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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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지난 주에 이어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

분들도 종종 그런 경험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마음에 전혀 없었던 

생각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때가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죄를 짓고 싶은 욕망

이 갑자기 우리의 마음에 떠올라 죄의 유혹이 강하게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

자가 전에 볼 때는 대수롭지 않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그때에는 굉

장히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나무로 부각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처음에는 이것을 먹으면 안된다는 거부감이 일어나서 보기도 

원치 않았지만 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흔들려 지면서 전에 

갖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죄의 유혹을 

받아 범죄를 하거나 하려고 할때 냉정한 위치에서 보면 우리들이 그것을 소유해

봐도 별것 아니지만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어떤 테두리 안으로 이끌어 들이게 되

면 마치 하와에게 선악과만 그렇게 탐스럽게 보이는 것과 같은 마음이 우리들 속

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하게 되면 자기들의 허물을 가

릴려고 애를씁니다. 비단 하나님께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가릴려고 합니다. 제

일먼저 범죄한 아담과 하와도 역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화

과 잎으로 만든 치마가 과연 아담과 하와의 허물을 가릴 수가 있었느냐 하는 것

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기들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우는 일을 계속했

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무화과나무잎으로 만든 치마는 그늘에

서는 좀 견딜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햇빛에 가면 곧 말라서 부서져 버리기 때문

에 다시 그들의 허물이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행위로 

허물을 가릴 때에 그것은 그늘 즉, 어두움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빛 앞에 나올 때 그것들이 여지없이 부서져 버리기 때문에 자기 허물을가리는데

는 무익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물론 예수님 외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다 죄인

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모든 죄는 가리워져 있었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그 여자의 죄만 밖으로 드러났지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기를, '선생

님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

를 돌로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신 뒤에,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

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정말 내가 죄가 없는가 

하고 자기 마음을 들어다 보게 되었고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 볼 때 즉시 그들의 

마음에 있는 죄가 떠오르게 되었지요.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어른으로 시

작해서 어린아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물러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

은 자기의 죄와 허물을 어두움 속에서는 어느 정도 가리울 수 있을는지 몰라도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왔을 때에 그 허물이 금방 드러나 버리고 말았습

니다. 마치 무화과나무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을 때에 그늘에서는 어느 정도

자기의 허물을 가릴 수 있었지만 빛 앞에 나올 때 다 부서지는 것처럼 우리가 아

무리 허물을 가릴려고 애써도 그것이 어두운 세상에서는 어느 정도 가리워지는 

것처럼 보일는지 몰라도 빛 되신 예수님 앞에 나오면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끊임없이 무화과나무잎이 마르면 또 새로운 잎을따

서 치마를 만들어 입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

을 하면서 자기의 허물을 가리기에 급급해 있고 분주해 있습니다. 자기 양심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하여, 양심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양심을 가라앉히고 자기의 허물을 좀 덮어보려고 하지만 어두

운 인간들에게 아무리 덮어졌다고 할지라도 빛 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드러

난다면 그것은 무익한 것이 되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끄러운 부분이 있

고 추한 부분이 있고 더러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우리의 행위나 노력으

로나 선행으로 가리지 못한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무

화과나무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있는것을 보시고 그것이 아담과 하와의 허물

을 충분히 가리지 못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는 무화과나무잎은 아담과 하와의 허

물을 온전히 가릴 수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아담과 하와를 

입혀서 그들의 허물을 가리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죽은 그냥 생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가죽이나 말가죽은 어느 말이나 소의 몸을 싸고 있던 귀한가죽이었

습니다. 그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소나 말을 죽여야만합니다. 그리고 

그 가죽으로 가방이나 구두를 만드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노력으로 인간의 허물을 해결하고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셔서, 즉 한 생명이 죽임을 당해서 그를 덮고 있던 가죽이 바

로 아담과 하와의 허물을 가리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죽을 남기기 위하

여 죽은 한 생명-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

스도는 우리의 허물을 가리워 주고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입고 있던 그 

옷이 네 쪽으로 나뉘어져서 군인들이 가져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덮

어주기 위하여 자신의 그 몸을 덮고 있던 그 옷을 벗으셔서 우리를 덮으셨습니

다. 네 조각이란 동서남북,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의미할 수 있는데 그 한 조각 

한 조각들이 정말 우리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고 우리의 죄를 가리워줄 수 있다

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 7절에서,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

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

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죄를 가리

우심을 받는 것은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우리의 어떤 수고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4절에는,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왜 의롭다고 말씀하십니까? 로마서 5장 6절

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경건치 아니한 자는 의롭게 되어집니다. 우리 주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

를 위하여 죽은 그 죽으심은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의 벌을 대신한, 경건치 아니

한 자의 그 모든 경건치 아니함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3장에서는 가

죽옷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허물

을 가리기 위하여 한 짐승을 죽여 그 짐승의 피를 흘리고 그 가죽으로 아담과 하

와의 허물을 가리워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씻으

시고 우리 죄를 덮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주

었다는 사실을 성경이 미리 예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경건치 아니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선인을 위하여 죽으셨다면 선인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고 그리스도께서 경건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경건한 자 만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을텐데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자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경건

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룩함을 입고 구속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담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 자기의 허물을 가리우려고, 자기 허물을 덮어보려

고 부지런히 무화과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드는 것처럼 오늘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무리 아담과 하와가 부지

런히 무화과나무잎으로 치마를 만들어도 그것은 그의 허물을 가리워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그것으로 우리의 허물이나 

죄를 가리거나 덮지를 못합니다. 우리 죄를 씻는 것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 분이 피를 흘리셔서 우리를 정결케한 사실

을 믿는 믿음, 다시 말하면 그 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 가죽옷,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흘리신 그 보혈이 우리 마음에 믿어졌을 

때 우리는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갈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러면 

창세기 3장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만 선악과의 열매는 다만 우

리들에게 선과 악을 알려 주는 역할 외에 다른일을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

들은 연약해서 범죄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기 전에는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죄악인지, 

더러운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아무런 부담

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은 그때부터 인간들은 비로

소 "아, 이것이 선이구나, 이것이 악이구나"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

다. 문제는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 할 수가 있게 되었지만 선을 행할 능력은 없

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열매는 우리에게 선과 악을 알

게 해 주었을 따름이지 우리에게 선한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지는 못했습니

다. 또 우리를 하나님처럼 되게 하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한 것이

다. 악한 것이다"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선과 악을 알고 있다고 해서 선을 

행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을 행하라고 할 따름이지 선을 행

할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죄악 속에 빠져들고 만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 무엇

인지, 악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할 만한 힘

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우리에게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그것을 가르쳐 주

었지 우리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들은 선과 악을 아는 지혜는 생겼지만 선이 없기 때문에 선을 행할려고 노력하고 

애는 쓰지만 선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나타나지지 않는다는 것입니

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열심으로 노력하고 애쓰면 선을 행할 수 있을 줄로 생

각을 하고, 더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면 선하게 될 줄로 생각을 하고 남을 돕고 

구제도 해 보고 합니다만, 그것은 순간적인 흉내에 불과한 것이지 진정한 선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 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선을 행하는 자가 있는가 

살펴 보신즉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시 14:2)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 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선을 행할

려는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모양을 내보고 흉내를 

내보지만 그것은 진정한 선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 당시에 창세기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 하시겠다고 말씀하

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신 우리 인간들의 마음의 생각은 항상 악할 뿐이

었습니다. 우리들은 생각할 때에 어떤 부분은 악하고 어떤 부분은 선하다고 생각

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부분은 진실하고 어떤 부분은 악하다고 생각할는

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보는 기준이고,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악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때때로 선을 행하기 원하

는 마음이 있어서 선을 행해 볼려고 노력을 하고 애를 쓴다고 해서 선한 모양이 

좀되어 지는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 보실 때에 선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이야

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 줍니

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지만 구원의 확신 가운

데 서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면 바로 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

다. 우리 속에 선이 있다면 노력을 행하므로 말미암아 선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

지만, 우리 속에 선이 없다면 선한 모양을 낼 뿐이지 우리 속에 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때 우리 속에 

선이 없는 걸 아시고 우리 속에 선을 행할려고 하는 그 노력을 속히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터오는 선한 삶을 추구하기를 원하셨는데, 우리가 우리 속

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자꾸 선을 행

하려고 노력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

는 노력을 하다가 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걸 깨닫고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착하

게 살고 내가 말씀대로 순종해서 하늘나라에 갈려고 하는 마음에서 백퍼센트 포

기가 왔을 때라야만 우리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의지할 수가 있습

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잘하면 믿음이 좋은 것 같고 내가 잘못했을 때는 하나

님에게 나아가기가 부끄럽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내 행위를 의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선한일을 해야 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구제도 하고 도둑질

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만 그것이 율법적인 차원에서 되어지는 것과 

은혜적인 차원에서 되어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율법적인 차원에서 내가 선을 

행할려고 내 노력과 내 성의를 다해서 선을 애를 쓰는 것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아담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이후에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그들은 옷을 벗고 살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눈이 밝아지자 그들의 허물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담 하와는 범죄하기 

전에는 벌거벗었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전에는 선악을 알만한 지혜가 없었음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벌거벗고 나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

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

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되고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이들과 하나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 하와는 자기의 허물을 가려보려고, 무화과나무잎

으로 치마를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치마를만들어 자기 허물을 가릴려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용기를 주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양심의 죄악 때문에, 아담 하와가 범죄하고 무화과나무잎으로 치

마를 만들어 입고 동산나무 그늘에 숨어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고 

나가지를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어두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지지 않으면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연보를 드리지만 마치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죄악 

때문에 마음이 가로 막혀서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몸은 교회에 나갈 

수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의 문제

를 해결하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

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죄를 해결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입

니다. 죄가 있는 상태 속에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기 때문에 

죄가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만 참된 평화와 위로

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만 진정한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

님은 죄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고통하

는 우리 인간들을 불쌍히 보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사 우리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했고 또 우리가 범죄했다 할찌라

도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수 있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우리는 범죄했고 또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은 결과로 우리는 이제 이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악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이제

는 그 문제가 정리되어지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도 담대히 나아갈 수

가 없습니다. 연보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해도 그 마음에는 죄악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

하심이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 -2) 죄가 우리 마음

을 가로 막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를 못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온전

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나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주의 은혜를 입어

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하등의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로 내 모든 죄가 씻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고, 또 내 

마음이 온전히 열려져야만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온전히 임하실 수가 있다

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

가의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서 어느 누구든지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온전한 구속을 이루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성경의 어떤 한 부분에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구약 

66권속의 수없이 많은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보혈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온전케 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부끄러움이 없

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될 때에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그 죄를 온전히 씻으신 분은 우리가 아니고 예수

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나 행위에 달려 있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해 놓으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되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할수 있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죽

지 않으셨을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

속을 이루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예수님 그 분이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

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보실때 만족

하리 만큼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을 믿는 자는 예수님이 죽었지만 그 예수를 믿는 믿음은 내가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은 것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천 년 

전의 갈보리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죽음입니다. 예

수님께서 이천 년 전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죽음은 예수님의 죄 때

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고 그 죽음에서 우리의 죄의형벌

이 끝났으며 우리 죄의 심판이 끝이 났고, 우리의 죄의 징벌이 끝났으며, 우리 

죄의 심판이 끝이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다른 형벌이 있을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에 의롭다고 말씀하셨음으로 우리는 담대하고 당당

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행

위나 그 어떤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고 깨끗하게 

살고 말씀대로 잘산다고 해도 예수의 구속없이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못나고 추하고 더럽고 악하고 추

하여 십자가의 강도처럼 악하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 노력, 우

리의 어떤 선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만을 의

지하고 그 구속을 힘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것이 바로 온전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

었느니라' (롬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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