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gulKorean ] in KIDS 글 쓴 이(By): triangl (Don'tTryMe-8) 날 짜 (Date): 1993년11월17일(수) 19시56분35초 KST 제 목(Title): [공병우박사] 나는 40년이란 긴세월을 덤으 제목 : 나는 40년이란 긴세월을 덤으로 살고있다. #7779/8014 보낸이:공병우 (Kongbw ) 11/15 18:22 조회:240 1/9 나는 40년이란 긴 세월을 덤으로 살고 있다 **************************************** 공 병우(한글 문화원장) 6ㆍ25남북 전쟁 때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공산군 군의감의 증언으로 죽지 않고 여든 여덟이 된 지금까지 43년이란 긴 세월을 덤으로 살고 있다. 내 나이 45세 때 6ㆍ25가 터졌는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사이 6월 28일 공산군이 서울에 들이닥쳤다. 공산군이 우리 우익 지성인들을 한강 강변에 끌고 가서 총살한 후 모래 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린다는 소문이 쫙 돌더니, 나는 당시 국립도서관에 자리잡고 있던 정치보위부로 끌려 갔다. 나는 '공산당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때 재판장의 요청으로 공산당 원인 이관술의 눈을 감정하여 사실대로 진단서를 쓴 일이 있었는 데, 그 진단서가 공산당원을 해치려고 허위로 쓴 것이라는 혐의였다. 이새끼가 허위 진단서를 썼기 때문에 우리 동무가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남쪽으로 도망가던 반동군에게 학살을 당했다. 너도 정치 공모자로 우리 동무를 죽인 살인자야!” 주먹으로 때리고 군화로 차고 짓밟아 호된 고문으로 정신을 잃고 실신했다. 이튿날 깨어나 보니 좁고 캄캄한 독방이었다. 호된 고문으로 온통 붓고 얼룩진 채 지하 독방에서 한 주일을 지내면서, 오늘밤에라 도 당장 한강변으로 끌려 나가 총살 당할 것만 같은 공포심으로 떨며 지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그때의 공포심은 글로써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밤마다 밖에서 철문을 여닫는 쇳소리가 덜커덩거릴 때마다 매번 '이번이야말로 내가 끌려 나가 총살 당할 차례가 아닌가?' 하고 치를 떨었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 일 같기만 하다. 한 주일 지나 넓은 방으로 옮겨 가니, 그 곳에는 나 말고도 무고한 서울 시민들이 많이 잡혀 와 있었다. 그들은 남한정부에 협조했던 과거를 이제라도 반성하고 인민공화국에 협조하겠다는 내용의 자술서를 쓰면 집으로 돌려 보내 주겠다는 공산당의 말을 믿고 자술서를 써 바치 고는 모두들 하룻만에 방에서 나갔다. 날마다 수백 명씩 잡혀 왔다가 자술서를 쓰고 이튿날 아침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허위 진단서를 썼다고 거짓 자백이라도 하고 지옥같은 괴로운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 무척이나 고민했다. 그러나 지조를 꺾으면서까지 공산치하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 도 없다는 생각으로 차라리 살기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결심을 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지고 고통과 번민은 훨씬 적어졌다. 끌려 온 지 꼭 3주일 되던 날, 전날 잡혀 온 사람들과 같이 줄을 지어 도보로 서대문 형무소까지 끌려 가서 한 방에 아홉 사람이 같이 있게 되었다. 가 보니 보위부에서 자술서를 써 바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던 사람들 모두가 그 곳에 와 있었다.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는 서울 시민들이 2만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다. 같은 방에 있는 아홉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징역이나 벌금으로 해결되지만, 정치범인 나는 총살 을 면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이미 죽을 각오를 한 나는 공산군에게 총살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 내 목숨을 끊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어떻게 하면 자살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하면서도, 인간이라 생에 대한 욕심 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유엔군 비행기가 자주 오기만 기다리면서 자살할 궁리와 살아날 궁리로 두 가지 갈림길에서 그러던 어느날 멋진 군복을 입은 군인이 두 사람 앉아 있는 방으로 끌려 가 또 조사를 받게 되었다. 한 군인이 오늘 심문이 생사를 판가름 하는 중요한 조사이니 정신차려 대답하라고 말하면서 엷은 법률책을 주면서 읽어 보라고 했다. 정치범은 총살에 처한다는 글 줄에 빨간 밑줄이 그어 있었다.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끝으로 미국에서 만들어 온 한글 타자기와 똑같은 설계도를 만들어 놓겠다면 살려 주겠다고 했다. 자술서를 쓰면 집으로 돌려 보내 준다는 감언이설로 무죄한 사람들 을 2만여 명이나 형무소에 가두어 놓고 먹을 것과 물도 제대로 주지 않는 야만적인 공산군인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속는 셈 치고 설계도를 만들어 놓겠다고 대답했다. 죽음을 각오한 채 오랜 수용생활과 여러 차례의 심문을 견디느라 몹시 허약해져 있었던 나인지라, 나의 대답이 미지근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대답을 믿을 수가 없어서인지, 이모 저모로 질문을 다구치기에 나 는 조사관이 나를 믿도록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하겠다고 약속하면 꼭 약속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저는 해 놓기 전에는 큰소리를 치지 않습니다. 해 놓은 후에 큰소리를 치든가 자랑을 하는 성질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조사관은 내 말을 들은 후 밖으로 나갔다가 10여 분 후 다시 들어 왔다. 내 문제에 대해 상관과 의논하고 돌아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마주 앉아 있는 군의감에게 의견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까지 우리 두 사람의 대담을 긴 시간 동안 듣고만 있던 군의감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분에 대해 정치 관련 여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이분이 안과의사로서 인술자라는 사실을 100% 보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일제 시대에 함경도에서 공의로 근무할 때, 많은 환자들이 서울에 가서 병치료를 받고 돌아와 하는 말이 다른 의사들은 돈만 아는데 유독 이 분은 치료비가 없으면 없는 대로 무료로 눈병을 치료해 주시는 분이라고 하기에 그런 의사도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던 분입니다. 이 분에 대한 나의 증언은 진정한 인술자라는 점뿐입니다. 정치에 대한 사항은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군의감님의 말을 들은 조사관은 얼마 후에 나를 보위부로 돌려 보내 주었다. 보위부로 돌아 와서 나는, 보위부에서 미리 우리 집에서 압수해다 놓은 한글 타자기를 가지고 여러 높은 군인들이 둘러서 있는 가운데서 촉지법으로 타자를 해 보였다. 한글이 찍혀 나오는 것을 보고 군인 한 사람이 “우리가 이런 기계 를 만들어 쓴다면, 우리도 로스케(소련 사람)들처럼 빠른 속도로 사무 처리를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나는 타자 시범을 끝마치고 곧 육군 병원으로 끌려가 병원장에게 연금 요시찰 인물로 인계된 후, 한글 타자기의 설계도를 만들 것을 명령 받고 병원 안에서만 지내게 되었다. 병원에 연금된 지 2주일 정도 지나서 유엔군이 인천 상륙을 성공 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공산군들은 북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2만여 명은 북으로 끌려 가다가 도중에 모두 총살되었다. 그리고 육군 병원에 근무하던 의사들을 태우고 북으로 가던 자동차 가 미아리에서 고장이 나, 차를 수리하는 사이에 나는 용감하게 도망쳤 다. 도망을 친 후에도 여러 차례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운좋 게 잘 넘겼다(자세한 내용은 공병우 자서전 참고). 내가 40여 년을 덤으로 살게 된 동기는 할아버님 은덕이라고 생각 한다. 내가 자라날 때, 할아버님은 “적선을 한 사람은 난리가 나도 산다” 즉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전쟁이 일어나도 산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주 말씀해 주셨다. 내가 안과 개업을 한 후 돈을 위주로 하지 않고, 많은 가난한 눈병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준 사실이, 일제 시대의 한 시골 공의님의 가슴에 기억되었다가 죽을 처지에 놓인 나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렇게 긴 생명을 덤으로 얻게 된 동기는 고성능 한글 타자기의 발명에 있었지만, 내가 허위 진단서나 허위 자술서를 쓰지 않고 지조를 생명처럼 굳게 지켰다는 점에도 있었다. 새빨간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는 빨갱이들에게 거짓 자술서를 쓰지 않고 죽을 결심을 한 것이 오히려 나를 살린 것이다. 그리고 공산군의 군의감님의 귀한 증언이 나의 생명을 40년이나 더 살게 해 준 최종 열매 구실을 했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을 앞두고 전쟁이 나날이 극심해지는데, 부상병들 처리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군의감님이 서대문 형무소까지 와서 나를 진정한 인술자로 증언해 주셨는데, 그분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한 번 꼭 만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나는 지금 생각한다. 만일 내가 돈을 위주로 안과병원을 운영했다 든가, 한글 타자기를 개발한 일이 없었다든가, 허위 진단서를 썼다든 가, 정치보위부에 3주일 동안 있으면서 번민과 고통을 못 이겨 사실이 아닌 거짓 자술서를 썼더라면, 그 당시 죽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사람은 돈보다 더 소중한 사랑을 위해 정직하 고 정의롭게 노력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빛나는 생명을 주는 것이라 확신한다. <> (1993. 11. 15.) 한글 문화원 서울. 종로구 와룡동 95번지 우110-360 전화:744-3268, 전송:742-95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