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안 돌매다) 날 짜 (Date): 1994년08월31일(수) 09시31분43초 KDT 제 목(Title): [문학속의 그사람] 예수(from HAN) 한겨레신문(HAN) 한겨레신문사 기사분류: 16. 문화/환경/과학 기사일자: 94/08/31 제 목: [문학속의 그사람] 예수 PAGE: 1/ 7 ------------------------------------------------------------------------------- 종교 창시자들의 생애는 신성화의 연막에 둘러싸여 있게 마련이다. 신 비화 작업의 선두에 선 제자들이 위대한 문학가였듯이 이를 세속화시키는 데도 역시 문학인이 앞장섰다. 문학이야말로 신성모독죄를 저지르기에 가 장 적합한 자유로운 영혼의 조종자이기 때문일까. 인류 역사의 시간 측정단위의 기준이 되어버린 기독교는 세기가 지날수 록 지구촌에서의 점유율이 높아가는 추세인지라 이에 대한 작품을 일별하 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특히 비기독교 문명국에서 는 예수를 민족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투사로 보는 경향이 짙음을 느낄 수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터키 통치 아래서의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에서 사제와 그 주변인들이 이방인 에 빌붙어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더럽히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약방을 벌여놓고는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면서 무게에 따라 그 리스도를 분배한다. 그는 돌팔이 의사처럼 무슨 병이든지 고친다고 허풍 을 떤다. `당신은 무엇이 탈났습니까?' `거짓말을 했어요.' `좋습니다! 그리스도 3g을 쓰십시오. 그만한 피아스타를 내십시오.' `나는 도둑질을 했습니다.' `4g의 그리스도를 사용하세요. 그만한 돈이 되겠어요?' `나는 살인을 했소.' `오, 가엾은 사람. 당신은 매우 중병이오. 오늘 저녁 당신 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15g의 그리스도를 복용해야 하오. 값은 굉장하오. ' `조금 깎을 수 없을까요? 사제님.' `안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죄값에 당연한 값이오. 지급해야 하오. 아니면 당신은 지옥 아랫목으로 가게 될 거요.'" 예수를 처형했던 권력이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역시 그를 다시 처형한다 는 비판의식은 기독교의 부패상과 함께 줄곧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는 단 골 주제이다. 포이에르바흐나 르낭의 예수 해석관 이래 신으로부터 인간 으로 세속화시키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더욱이 비기독교 문명국 중 가장 신도와 교회를 많이 가진 우리나라의 문학에는 그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나 있다. 개화기 때 일제의 민족침탈에 의한 고통을 기독교 신앙으로 달래는 장면(<몽조>)부터 우리 문학에서 기독교는 영적인 교류에 치중해 왔다. 이기영의 단편 <부흥회>처럼 극단적인 반기독교적 문학이 있었지만 8. 15 이후의 미국화 문명 속에서 예수상은 우리에 돈민족보다는 인류 전체 를, 독립보다는 국제협력을 더 소중히 여기는 파토스였다. 그런데 1958년 우리나라에서 예수상을 모독한 작품으로 작은 소란이 일 어났다. 문제의 작품은 송기동의 <회귀선>(<현대문학> 5월)이란 단편이었 다. 이 소설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과 닮은 칼프시스에게 은 백삼십 냥을 주고 꼬여 자기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도록 해두고는 막달라 마 리아와 공모하여 그 시체를 치우고서 자신이 부활한 것처럼 꾸민다. 물론 바보같은 칼프시스에게 법정에서부터 십자가에 매달릴 때까지의 전과정에 대하여 철저히 교육시켰으며, 특히 "마지막 십자가에서 해야 할 말을 가 장 많이 연습시켰는데도.그 바보 녀석이 그만." 실수로 너무나 고통스 런 나머지 "옐리 옐리"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작가는 쓴다. 소설에 따르면 이어서 부활한 듯이 꾸민 예수가 마리아와 동거하게 되 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간절하게 예수의 육체를 탐하여 유혹을 거듭하지 만 끝내 인간적인 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 극진한 마리아의 사랑도 아랑 곳없이 예수는 지상에서의 생명을 끝낸다. 홀로 남은 마리아가 그의 아랫 도리를 풀어 헤치기 시작했고, "배꼽에서부터 한 뼘쯤 밑에 마땅한 형태 도 갖추질 못한 채,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한점 살만이 꼬부라져 있을 뿐. 그 밑에 또한 맞붙어서 둥그렇게 늘어져 있어야 할 그 무엇이 없었 다"고 소설은 쓴다. 당연히 이 소설은 문제가 되어 잡지사쪽의 사과로 끝났는데, 아마 예수 상의 왜곡 중 대표적인 한 예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하여 차옥혜 시인은 장시 <바람 바람꽃-막달라 마리아와 예수> 에서 마리아를 독립투사의 딸로서 로마 병사들에게 윤간당한 것으로 그리 고 있다. 그는 예수를 추종하면서 특히 고난에 처해서 다른 제자들이 도 주했을 때도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마리아를 바 라보며 "나의 마음을 읽는 여자/내가 떠난 후에도/나의 넋을 안고 살 여 자"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여기서 예수는 영원한 인류의 평화를 수호하 는 신앙의 대상으로 승화된다. 우리 문학에서도 예수를 민족해방의 투사나 핍박받는 민중의 벗으로 풀 이한 예가 있다.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가 이상적이고 천상적인 예수 상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그와 순수문학 논쟁의 맞수였던 평론가 김동석은 철저히 예수를 민족운동의 기수로 보았다. 김동석의 예수관 중 가장 탁월 한 부분은 빵 다섯 조각과 생선 두 마리로 5천여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대목에 관한 것이다. 이를 김동석은 먹을 때가 되 자 예수 자신이 가졌던 빵 다섯 조각과 생선 두 마리를 내놓고 5천여 청 중을 향하여 함께 먹자고 하니 감격한 군중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던 먹을 거리를 내놓아 나눠먹고도 남은 것으로 풀이했다. 그 진위야 어쨌건 현대과학도 부인할 수 없는 기적임에는 틀림없는데,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예수상은 민족과 역사와 힘 없는 자에게로 나 아간다. 시인 정호승은 시집 <서울의 예수>에서 "나는 어젯밤 예수의 아 내와 함께 여관잠을 잤다"(<가을 일기>)고 쓴다. 그리고 "예수가 겨울 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거나,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서울의 예수>)고도 쓴다. 이런 예수상은 시인 김정환의 <황색 예수전>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제1 편에서 예수의 인간학적인 해석을 바탕삼아 정치사회학적인 의미를 탐구 한 뒤, 2부에서는 예수의 육신이 아닌 이념을 사도들의 활동을 통해 조명 한다. 여기서 이미 예수는 황색인화하는데, 제3부에 이르면 이미 예수나 사도는 사라지고 고통받는 우리 시대의 국민대중 전체를 예수로 승화시킨 다. 이것은 곧 카잔차키스의 논리와 통한다. 어떤 성인도 문학에서는 야유와 비꼼으로 뒤틀리기 일쑤다. 그러나 어 떤 야유도 인간적인 구원의 측면에서 본 예수, 특히 핍박당하는 자의 편 에 선 예수의 모습을 지울 수는 없었고, 그런 뜻에서 우리 문학은 아직도 바람직한 예수상을 창출하지 못했다고 하겠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