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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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번주에는 창세기 4장에 있는 말씀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창세기 4장 1절에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짓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

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절까지 읽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성경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벌써 창세기 4장에 접어들게 되었습니

다. 창세기는 여러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는데 특히 4장은 인간들이 범

죄한 이후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오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

이 하나님께 기도와 연보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 다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만 하

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어떤 제사를 받으시고 어떤 제사는 

받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가인을 낳았을 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하여 가인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두번

째로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아벨이라고 지었는데 아벨이라는 뜻

은 '입김'이라는 뜻입니다. 이른 아침에 '호-' 불면 금방 사라지는 입김처럼 허무

하게 없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아벨은 몸이 약하여 그 아이의 이

름을 아벨이라고 지었는지도 모르지요. 어찌되었든지 가인은 건강하고 튼튼하니까 

땅을 파서 곡식을 뿌리고 추수하며 힘든 농사일을 했지만 아벨은 양을 몇마리 데

리고 풀밭으로 몰고가서 양을 치다가 저녁때 몰고 들어오는 목축업을 했을런지 모

릅니다. 이제 가인은 자신이 수고한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그 기

름으로 여호와께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는데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

하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제물이나 다른 무엇을 가지고나갈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범죄한 이후에는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

기에는 양심에 여러가지 부담이 되고 거리낌이 있어서 제물을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가인

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까요? '아마 가인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긴 

드렸지만 정성이 부족하고 무성의했기 때문이 아닌가?' 또는 '그에게는 제사를 드

릴 마음이 전혀 없지만 아벨이 제사를 드리니까 형 체면에 드리지 않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제사를 드렸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

나, 창세기 4장 말씀을 살펴보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

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정성으로 예

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이 참으로 그 정성, 그 예배, 그 제물을 받으셨을까 하는 문

제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정성으로 드렸으니까 하나님

께서 만족하게 받으셨으리라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를 받기는 합니다만 실제로 하

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제사를 다 받으셨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그 부분을 분명히 볼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가 예배를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든지 혹은 구름이 내려와서 덮는다든지 

하는 일들이 있다면 모르지만, 예배를 드릴 때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질 수는 있어

도 우리 눈으로 어떤 형식적인 변화를 발견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저 우리가 만족

하고, 기쁘고, 은혜로우면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러나, 마음에 감동이 오고, 눈물이 흐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제사를 받으

셨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헛되이 예배 드리는 것

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제사,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기도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구제, 하나님이 받

으실 수 있는 생활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그러한 부분을 명백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대로 드리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제사를 드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지 

아니하셨다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제사를 드리려면, 가인의 제사를 왜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

셨고 아벨의 제사는 어떻게 해서 받으셨는지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발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는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가인의 제

사와 아벨의 제사의 차이를 여러모로 성경에서 살펴봐도 잘 알 수 없었는데 어느 

날 두 제사의 차이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제물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발

견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뜻은,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에 아벨의 제사와 다른 부분이 제물이었다고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 

제물은 어떤 제물입니까? 성경은 가인과 아벨이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부분에서 그

들의 마음 상태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또, 가인과 아벨의 정성과 노력에 대해서

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가인과 아벨

의 제사의 차이는 단 한가지, 제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인의 제사를 하나

님이 받지않으신 이유를 제물 외에는 다른 데서는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창4: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땅의 

소산이 무엇이길래, 왜 땅의 소산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렸을 때 받지 않으셨습

니까? 땅의 소산이라면 밀이나 보리, 콩 아니면 감자, 배추 같은 것들이겠지요?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기 때문에 이런 농산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또, 아벨은 양을 치는 자이었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

사를 드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

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을 표현 하는 방법에 있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수 있지 않

습니까? 예를 들어서 아벨이 하나님께 양을 바쳤다고 기록한다면 가인의 제물을 

기록할 때는 밀이나 콩이나 보리 등 어떤 농작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어야 

할 것입니다. 혹은,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땅의 소산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아

벨의 제물은 목축물이나 아니면 목장에서 나는 어떤 것을 드렸다고 표현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인의 제물은 땅의 소산이라고 언급하면서 아벨의 제

물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려고 하는 영적 비밀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 자손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 족보에는 '누구는 몇 세때 

누구를 낳고 또 몇년을 지내다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담의 족보에는 죽었다고 하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는 반면

에, 마태복음 1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 다같은 족보지만 그 표현 방법

이 전혀 다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이 족보에서 하나님은 고의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빼셨다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창세기 5장에 있는 아담의 족보에는 죽음을 볼 수가 있지만 마태복음 1장

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죽음이라고 하는 단어는 전혀 없고 낳고, 낳고하는 

생명의 단어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다같은 족보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아담의 족보는 죽음의 족보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생

명의 족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여호

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세히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

의 깊은 비밀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많이 갔읍니다만 '땅의 

소산으로'하는 그 부분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가장 중요한 이

유를 나타내기 위하여 기록했다는 것을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

사에서 가인의 드린 것이 감자나 밀이나 콩이나 보리같은 그런 농산물임에는 틀림

없지만 성경에서 그 농산물의 이름을 기록하지 아니하고, 통틀어 농산물이라고도 

표현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 귀에 감각이 먼 '땅의 소산'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제물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땅의 소산'

이란 점에 우리의 생각을 축소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인

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가장 큰 이유는 '땅의 소산'이란 그 점에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땅의 소산'은 무엇을 말하고있는 것입니까? 땅은 무엇을 의미하기에 하나

님이 그 소산을 받으시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까? 성경은 종종 땅에 대해서, 흙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육신, 인간성, 우리 육체의 몸을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땅에 속한 흙 한덩어리를 빚어 사람을 만드

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 전도서 12장 

7절에서 우리의 죽음을 '흙은 여전히 땅으로돌아가고'하며 흙이라고 우리 몸을 표

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4장 7절에서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하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보배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질그릇이라 하는 

것은 바로우리 육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흙, 땅, 질그릇 등 흙으로 되어진 모든 것은 우리 육신의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면을 우리에게 굉장히 예민하게 나타내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던 이유는 단하나 땅의 소산이었다는 것입니

다. 우리 인간에게서 난 육신의 노력이나 어떤 생각으로, 또는 육신의 정성으로 

드려지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

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이 바로 창세기 4장의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라

고 말씀드릴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깊은 은혜를 깨닫기 전

에, 참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기 전에는 자기 방법과 수단으로 삽니다. 교회에 나가

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

보다는 여전히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그 문제를 처리하려고 할 때가 많

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 부분의 사람들의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갈 때도 

성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나가지 아니하고 내 자신에게서 나온 좀 선

한 것, 좀 아름다운 것, 그런 것을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기

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받으시지 않겠다는 것입

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는 양의 첫 새끼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 때문인 것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어떤 것도 받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뜻을 우리는 창세기 4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을 좀더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라는 귀절이 세번이 나옵니다. 첫번째는 가인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

은 열납하지 아니하시므로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자 '여호와께서 가인에

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하신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9절에서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였을 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번째로는 가인이 자기의 

저지른 죄와 심판때문에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 15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가인 사이의 대화와 가인의 마음의 움직임을 살펴

볼 때 참 놀라운 사실중에 하나는 세 번 다 똑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가

인의 마음의 태도는 그때마다 달랐고 그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인에게 

다르게 나타나지는 사실을 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마음에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냥 보편적인 마음으로 예배

를 드리거나 그러한 일들을 합니다.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열납되지 않았을 때 가인이 굉장히 분해한 것처럼 우리들도 그러

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위해 착실하게 살려고 

하는데 그러한것이 하나님 앞에 잘 열납되지 아니하고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분해하고, 실망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러

한 위치는 아직 그 속에 분명한 믿음이 임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호

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뇨'하시며 잘못되었다고 권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가인이 두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것은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였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

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인간들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입니다. 가인이 범죄를 했지만 자기 범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려는 마음이 전

혀 없고 오히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며 변

명을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뒤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아

담이 변명한 것과 동일한 태도입니다. 범죄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 때는 하나님

께 대하여 자기 마음에 맞고 합리적이어야 신앙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일단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알게 되면 그 죄에 대해서 회피하

고 변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했을 때 아담을 

심판하신 것처럼 가인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심판하신 것은 가인

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가인이 하나님과의 사이에 가로막힌 죄때문에 계속해서 피

하고 멀어지는 것보다는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돌아와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죄를 지적하시고 가인의 죄를 밝히셨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

자에게 전에 남편 다섯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심으로써 그가 죄를 깨닫도록 하

신 것처럼 '가라사대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 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가인은 그 아우 아벨을 죽였고, 요한복음 8장

의 여자는 간음을 했으며, 사마리아 여인은 정말 추했고, 세리는 세리로써 죄를 

지었는데 여러분들에게는 그들과 같은 죄는 없을지 몰라도 여러분은 죄인이기 때

문에 가인과 같이 여러분의 죄를 심판하기 위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때 가

인은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 마음에 부담이 오고 고통

이 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죄를 짓고도 그 죄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지내

다가 어느 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게 된

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가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첫번째의 분하여 안색이 변하

는 마음과 다르고, 두번째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는 도전적이고 

변명하는 태도와는 다른, 솔직하게 주님 앞에나와서 심판에 대해서 두려워하며 안

타까와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심판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비통함을 하나

님앞에 토하는 말이 가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

수 그리스도께서 십가에 못박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셨고 우리의 모든 

심판을 대신했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듣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내 마음 속의 죄가 확실히 씻어졌다'고 하는 사실이 머리로는 이해되어도 마음에 

분명하게 임하지를 않아서 마음 한쪽 구석에는 늘 죄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양심에 눌림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죄 때문에

고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관한 말씀을들을 때

에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6절에서 가인이 여호와의 음성

을 처음 들었을 때 가인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여호와의 음

성을 들었을 때 그는 변명하고 회피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죄의 심판 아

래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을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첫번째나 두번째와 

다른 새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성경은 어떤 특정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

니라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가 고프지 않으면 밥이 맛이 없

고, 목이 갈하지 않으면 물의 귀함을 모르듯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뉘우치는 가인

의 위치에 들어가지 아니할 때 구속의 사실이 내 마음을 휘어잡을 수가 없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속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음성을 

들을만한 귀가 열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갈증을 느끼는 사람만이 물에 가지게 

되는 그러한 마음의 태도가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가인이 그러한 위치에 들어

갔을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

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

라'(창4:15) 여러분이 죄인인줄 깊이 깨닫고 멸망을 받을 사람이라는 사실 앞에서 

'어찌할꼬'하는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될 때 '어떤 죄나 심판이나 사단이나 불행이

나 네가 만나게 되는 무엇이든지 너를 해치지 못하도록 하리라'는 분명한 표를 하

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하지만 죄를 깨달은 사람과 깨

닫지 못한 사람과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분에게는 죄사함

의 확신이 오지 않아서 여전히 죄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

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때 신선하고 엄숙해 보일런지 모릅니다.그러

나 잠시후 가인이 아우 아벨을 돌로 때려 죽이는 악한 마음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돌로 때려 죽이는 그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원래 가인의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가인의 마음 속에 자기 동생 아우를 때려 죽

이는 악한 마음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는 그 마음이 가려졌고 거

룩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가인이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제사 드릴 때 외형적인 가인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였습니다. 우리도 어떤 때는 하

나님 앞에 기도 드리고 예배를 드릴 때 우리 마음은 참 거룩해 보이고 진실해 보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가서 세상 일을 대하다 보면 우리 마음이 악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 마음에 악한 마음이 있는데 예배를 드릴 때 그 마음이 

숨겨져 있었을 뿐입니다. 악한 마음이 숨겨져 있다가 예배를 마치고 세상에 나올 

때, 다시 우리 마음에서 악이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

리가 예배를 드릴 때도 마음에 악한 것이 있지만 그 선한 생각 같은 것이 악을 덮

어서 선하게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 앞에서는 숨겨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숨겨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거룩해 보이고 엄

숙해 보이고 진실해 보여도 인간 속에 악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드리는 그 예물,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받으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우를 때려 죽일 

때 하나님은 아셨지만 말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 하면 가인 속에 있는 더러운 죄

악이 솟구쳐 남을 가인이 봄으로서 가인에게 자기의 악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

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할 때 우리를 막으실 수 있지만 막지 않으셨습니다.왜

냐 하면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죄인인 줄 별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

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지었지만 남들보다 적게 지었을 때 자신이 그렇게 큰 죄

인이라고 느끼지 않고 있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정말 죄인인 

줄 깨닫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오히려 죄를 짓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자

기가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구

원을 받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을려고 하면 내가 

얼마나 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부질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은 

무서운 말씀이고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 하나님은 그가 죄악을 범할 수 밖에 없도

록 내버려 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

기가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은 가인을 멸망

에서 구원해 주시길 원하셔서 표를 주시고 그 마음을 위로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에게 도전했고 아우를 죽인 그런 더럽고 추한 

악인이었지만 정말 자기가 악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긍휼을 베

푸셨습니다. 간음한 여자나 십자가의 강도나 또 다른 어떤 죄인일지라도 오히려 

그들이 많은 죄를 지었음으로 말미암아 정말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

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

님은 그런 사람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가인, 그는 더럽고 자기 동생을 죽인 악인이었지만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뉘우치는 마음으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여러분도 가인처럼 하나님 앞에 은혜로 긍휼을 입는 사람들

이 되시고 정말 '그렇지 않다. 너를 저주하지 않겠다'하는 위로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음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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