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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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wha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0월 21일 수요일 오후 12시 51분 23초
제 목(Title): 보충자료/지식인사회의 계보



전에 창비홈페이지에서 퍼와서역사보드에 퍼온글이에요.
최원식씨 의 '지식인사회의 복원을 위한 단상'에서 일부 발췌했습니다.

각주가 궁금하신 분들은 역사보드원글을 참조하세요.

III. 한국 지식인 사회의 계보 한국의 지식인 문제를 궁구할 때, 채만식(蔡萬植)의 

레디메이드인생」(1934)은 
한 단서를 제공한다. 주인공 P가 신문사에 취직을 부탁하러 갔다가 거절당하고 
광화문 네거리 기념비각(지금도 교보문고 앞에 있다)에서 구한말 이후 지식인의 
역사를 추상(追想)하는 이 단편의 3장이 특히 흥미롭다. 그는 3 운동의 획기성을 
지식인사와 관련하여 주목한다. "자유주의 사조는 기미년에 비로소 확실한 걸음을 
내어디디었"는데, 이 운동 이후 크게 일어난 교육열을 사이토 미노루(齋藤實) 
총독의 문화 정치와 아울러 "지식 계급을 대량으로 주문"한 신흥 부르주아지의 
흥기와 연동시킨다. 그리하여 1920년대가 근대적 지식인 사회가 본격적으로 성립한 
시대였음을 풍자적 어조로 다음과 같이 개관한다. 
면서기를 공급하고 순사를 공급하고 군청 고원[雇員: 관청에서 관리의 사무를 돕기 
위해 특별히 고용하는 직원: 필자]을 공급하고 [……] 농사 개량 기수[技手: 
기술에 관한 사무를 맡는 공무원: 필자]를 공급하였다. 은행원이 생기고 회사 
사원이 생기었다. 학교 교원이 생기고 교회의 목사가 생기었다. 신문 기자가 
생기고 잡지 기자가 생기었다. [……] 의사와 변호사의 벌이가 윤택하여졌다. 
소설가가 원고료를 얻어먹고 미술가가 그림을 팔아먹고 음악가가 광대의 
천호(賤號)에서 벗어났다. 인쇄소와 책장사가 세월을 만나고 양복점 구둣방이 
늘비하여졌다. 연애 결혼에 목사의 부수입이 생기고 문화 주택을 짓느라고 
청부업자가 부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는 '가보'를 잡고 공부한 일부 
지식꾼은 진주(다섯 끗)를 잡았다. [……] 해마다 천여 명씩 늘어가는 인텔리 
[……] 부르주아지의 모든 기관이 포화 상태가 되어 더 수요가 아니 되니 그들은 
결국 꼬임을 받아 나무에 올라갔다가 흔들리는 셈이다. 개밥의 도토리다. [……]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이 대목을 음미하노라면, 3 운동을 고비로 갑신정변(1884) 이래 참회 귀족 또는 
개명 양반층이 주도하던 민족 운동의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이제 운동의 
주도권이 잡계급적 인텔리겐치아의 수중에 넘어갔음을 실감하게 된다. 물론 위 
인용문에서 보이듯, 새로이 성립한 조선 지식 계급의 많은 부분이 총독부와 토착 
부르주아지의 식민지 근대화 추진에 있어서 그 하부에 편제되었지만, 이 유착도 
대공황(1929)에 즈음하여 파열하게 된다. 이는 일본 자본주의의 후발성에도 
연유하는 것이지만, 총독부가 추구하는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란 근본적으로 일본 
자본의 관리 아래 조선을 묶어두는 구도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량으로 배출된 조선의 지식 계급은 공황의 여파 속에서 식민지 권력과 토착 
부르주아지, 식민지 권력과 민중, 그리고 토착 부르주아지와 민중 사이에서 일종의 
내적 망명 상태로 함몰되는 것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혁명적 인텔리겐치아가 
산출될 유사한 조건이 형성되었으니, 주인공 P가 자신의 아이를 인쇄소 노동자로 
맡기는 이 단편의 결말은 극히 상징적이다. 지식 계급의 다수를 이루는 체제 
지향적 기술 지식인 속에서 민중과 결합하는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의 대두가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이다. 
물론 1920년대에도 혁명적 인텔리겐치아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표면적으로 
관찰하면, 3 운동 이후 합법적 공간의 일정한 확대 속에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급진적 운동이 활발했다는 점에서 1920년대가 1930년대보다 인텔리겐치아의 혁명적 
성격이 더 두드러진다고 볼 수도 있다. 천황제 파시즘의 성립과 함께 1930년대에 
일체의 운동이 탄압 속에 현상적으로는 소멸해간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920년대 혁명 운동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민중적 회로에 연결되었다기보다는 거의 
지식인 내부 체계로 수렴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소시민적 급진주의를 
시원하게 넘어섰다고 보기 어렵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30년대 지식인들은 민중 
결합의 혈로를 뚫는 다양한 시도에 나섰으니, 예컨대 30년대의 유명한 '브 나로드' 
운동이 그 합법적 형태를, 적색 노동조합과 적색 농민조합 운동은 그 비합법적 
투쟁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1930년대에 두드러진 조선 지식 계급의 급진화는 일본과도 흥미롭게 대응한다. 
대체로 메이지(明治) 시대의 지식인들은 체제 지향적이었으니, 후쿠자와 유기치는 
"그저 정부만 쳐다보고, 정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단정하고, 
이에 매달려 이전부터 품어온 청운의 꿈을 이루어보겠다는 욕망"에 "민(民)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없고, 정부 관리가 될 꿈만 꾸"는 메이지 지식인들을 
"한학(漢學)의 몸체에 양학(洋學)의 의상을 걸친 꼴"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을 
정도다.15) 그런데 쇼와(昭和) 시대의 개막(1926)을 즈음하여 일본의 지식 계급은 
이전 시대에 비해서 급격히 비판적 자세를 강화한바, 혁명 운동에 투신하는 
지식인을 영웅시하는 기풍이 젊은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확산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역시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공고해지면서 일어나는 인텔리겐치아의 이탈 
양상일 것인데, 그럼에도 반체제적 지식인들의 존재 전이가 선량(選良) 의식 또는 
특권 의식의 포기라기보다는 그 극단적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이전 시대의 
지식인들과 상통한다는 분석은 유의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16) 
식민지 조선의 지식 계급은 일본의 지식인들보다 더욱 소명 의식에 충만해 있었다. 
나라를 잃었다는 조건이 국사(國士) 의식을 강화하는 온상인 데다가, 일본과 달리 
전통 사회의 지배 계급이 무사가 아니라 문인 학사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 계급은 반중세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어도 내밀하게는 전통 
사회의 사대부를 후계하고 있는 점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함으로써, 대체로 무사에 
시봉하는 실무 역량으로 국한했던 일본의 전통적 지식인들과는 사회적 위상에서 
작지 않은 차별을 보였던 것이다. 이는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는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으로 내면화되어 오늘날까지 연면한 바가 없지 않다. 그런데 한국 
지식인 사회의 유별난 국사 의식이 비판적 풍기를 배양하는 기반의 하나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만큼 오늘날 지식인 사회의 내적 붕괴를 초래한 걸림돌 노릇도 
해왔다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이제는 지나칠 수 없다. 
하여튼 1930년대에 비판적 내지는 혁명적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점에 유의할 
때, 우리는 해방 직후 한국 사회에 고조된 혁명적 분위기를 요해하게 된다. 천황제 
파시즘의 발호 아래 합법적 비합법적 공간에서 소극적 또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인텔리겐치아들이 해방이라는 조건과 함께 대분출하면서 한국 사회는 장기간에 
걸친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해방 후 냉전의 진군과 6 
5 이후 분단 체제의 성립으로 우리 지식인 사회는 대파국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혁명 이후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소멸해간 과정을 유사하게 복제한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 지식인 사회가 간난한 복원의 길을 더듬어갔다는 
점이야말로 흥미롭다. 이 지점에서 6 5가 가진 중층적 의의에 대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총역량에 대한 대규모의 파멸을 초래했음에도, 6 5는 여전히 
강고하게 잔존한 전통적 농업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체함으로써 비록 천민적이지만 
남한 사회의 본격적 자본주의화를 추동하게 되었으니, 1920년대와는 또 다른 
수준에서 지식 계급을 대량 주문하였다. 모든 사회 계층, 특히 농민층으로부터 
충원된 학생들이 대거 도시의 대학으로 몰려들면서 대학은 잡계급적 인텔리겐치아 
출현의 온상으로 변모한다. 여기에 4월 혁명의 비밀이 있다. 그들이 바로 4월 
혁명을 이끈 '대학의 푸가초프'였던 것이다. 4월 세대와 그 비판적 후계자들과 5 6 
쿠데타의 개발 독재 세력과 그 희극적 계승자들 사이의 충돌이 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을 이루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두 
세력이 격렬한 대립을 거듭했음에도 대체로 농민적 기원이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맹목적 근대 추종으로 치달은 전자나 낭만적 근대 
부정으로 함몰되곤 했던 후자나, 그 저류에는 강렬한 민족주의가 공통적으로 
잠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1989)와 문민 정부의 
출범(1993)이라는 안팎의 조건 변화 속에서,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긴 기간에 
걸쳐 투쟁을 지속해온 우리 지식인 사회가 순식간에 일종의 내적 붕괴 상태로 
돌입하게 된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IMF 관리 체제라는 미증유의 
시대를 맞이한 지금이야말로 우리 지식인 사회의 명예로운 전통을 근본적으로 
재음미하면서 지식인 사회의 복원을 위한 사고의 발본적 쇄신을 모색할 바로 
그때일 
것이다. IV.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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