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ongDuk ] in KIDS 글 쓴 이(By): charina (보잉~) 날 짜 (Date): 2000년 7월 17일 월요일 오후 01시 00분 24초 제 목(Title): [보잉~] 역사..터키!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 수 억년 전의 화산 폭발. - 켭켭이 쌓인 역사를 경험하는 일은 언제나 경이로운 일이다. 오늘 아침은 터키의 가장 한 가운데, 카파도키아에서 해돋이를 맞았다. 찬란히 떠오르는 붉은 기운. 햇살이 닿는 곳마다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수천년, 수만년의 신비. 하루종일 그 사연들을 따라 다니느라 어느새 나는 없어지고 세월이 압축된 공간만이 남았다. 나는 터키에 가기 전에 이 카파도키아의 기암 괴석들의 사진을 수도 없이 보아 왔었다. 버섯모양의 삼형제 바위부터 시작해서 저 멀리 지평선을 가득 메우는 절벽의 행렬. 길을 따라 언덕을 돌면 또다시 우유 빛 속 살을 드러내는 저 어마어마한 세월의 바위 덩어리들. 이것은 수 억년 전에 있었던 에르제스산의 화산 폭발로 이 신비의 장관이 펼쳐지게 된 것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화산 폭발은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이후 바람과 비에 깎이고 쓸려서 부드러운 흙은 떠내려 가고 단단한 돌들만 남아 이 거대한 절경이 만들어진 것이고 지금도 그 형태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서있던 그 너른 평원은 수 억년 전에는 땅 속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바다속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카파도키아로 가는 길목에 있던 투스괼뤼 호수가에 쌓이는 엄청난 양의 소금을 보면 알 수 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 속엔 자연의 사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도 더불어 있다는 것이다. 저 멀리에 보이는 볼록한 바위 덩어리를 자세히 보라. 마치 벌집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창문에는 창틀을 끼워 넣은 자국도 있고 파이프를 설치해 안으로 물을 공급하던 주방과 마흔 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식탁과 의자가 있다. 또 어떤 방에는 아주 신비로운 벽화가 온 방안을 장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예배당이었는 듯. 후광이 비치는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이 눈에 띄인다. 특히 토칼리 교회라는 예배당에서 본 벽화는 너무나 신기하게도 우리나라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너무나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같은 우랄 알타이 어족의 공감대 였을까? 시기상 우리의 고구려가 조금 앞서지만 같은 선조의 언어를 쓰고 있다는 동질감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지만 코디네이터 이박사님이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러니까 불과 20여년 전에까지 일부 돌집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그런데 왜 그들은 모두 크리스찬 이었을까? 데린쿠유 지하도시. 닭 한 마리가 찾아낸 5천년의 시간. 깊이 약 300미터, 반경 약100미터, 구조상 지하 19층. 횡단면도는 개미집과 흡사. 그저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땅 속에 4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는 게 믿어 지는가? 창고, 무기고, 집합소, 우물, 환기구등 완벽한 주거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안의 구조가 미로처럼 너무나 복잡해서 아직도 지하19층까지 어떻게 내려 갈 수 있는지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것은 지하4층 까지로, 관광객들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파란 화살표를 생명의 지침처럼 쫓아 다녀야 한다. 이 지하 도시의 생성시기는 수 천년 전이라고 예상되지만 누가, 왜 이런 곳에 이런 집단 지하 생활을 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600년 전에는 이슬람의 박해를 피해 기독교도들이 숨어 지냈다는 것만이 확실화 되었다. 숨어 지내기엔 완벽한 공간이 아닌가. 지하에다, 미로에다, 완벽한 방음에, 자동 온도조절까지. 내가 찾았을 때 나는 너무나 더워 소매 없는 셔츠를 입었었는데, 지하 도시에 들어 간지 딱 3분 만에 팔뚝에 닭살이 돋고 입김이 폴폴 나서 결국 기온차로 콧물이 나기까지 했었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고.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김치 독을 땅 속에 묻는 이유가 바로 이 것이 아닐까. 하여간 신앙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는 현장이었다. 어떻게 그 어두운 곳에서 평생을 지내며 살 수가 있었을까. 단지 유일신을 섬기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그 힘의 원천을 찾고자 카파도키아를 떠나 터키의 맨 아래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베드로 교회의 발상지 안디옥으로 향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터키의 일몰. 오늘은 지중해에서 맞이했다. 카파도키아에서 다섯 시간이나 차를 타고 내려왔다. 이 살이의 냄새가 가득한 안타키아로. 놀라움과 호기심의 연속이지만 막상 밤이 내리니 또다시 고국이 그리워 진다. 터키에서 발견한 소아시아의 정(情), 운전사 이드리스. 나는 우리 촬영팀이 렌트했던 벤츠 미니밴의 운전기사 이드리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겉 모습 나이 38살. 실제 나이 28살. 전혀 알지 못하는 이국인에게 고향의 푸근함을 느낀 다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 전 스텝들은 그랬다. 촉박한 촬영스케줄로 지치고 힘들 때 그는 우리를 위해 깜짝 유머를 선사했으며, 타는 목마름 속에 있을 때엔 물을, 지옥불 같은 더위에는 시원한 에어컨을, 이동하는 시간에는 편안한 휴식처를, 친해 지고 난 뒤에는 어느 정도 바디 랭귀지가 통했던 우리를 위해 현지인과의 통역까지 도맡아 했다. 10시간이 넘는 운전에도 그는 스텝들에게 전혀 피곤해 하는 기색을 비추지 않았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안전 운전을 했다. 우리의 촬영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끝나는 분위기가 되면 차에 미리 에어컨을 틀어 놓아 쾌적한 쉼터로 우리를 맞이 했다. 오일 레스링 촬영 다음날은 내 사진이 실린 터키 신문의 기사를 친히 스크랩 해 주었으며, 맛있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 하기 위해 나름대로 정보 수집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코만도 아비(터키어로 '형')' 줄여서 '만도 아비'라고 불렀으며 다행히도 그는 그 호칭을 좋아 했다. 사람들과 말하기를 즐겨하는 김피디는 그가 운전 하는 동안 내내 조수석에 앉아서 터키어 포켓북을 뒤적거리며 말도 안 되는 터키어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걸었는데, 그는 전혀 귀찮아 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재밌기로 소문난 김피디의 유모를 한 단계 넘어선 고급 유머로 촬영 차 안을 온통 웃음 바다로 만들곤 했었다. 결국 김피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두손 두발 다 들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렇게 우리 스텝은 총 6명이 되었다. 연출자 김피디님, 카메라 김감독님, 조감독 순복오빠, 리포터 이보영, 현지 코디네이터 이난아 박사님, 그리고 터키의 국민 개그 우리의 만도 아비까지. 이 환상의 팀 구성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좋은 방송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터키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는 파묵칼레의 호텔에서 밤 수영을 즐기며 맥주를 마셨는데 아쉬운 마음에 나누었던 작별 인사가 기억에 남는다. 김피디님 말씀, "나는 세계에서 그 유명하다는 터키의 여러곳을 다녀 봤지만, 이드리스 이 한사람에게서 받은 감동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전해 주세요 이박사님" "자기는 세계각국의 여러 촬영팀의 차를 운전 했지만, 이렇게 재밌고 이렇게 일 열심히 하는 촬영 팀을 처음이었다고 전해 달래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구요." 다음날 아침. 우리는 서울로 돌아 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파묵칼레에서 이스탄불까지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러니까 이드리스와는 이 파묵칼레 공항에서 작별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유난히 내게 친절했던 이드리스에게 난 그저 악수하고 안녕인사 하는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남자들은 또 다른 무언가를 서로에게 느끼는 건지, 아니면 순복오빠가 원래 정이 많아서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조감독 순복오빠는 자신의 손목에 있는 손목시계를 풀어 이드리스의 손목에 채워 주는 것이 아닌가. 두 남자가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굳게 포옹하는 작별인사는 문화와 국가의 벽을 넘어 온 스텝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너무나 친절하고 자상했던 이드리스, 만도 아비에게 멀리서나마 다시 한 번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보고 싶다는 말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