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속한 생명 지난번에 이어서 창세기 1장 20절에 있는 다섯째날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 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지난번에는 창세기 1장에서 네쨋날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신 이야기를 했습니 다. 오늘은 하나님이 다섯째날에 만드신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섯째날에 공중의 새와 바다의 움직이는 물고기를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새는 바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공중의 새가 왜 성도를 의미하느냐 하면, 여섯째날에 만든 짐승들은 땅에 속해 있고 다 섯째날에 만든 공중의 새는 바로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은, 날을 수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 합니다. 독수 리, 비둘기, 갈매기, 이런 새들은 먼저 알로 태어나서 알에서 깨어나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새가 되는 것입니다. 새 뿐만 아니라, 파리와 모기까지도 나는 모든 것 은 두 번 태어나지 않으면 날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수구에 모여 있는 짱구벌레 가 거듭나게 될 때 모기가 되고, 더러운 곳에 있는 구더기가 변해서 파리가 되 고, 굼벵이가 변해서 매미가 되고, 물벌레가 변하여 잠자리가 되는 것처럼 하늘 에 속한 모든 것은 일단 거듭나야 하늘에 속해 날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 처럼 땅에 속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백성이 되려고 하면 우리 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신 령한 하늘 나라에 대하여 알 수 없는데, 하나님은 천지 창조를 통하여 이것을 우 리들에게 나타내 보이고있습니다. 다섯째날에 공중의 새를 만드셨는데 우리가 날 짜에 대하여 살펴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숫자에는 영적인 의 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3'이란 숫자는 삼위일체, 즉 하나 님의 숫자입니다. 그리고 '4'라는 숫자는 고난을 나타냅니다. 항상 성경에 '4'자 가 들어갈 때마다 고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신 것이라든 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동안 광야 생활을 했다든지, 이 '4'자는 항상 고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6'이라는 숫자는 항상 인간을 나타내는 반면에 '5'라는숫자 는 은혜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노력이나 댓가 없이 주어지는 것 입니다. 예를들어서 100만불 짜리 물건을 단돈 1불이라도 주고 산다면 그것은 은 혜가 될 수 없습니다. 10만불씩하는 비싼 차를 1달러라도 내면 그것은 절대로 은 혜가 되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것은 전혀 값을 지불하지 않고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얻는 것입니다. 값이나 노력이나 무엇을 지불해서 얻어지 는 것은 은혜가 되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 는 것은 우리의 열심으로 노력하고 수고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 력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값없이 받아드리는 것 이라야 그것이 진정한 거듭나는 길입니다.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어떤 노력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은혜로 값없이 되어진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하여 하나님께 서 공중의 나는 새를 만드실 때 다섯째 날에 만드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 다.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다섯째 날에 만든 공중의 새와 여섯째 날에 만든 땅의 짐승과의 비교입니다. 여섯째 날에 만든 땅의 짐승은 육에속한 인간을 나타내고 공중의 새는 거듭 나서 신령한 삶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를 나타 내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주자주 성도를 공중을 나는 새에 비교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고 하시면서 그 가치없는 참새지 만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주 님은 '공중의 새를봐라. 농사도 아니하고 창고에 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먹 이신다'고 하는 말씀을 통하여 새는 성도를 가르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 습니다. 새는 성도를 가르키는데 성도들의 신앙의 삶이 땅에 있는 사람들과 어떻 게 다르냐하면 땅에 속한 짐승들은 스스로 인력을 벗어나서 공중을 날 수 없지만 공중을 나는 새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공중의 새는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인 력이 아무리 당겨도 날개로 훨훨날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의 유혹이 올 때 그것을 이겨내고 반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날개 쳐 힘있게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 다. 구약성경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끈덕 지게 요셉을 유혹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의지가 강했거나 어떤 인간의 힘이 그것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주 셨습니다. 믿음은 육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없는 한계를 벗어나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의 사람은 한계에 도달했을 때, 절망하고 좌절 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계를 뛰어 넘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땅의 짐승들은 뛰어봤자 몇 발자국 밖에 못뛰지만 날개를 가진 새들은 아무리 먼 거리라도 날아 서 갈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정말 마음이 약하고 추하고 더러운 인간이어서 세 상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지만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결단력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가지고 자기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자기 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일들을 이루는 사람으로 변해지고 맙니다. 성경에서 다윗 은 연약한 소년이었지만 믿음을 가지고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아기를 낳을 수 없었지만 아들을 얻는 기쁨을 얻은 사실이라든지 그 외에도 하나 님 앞에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은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자기 들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테두리를 벗어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믿음 은 금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새가 두번 태어나서 날 수 있듯이 여러분이 죄를 사함받고 거듭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귀한 자녀로 택함을 입을것입니다. 이어서 바다의 물고기를 만드신 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공중의 새도 성도를 가르키지만 바다의 물고기도 성도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깨서 세상 에 계실 때에 자주자주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천국은 마치 바다에 그물을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것과 같으니 물가에 올려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을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지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 라'고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즉, 물고기는 의인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의인을 성경은 물고기로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왜 성도를 물고기에 비유 했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창세기의 노아의홍수에 대한 이야 기 속에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노아의 홍수에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아의 방주 안에는 노아의 여덟 식구 뿐이 아니라 땅의 기는 것과 육축 등 모든 생물이 방주 안에 들어 갔습니 다. 방주의 문이 닫히고 그날부터 굉장히 많은 비가 40 주야를 와서 방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 세상의 모든 동물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비는 하나님의 심판을 내리는 것을 가르키는데 심판이 내릴 때 이 땅의 모든 생물이 다 죽임을 당하지 만 바다에 있는 물고기에게는 심판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려지는 심판이 바다의 물고기를 심판하거나 멸망시키지는 못했다는 것을 우리 는 너무나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다의 물고기는 왜 하나님이 심판을 하 실 수가 없었는가 하는 문제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기 전에 우리 마음이 두근거리게 되고 죄를 짓고 나면 우리 마음에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죄의 두려움이 우리안에 들어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그 가책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어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내가 죄를인하여 벌 받는 것이 아니냐하는 두려움이 있게 되고 그 죄의 가책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 도를 이 땅에 보내사 죄를 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 마음 속에 죄를 말미암아 일어났던 가책이 지워지지 아니하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죄를 사했다고 하지라도 그 가책이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동안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장벽으로 가리워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사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 죄를 사해 놓으셨을 뿐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우리 죄를 사해 놓은사실을 나타내 주셔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사해 주었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 속에 임하게 될 때에 그 죄는 우리를 심판할 수가 없고 다시는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고 갈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이제 더 이상 그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 를 분명하게 씻어 놓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 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분명히 내가 받아야 할 죄에 대하여 심판 을 받으시고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시고, 내 죄의 모든 책임을 그가 담당하 셨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지었지만 이미 주님이 대신 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벌을 받을 수가 없고 멸망을 받을 수 없고 저주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 입니다. 만일 내가 도둑질을 해서 6개월 동한 형을 살았다면, 그 감옥에서 죄의 값으로 징역을 살았다면, 6개월을 살고 나온 이후에 내가 도둑질한 죄에 대한 기 억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도둑질했다고 놀릴는지는 몰라도, 그 죄는 나를 다시 감옥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나를 재판자리로 끌고 가지 못하는 이미 형벌을 받은 죽은 죄입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에 우리의 모든 죄도 심판을 받았고 우리의 모든 죄에대한 저주가 끝이 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는 어떤모양으로도 어떤 절차로도 우리의 죄에 대 하여 다시 벌을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죄는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았 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죄는 다시 우리를 심판할 수 없고 그 죄는 우리를 다시 지옥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 실이 마음 속에 믿어졌을 때 내 마음이 죄에서 해결되며 내 마음이 죄의 고통에 서 해결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죄를 깨끗하게 온전하게 씻었고 내 죄에 대한 심판이 끝났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자기가 저질러 온 과거의 죄나 현재 저지른 죄에 대하여 하나님과 거리가 생겨지 지 않고 그죄를 위한 두려움이 없으며 그 죄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 가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마음에는 예수 그 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어 흘리신 보혈이 흐르고 있어서 어떤 죄던지 그 마음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어떤 죄도 그 마음을 더럽히지 못합니다. 그것이 마치 아무리 심판이 내려와도 바다에 있는 물고기는 심판이 되어지지 않는 것처럼 정말 이 세 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와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흰 눈보다 더 깨끗이 씻 었다고 확실하게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심판이 내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악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을 수 없고, 가책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않고, 소망과 믿음과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집니다. 우리는 지난번 에 신앙의 착각에 대한 부분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무엇을 믿으려고 합 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흰 눈보 다 더 희게 씻고 정결케하신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다시 여러분의 마음 속에 가 책이 되는 부분에서, 두려움에서, 어둠에서 벗어나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거룩 한 관계로 교제가 이루어져서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속에 넘쳐나게 되기를 바라면서 다음에 계속 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