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1996년05월08일(수) 14시07분54초 KST 제 목(Title): [한백설교] 부관참시와 청산주의 5월 5일 설교 부관참시(剖棺斬屍)와 청산주의 김진호 한백교회담임전도사 사사기 5장 56하느님은 아비멜렉에게 자기 형제 일흔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의 값을 이렇게 갚으셨고, 57또 세겜 사람들의 죄악도 그들에게 모두 갚으셨다.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이렇게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어린 시절엔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따위의 단어들을 연상하면서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5월을 맞이했습니다. 좀 더 자라서는 '신록'이나 ' 새생명' 같은 단어가 연상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5월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슬픔'의 계절이 되어 버렸습니다. '격정'의 계절이 되어 버렸 습니다. '분노'의 계절이 되어 버렸습니다. 불타오르는 분노의 계절 5월!우 리의 분노는 최루가스 속에서 싹이 돋고 열매를 맺고 그 씨앗을 널리 퍼뜨 렸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권력에 희생된 썩은 주검의 잔해를 먹고 잉태 했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쓰러져 간 이들의 아우성과 절망의 현장 한 가 운데서 희망으로 자라났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마침내, 문득 닫혀진 문을 열고 비끔이 고개내민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홀연히 막연한 희망의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어느 만큼 이뤄낸 듯한 민주화라는 열매 를 댓가로 지불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댓가로도 우리의 분노를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최근 우리는 전직 대통령 두 명을 포함한, 지난날 권력을 휘둘러 댄 일단의 사람들에 대한 기소와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네들은 권력에 대해 우리가 분노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르쳐 준 이들이었습니 다. 우리는 어느 만큼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면서도, 신문이나 TV보도 를 보면서, 마치 이제서야 그것을 알게 되기라도 한 양, 새삼스레 놀라운 척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이네들은 우리들의 아직 남은 분노가 터져 나올 배출구였습니다. 더욱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시름많은 세상살이 속에 서 얻은 씁쓸한 기억들이 분노로 돌변하여 그들을 향해 폭발합니다. 어느 덧 어느 것이 그네들로 말미암은 이유 있는 분노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부관참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전에 그 죄값을 다 치루지 못했다 고 생각되는 이의 시신을 훼손함으로써 그를 향한 대중의 남은 분노를 분 풀이하는 것입니다. 이 분풀이의 대상은 필경 수많은 원성의 진원지였을 것입니다. 생전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한(恨)이라는 글자를 뜸질 해 새겨 놓았을 겁니다. 그러나 생전에 그는 기름기 흐르는 얼굴로 호의 호식하며 칭송하는 나팔수의 합창소리를 한몸에 받은 채 살다 갔습니다. 어쩌면 질병이나 그밖의 어떤 재앙으로 고통스런 최후를 맞이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죽음은 그의 소행의 댓가를 충분히 치루 지 못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대중의 분노가 아직 퍼렇게 멍든 채 남아 있 습니다. 그리하여 이 분노가 시신에게라도 준엄한 '역사의 심판'으로 폭 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입니다. 현존하는 권력은 한 죽은 이를 부관참시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역사의 심판의 대행자가 됩니다. 현존하는 권력은 이로써 이 원성의 주역으로 대표되는 지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려 합니다. 이로써 현존하는 권력은 자신이 지나간 권력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임을 부각시키게 됩니다. 실 제로 자신도 지난 권력과 별 차이 없는 부정직한, 혹은 난폭한 권력자에 불과할지라도 말입니다. 부관참시는 흔히 역사의 복수라는 이름으로, 지나간 역사의 청산이라 는 이름으로 시행됩니다. 마치 이것으로 새 역사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마치 이것으로 대중의 분노가 더 이상 생길 이유 없는 세상이 올 것처럼 말입니다. 마치 이것으로 신명나는 대중의 역사가 도래 할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새 세상은, 정의로운 세상은, 분노할 것 없는 세상은 그렇게 쉽게 도래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넘어가야 할 고개가 많고 여전히 건너야 할 강이 많습니다. 오늘 읽은 성서 본문은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입니 다. 그는 사사들의 시대, 왕 없는 평등주의 사회의 영웅들의 시대의 한 인 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기를 '위대한 민중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 런데 아비멜렉은 이 위대한 시대가 '가을'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신호탄 같은 인물입니다. 그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이스라엘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의 아버지는 기드온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영웅이 자 이스라엘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강력한 지도자였습니다. 오랜 전쟁 탓이기도 했을 것이고 각박한 생존 현실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어쨌 든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좌절과 절망의 심정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분명한 대상 없는 막연한 불만이 변화를 갈구하게 ㎎습니다. 이런 사회 현상은 희생양을 갈구합니다. 희생양을 갈구하는 집단 심리는 누군가를 향한 무분별한 한풀이를 추구하는 심정(가학성)과 또 누군가에 의해 무자 비하게 학대당하고픈 심정(피학성)이 교차하면서 일어납니다. 이런 집단 심리는 이스라엘이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표현 됩니다. 기드온이라는 인물은 이스라엘의 분노심을 미디안 족속이라는 외부의 적으로 집중하게 하는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존경하 는 그가 왕으로 군림하여 자신들을 억눌러 주길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 나 기드온은 왕이기를 거절합니다.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에는 지도력의 구멍이 생깁니다. 또한 분노 의 방향이 상실됩니다. 바로 이때 아비멜렉이 나타나 지도자를 자칭합니다. 그런데 그가 지도자가 되려 했던 경로는 외부의 적을 막아냄으로써가 아니 라 자신의 경쟁자들인 내부의 동족을 학살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출신 지역민의 지방색을 부추깁니다(그의 고향인 세겜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자기 주장이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성공은 곧 전 이스라엘의 지방주의를 초래합니다. 바야흐로 이스라 엘 각 지방민은 각기 타지방 사람들에 대한 경쟁감, 나아가 적대감으로 서로를 향해 분노하는 존재가 됩니다. 아비멜렉은 '왕 같은 존재가 됩니다. 물론 그가 통치하던 지역이 이스 라엘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는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경험해 왔던 사사들과는 판이한 존재임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고자 했고, 이스 라엘은 왕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가혹한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됩 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필경 이 군대의 역할은 '훈련된 보호자'가 아니라 '훈련된 약탈자'였을 겁니다. 결국 그의 본거지 였던 지역마저 그에 대한 반기를 들었고, 아비멜렉은 왕 같은 존재가 항 명자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 줍니다. 이제 이스라 엘의 흩어진 분노를 그를 향한 분노로 집중됩니다. 아무도 당해낼 수 없을 만치 강력한 군대를 이끌던 지도자인 아비멜 렉. 잔인한 보복으로 그 포악성, 그 야수성을 마음껏 발휘한 왕 같은 존 재 아비멜렉. 그러나 성서는 그 용맹함, 그 강력함, 그 포악함에도 불구 하고 그의 최후를 어처구니없게도 수세에 몰릴 대로 몰린 한 여인이 내던 진 맷돌에 머리통이 깨져 나자빠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대중의 불길 같은 분노와는 전혀 별개의 현상으로 질곡의 역사가 종식됐다는, 역사의 분노 에 대한 성서의 비웃음을 엿볼 수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영웅이 되고 자 했고 스스로 그에 비견되는 강력한 이미지를 발휘하려 했던 이 왕 같은 존재는 영웅답지 못한 최후를 갑작스레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불로소득처럼 얻은 그의 죽음으로 마치 역사의 청산이 이루어 진 양, 분노의 현실이 해결된 양, 각기 자기 사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사울과 다윗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다시 왕을 갈구했고, 이때도 역시 지역주의로 난자당한, 동족을 향한 분노가 그 배경 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번엔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민중의 시대'는 영원히 전설로만 남겨져 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성서 본문에서 아비멜렉을 '부관참시'하는 후대 이스라엘 의 왕국시대의 위장된 청산주의를 교훈처럼 읽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표 면상 이 단편 이야기는 아비멜렉을 희생양으로 삼아 하나의 교훈과 결말을 짓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스라엘 대중의 분노가, 고난의 표현 이, 항거의 일어섬이 얼마나 변덕스럽게 방향을 잃은 채 역사의 가시밭 속을 배회하고 있는지를 냉소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모든 것의 해결이 아 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가 위장된 청산주의와 얼마나 쉽게 결 합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민재판은 부관참시의 모양으로 분노를 극화시킨 위장된 청산주의의 씁쓸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시대의 전 아무개, 노 아무개의 기소와 재판으로 표현되는 '새역사 만들기'라는 구호도 필경 이와 비슷한 허망 한 청산주의로 귀결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 하면서, 이미 보복의 능력을 상실한 속죄양의 부관참시로 대리충족함으로 써 모든 것을 해결한 양 뿌듯해하면서 흩어져 버리게 하는 그런 청산주의 로 말입니다. 이것은 원칙 없이 동요하는 분노, 성찰하지 않는 분노, 시 대를 읽는 눈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 분노, 게으른 자들의 분노, 무지한 자들의 분노와, 자신들의 횡포와 권력 남용을 은폐하려는 교활한 자들의 술책이 결탁한 역사의 암울한 구성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성서를 바로 읽는 뼈아픈 훈련을 해야 합니 다. 우리 역사를, 세계의 변화를 바로 읽는 힘겨운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중심주의', '우리 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너 너 희 저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열고 상호소통의 세계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독백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과 세상 속에서 대화하는 신앙의 나라를 향한 탐구를 갈구해야 합니다. ▣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SC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