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gul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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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25일 목요일 오전 03시 04분 26초
제 목(Title): 고종석/평양중심 '문화어'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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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에세이] 평양중심 '문화어'의 대두 
서울을 중심으로 한 남한에서 사용되는 언어도 한국어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한에서 사용되는 언어도 한국어다. 금강산을 오르는 남한 관광객들은 북한 
안내원들과 의사를 소통하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북의 한국어와 남의 
한국어가 완전히 균질적인 언어는 아니다. 오래 전부터 있던 방언적 차이 외에, 
한반도에 실질적으로 두 국가가 존재해 온 지난 반세기 남짓 동안 남과 북의 
언어는 적지 않은 이질화를 겪었다. 한 언어가 여러 국가에서 사용될 때, 나라마다 
그 언어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컨대 벨기에 남부나 
스위스 서부에서 사용되는 프랑스어는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프랑스어와 조금씩 
다르다. 또 스위스 동부나 오스트리아에서 사용되는 독일어도 독일의 독일어와는 
조금씩 다르다. 이때 프랑스어나 독일어가 조금씩 달라진 것은 지리적 방언의 분화 
탓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정치 공동체 내부의 구심력 탓이기도 하다. 남과 북의 
한국어의 경우엔, 그 이질화 과정에 전통적인 지리적 방언의 분화보다 서로 다른 
정치공동체 내부의 구심력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프랑스어나 독일어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더구나 남북의 두 정치 공동체는 지난 분단 시기 동안 줄곧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고, 주민집단 사이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이질화의 조건이 
최적이었던 것이다. 그 이질화를 더욱 더 심화한 것은 북한의 한국어가 겪은 
인위적 변화다. 전체주의자들답게 북한의 정권담당자들은 언어를 인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정권 수립 
직후부터 체계적인 언어 정책을 수립해 이를 강제로 시행해 나갔다. 이런 
언어정책의 시행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난 평양산 한국어는 `문화어'라는 이름을 
얻었다.  

`문화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6년 5월14일자로 나온 김일성 주석의 
교시다. `조선어의 민족적 특성을 옳게 살려 나갈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이 
교시에서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말을 발전시키기 위하여서는 터를 잘 
닦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혁명의 참모부가 있고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모든 
방면에 걸치는 우리 혁명의 전반적 전략과 전술이 세워지는 혁명의 수도이며 
요람지인 평양을 중심지로 하고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여 언어의 민족적 특성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표준어란 말은 다른말로 
바꾸어야겠습니다. `표준어'라고 하면 마치 서울말을 표준하는 것으로 그릇되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대로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우리가 
혁명의 수도인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여 발전시킨 우리말을 `표준어'라고 하는 
것보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문화어'란 말도 그리 좋은 것은 못 
되지만 그래도 그렇게 고쳐쓰는 것이 낫습니다.” 김일성은 또 이 교시에서 민족어 
정책의 기준을 서울 중심의 `표준어'에서 평양 중심의 `문화어'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서울말은 남존여비사상, 썩어빠진 부르주아적 생활이 지배하는 
말”이고, “고유한 우리말은 얼마 없고 영어 일본말 한자어가 반절이나 섞인 
잡탕말”이며, “오늘 남조선 방송에서는 여자들이 남자에게 아양을 떠는 코맹맹이 
소리를 그대로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말하자면 김일성의 `문화어' 선언은 
서울말로부터 평양말의 독립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선언은 그때까지 한반도 
변두리 서북지방의 한 방언에 불과했던 평양말에 서울말의 위세에 맞먹는, 또는 
그것을 넘어서는 명예를 헌정하는 선언이었다. 70년대 들어, 거기에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항일무장 투쟁기의 김일성 신화가 덧붙여졌다. 항일무장 
투쟁시기에 김일성이 창시했다는 주체사상에 이미 언어학·언어 정책 분야의 
이론까지가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문화어' 선언은 또 1972년의 
개정헌법에서 그 이전까지 서울로 돼 있던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도를 
평양으로 바꾼 것과 함께 북한 정권의 평양중심주의를 공식화한 사건이었다. 이 두 
선언을 통해서 북한 사람들에게는 평양말이 한국인 전체의 전형적 민족어가 
되었고, 평양이 한국인 전체의 수도가 되었다. 

`문화어' 선언 이전에도 김두봉, 이극로, 홍기문 등 언어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글 
전용, 문맹퇴치운동, 철자법 개정, 사전 편찬, 문법서 편찬 등 적극적인 
언어정책을 폈던 북한 정권은 `문화어' 선언 직후 철자법을 다시 개정해 <조선말 
규범집>을 펴내고, 문화어를 보급하기 위해서 68년에 계간 <문화어 학습>을 
창간하는 한편, 여러 언론·출판 매체들을 통해서 대대적인 말다듬기 운동을 
벌였다. 휴전선 너머의 책도, 신문도, 방송도 볼 수 없었고, 민간인들이 만나서 
얘기할 수는 더더욱 없었던 남과 북 사이의 언어는 이제 `표준어'와 `문화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 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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