족들에게 그런 수모는 가혹하다고 할 지경이다. 그 언어·문자의 본거지에서는 한국말이 뒤죽박죽 몸살을 앓게 하면서도 말이다. 그것이 한국인들의 의식이 세계화·국제화라는 화려한 간판에 가려서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 그런데 얼마 전 그러한 현상이 의외로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일이 있었 다. 내가 한국의 시골 마을에 유학중인 중국 학생들을 안내해 주면서 경험했던 일 이었다. 사실 나에게도 시골 체험은 그때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민박한 집에서 하룻동안 봄 농사 준비를 거들어 주었고 그 집 주인은 굉장 히 친절하게 우리를 대해 주었다. 정작 그런 순박한 농부가 나를 놀라게 했다. 그 들의 언어생활에 대한 또 한번의 충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국에서도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주로 도시에서나 볼 수 있 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농장으로 차를 타고 가던 도중 농부의 입에서는 잇따라 생소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 “미안하지만 그 도어 좀 닫아주세요.” “우린 서로 필링이 잘 통하네요.” “ 내가 어드바이스해 줄게요.” “히프에 흙이 묻었네.” 특히 나는 그가 ‘도어’를 닫아달라고 요구했을 때는 그것이 무슨 농기계 부속품 을 가르키는 줄 알고 “어디 있죠? 도어가 어느 것이죠?”라며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그의 입에서 멀쩡한 ‘창문’이란 말이 ‘도어’라는 말로 바뀌어 나올 줄 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황당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일행이 자신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자 그는 미안하다는 기색보다 오히려 우월 감 같은 것을 과시하려는 듯 장황한 해석과 가르침까지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우리 일행이 영어에 깜깜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곁에 있던 중국인 유학생들이 나중에 영문을 알아차린 뒤 “한국인은 영어수준이 정말 높다”고 한마디 했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의 진의를 모를 리 없다. 많은 중국 인들이 한국인과 일본인의 영어 실력에 낙제점수를 주는 일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 특히 한국인의 영어는 한국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식이다. 그들이 사용 하는 영어는 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식 표현을 빌리자면 ‘ 콩글리쉬’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한국인 가운데도 영어를 잘 구사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문 제는 그들이 자신의 영어 실력을 일상의 언어습관과 혼돈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영어는 영어대로 엉망이고 한글은 한글대로 황폐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외부 지적에 대해 한국인들은 쉽게 수긍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 편이다 . 조선족이든, 외국인이든 그런 문제를 제기하면 한국인들은 오히려 싫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나는 오랜 한국생활 동안 ‘촌스럽다’는 소리를 들 으면서도 틈나는 대로 이를 지적하곤 한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서 잃어버린 자존 심을 되찾기 위한 작은 ‘싸움’이기도 하다. 조선말 덕택에 오히려 漢人의 존경 받기도 솔직히 나는 학창시절부터 한글에 각별한 애정을 쌓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또다른 조선족들과 크게 별다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려서 언니와 함께 조선족학교를 다녔고 오빠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줄곧 중국학교를 다녔다. 오빠가 중국학교에 서 제1외국어로 영어를 배운 반면 나와 언니는 13세부터 조선족학교에서 일본어를 외국어로 배웠다. 조선족들은 현실에서 중국어를 완벽히 구사해야 하는 것 말고도 조선어(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세뇌되도록 듣는다. 조선어를 잘 한다고 특별한 혜택을 받는 것은 없다. 조선어를 외국어 과목으로 인정해 주는 것도 더더욱 아니 다.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유독 민족심이 강하고 교육열이 높은 조선족들로서도 외국어 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당장 대학입시나 자격평가시험 등에서 한족들에 비교 해 보면 부담이 됐다. 중국정부는 이러한 소수민족들의 어려움을 감안해 제도적으 로 배려하기도 했다. 우선 조선족들에게는 문법이나 어순·발음이 비슷한 일본어를 제도적으로 외국어로 선택하게 했던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일본어를 배운 것에는 그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은 지금은 많이 달라져 조선족학교들도 일본어 대신 영어 교육을 하는 추세다. 반면 중국학교를 다닌 오빠는 학창시절 조선어·중국어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영 어 성적도 늘상 우위였다. 그는 무뚝뚝한 성격이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우수 한 학생으로 늘상 중국 친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중국학교에서 요즘 한국 말로 ‘왕따’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에게 그것은 오 히려 기회였다. 오빠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아이들이 날 업신여기지 않았던 것은 내가 중국어도 잘했지만 조선어를 잘 했기 때문이야. 초등학교 때부터 중국 애들은 내게 ‘너는 우리가 모르는 조선 말도 할 줄 아니? 어디 한번 해봐’라며 요구해 왔어. 그럴 때마다 나는 ‘태산이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를 목청을 돋구며 외쳤 지. 그러면 그들은 부러운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이렇게 말했지. ‘야! 너, 담임선생보다 쎄다. 한어·영어에다 너희네 말도 할 수 있다니….” 그의 말 속에는 조선민족의 언어를 소중하게 여기는 가르침이 숨어 있었다. 그런 그의 자존심은 2세교육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네살배기 아들에게 그는 중국말보 다 조선말을 먼저 가르쳤다. 조카가 중국말로 대꾸하면 엉덩이를 치며 “그 말 다 시 조선말로 해봐”라며 야단쳤다. 그는 조카가 중국말과 조선말을 섞어 쓰는 것도 엄격하게 단속했다. 그 덕택인지 조카는 벌써 주변에 온통 중국사람들로 둘러싸인 탁아소를 다니지만 중국말 표현도, 조선어 표현도 으뜸이다. 34세의 신세대 오빠의 이러한 모습은 조선족들 나름대로의 자존심과 자긍심이다. 그의 그런 행동을 보면서 내가 유난히 오빠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두터워짐을 느끼 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너는 이완용이 보다 더하다!”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나는 한국에서 간혹 영어를 사용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깜짝 놀란 적도 있다. 평소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국인들과 원활한 의 사소통을 위해 가끔 어설프게 영어를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버릇은 중 국에 돌아가면 금방 ‘들통’나게 마련이다. 얼마 전 다롄(大連) 집에 갔을 때 작 은 사건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아버지께서 내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신 것이다. 그날 아버지는 내가 엉겹결에 내뱉은 ‘콩글리쉬’를 귀담아 듣고 이렇게 꾸짖었다 . “왜 좋은 것을 안 배우고 한사코 어설픈 짓거리를 배우고 다니느냐?” 아버지는 내게 상상도 못할 정도의 억울한 죄목을 뒤집어씌웠다. “너는 이완용이보다 더하다!” 아버지의 반응은 심각할 정도였다. 거기에는 한국인들에 대한 조선족들의 상처받은 자존심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날 아버지와 오랫동안 논쟁 을 벌였다. 그런 와중에 나는 한국에 대한 ‘편견’들이 쌓여가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조선족들의 마음을 누가 쓸어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조선족들이 애틋 하게 가슴 속에 담아온 고국동포들의 모습들을 본래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한국인들 의 자각과 실천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실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순수 한 한국말을 쓰자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한국인들의 식탁과 주거에 바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 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조선족들 사이에는 이런 공감대가 이미 확산 되고 있다. “한국은 그야말로 자기문화에 대한 혁신(革新)과 조명(照明)이 새로 필요한 시점 에 와 있다”고…. 김영옥 (옌볜일보 서울특파원)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