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wha ] in KIDS 글 쓴 이(By): terraic (可居地地獄) 날 짜 (Date): 1998년 10월 20일 화요일 오후 12시 29분 05초 제 목(Title): 일제하 계몽운동에대한 단상 일제하의 계몽운동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일제하 계몽운동의 뿌리는 일단 실력 양성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한말의 갈등에서 온건 개화파들이 택한 길이었구요.(사실 사회경제적 지위에서 그들은 봉건 관료들이 업ㅆ고 민중적이라든지 그런 면과는 거리가먼 지배 계급이었지요.) 금진개화파인 박영효니 김옥균이니 하는 치들은 역시 급진적으로 친일의 대부 노릇을합니다. 위정 척사 계열의 인사들은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합니다. 의병으로, 독립전쟁의전사로 그들은 조국의 산하에 뼈를 묻었습니다. 온건 개화파뎔×諍� 일부역시 독립전쟁의 전사로 나섰고 목숨을 내 걸었습니다. 일단 농촌의 계몽과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의 장기적인 회복운동은 민족 해방운동내의 우파 민족주의 자들이 주도가 됩니다. 당시의 동아와 조선이 앞장섰지요. 그 자체를 비난할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뒤의 논쟁입니다. 민족주의가 주도하던(정확히는 우파 민족주의겠지요.) 계몽운동은 그 쟁취의 목표로 민중의각성과 그를 통한 자치권의 획득으로 귀결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먼저 민주의각성만을 강조함으로서 고래의 한국 전통의것들을 무조건 전 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악으로 보아 일소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일제가 내세운 식민지 통치의 정당화 논리, 오늘날에 이루어지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반도를 보다 나은 세계로 이끌었다 " 라는주장과 일맥 상통합니다. 이러한 논쟁은 당대에도 이루어 집니다. 그 극단까지 간 인간들이 최남선과 이광수로 그들은 조선민족의 개조를 주창하면서 오늘날 식민 사관으로 지적 받는 위의 입장을 전도 합니다. 조선인은 무능라고 미개하며 서구 적 -서구적이라는 것을 오늘날의서구적인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 하는 분은 없을것입니다. 일존을 통하여 일본이 수용한 서구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그들은 친일의 논리로 나아갑니다. 조선이 이제는 내지(일본)과 동일한 무화적 수준까지 각성되었다. 그러니 이제 조선인은 내지인가 동등한 대우를 받을것이며, 이 모든 것이 천황폐하의 은공이다.... 우리야 말로 진정한 천황의 자식으로서 황국신민의길을 가야 한다.. 내선일체. 황국신민 신간회라는 민족 협동 노선이 깨진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담,ㄴ 가장 큰 원인가운데 하나가 민ㅈㄱ주의자 진영의 그러한 계몽논리에 대한 진보 진영과 좌파 진영의 반발이 가장 컸을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지니고 -여기서 그들은 우파 민족진영입니다.-있던 반공주의...-민족보다는 이념이 중요하다는 대단히 냉적적이고 매카시즘적인 발상.--그런 것이 민족 협동 노선의 붕괴를 나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일제에 대한 저항보다는 우매한 민중의 계몽이라는 문제에 치중하다가 그만, 식민지적 상황이라는 거악을 잊고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에 말려든 어리숙하고 -좋게 말한다면- 의식이 부족한 이들이었던 셈입니다. 그들은 당시의 저항적 민족주의자 그룹들 즉, 임시정부와 광복군,그리고 의열단돠 항일 연군과 같은 비타협적민족주의자와 아무런 협동도 꽤하지 않았으며 대다수는 일제 말기 모두 일체에 동조하기에 이르릅니다. 위에 마담엑스님이 여자 연성ㄱ소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것은 일본의 통치기구인 조선 총독부가 "민중계몽"과 "농촌계몽"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당시의 학교들을 개편한 과정에서 나온 일입니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이야기가 나옵니다. 계몽이라는 면을 강조 했다는 면에서 민족 실력 양성론자들과 조선 총독부의 방향은 같았다고도 볼수있는 섬찌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길 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惡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藥과 마음을 얻었으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