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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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wha ] in KIDS
글 쓴 이(By): biblio (모야?)
날 짜 (Date): 1997년11월06일(목) 02시27분27초 ROK
제 목(Title): corona 타자기에는 '1'이 없다.



집안내력이다.
주머니에 조금이라도 여유자금이 생기면, 금새 언제 가난했었냐는 듯이
옛스러운 물건에 손이 가게 된다. 중 2때부터 오가기 시작했던 안국동
인사동 골목, 고등학교 때는 참고서를 사러 교보를 가야한다며 용돈을 
받아들고는 기어코 양재역에서 안국역까지 올라와서 샀던 7천원짜리
(안압지 유물이라던) 주사위와, 복숭아에 작은 개구리가 살포시 얹혀있던 
청화백자연적이며 주섬주섬 사모으기 시작했다.

혼자서 그러고 다니면서 부모님 모르게 하는 것이 미안했었고, 또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하나도 안 닮은 짓을 할까?'고민도 많이 해봤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피는 못 속인다고 이게 다 집안 내력인 걸.. 

어느날 창고에서 이사짐을 정리하다가 검정 궤짝이 나오는 거다. 뚜껑을 
열어보니, 그랜드 피아노 비슷하게 생겨먹은 타자기가 들어 있다. 가운데 
'CORONA', 'SMITH CORONA', 'OREGON TYPEWIRTER & RECORDER CO.'라고 찍혀있다. 
크기는 손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 되는 정사각형에 높이는 프라임 
영한사전보다 조금 높다. 껍질은 대가집 안방의 자개장처럼 검고 윤택스럽다.
한참을 혼자서 '틱톡~톡톡' 두들기는데, 이거 생각보다 타자기가 
재밌다. 혹시나 해서 어머니를 들볶아서 여쭤보니, 어느 골동품점에서 사서는
아버지 몰래 창고에 감춰둔 거라고 한다. 그래서 집안 내력이 되어버렸다.

어쨌거나 타자기를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바쁘면 둘러보지 않다가도, 시간이 
여유로울 때면 이 골동품을 열어서 한번 씨익 닦아주고는 몇 단어 쳐보기도
한다. 한 번은 바이런의 'woman'이라는 시를 쳐봤다. 내가 좋아하던 시였는데, 
몇 번을 반복해서 몇 장을 쳤는데도, 순 오짜투성이에 볼품 없이 찍혔다. 그래도 
프린터는 죽어도 못 따라할 '뚜렷하게 박혀져 있는 알파벳'의 묘미가 보인다.

그래서 작은 종이에다가 내 명함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름 :, 
홈페이지:, 이메일:. 전화번호:, 까지 잘 나가다가 삐삐: 015-***-****
치는데 갑자기 눈에 숫자 '1'이 보이지 않는거다. 2 옆에 있어야 할 그 1이
도대체 보이질 않는거다. 그러다가 결국 '웬놈의 타자기가 이러냐?'하면서 
탁 덥어버리고 말았다.

그 날로부터 한참을 지난 오늘에서야 깨달은 거다. 
코로나 타자기에는 '1'이 없다. 
오늘 그 코로나 타자기로 하얀 백지 위에 한 줄로 찍어보았다.

              "corona typewriter doesn't have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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