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cookie () 날 짜 (Date): 2004년 3월 3일 수요일 오후 04시 57분 04초 제 목(Title): Re: 큰어나니의 기독교 논쟁에 대해.. 그 원죄론이 기독교의 핵심교리중에 하나죠. 그 죄의식을 파고들어서 내가 다 용서해줄테니 나를 신으로 섬기거라 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 원죄론이 자명한 공리는 될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한 이단론도 있습니다. 저는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드는 군요.. -------------------------------------------------------- Ⅲ. 인간론적 이단성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신앙의 종교이다. 그래서 신학 발전과정을 보면 최초의 관심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기독론이었고 그 다음은 신앙의 주체가 되는 인간론이었다. 이제 인간론적 이단성에 대하여 분량적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기독론적 이단성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그 성격상 약간이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인간론의 주된 내용은 인간의 본래 상태와 타락 그리고 그 결과이며 구원론과 은총론으로 연결된다. 이 문제는 성향상 사변적 경향이 강한 동방교회보다는 실천적인 서방교회가 주로 다루게 되었다. 이 문제는 교회사에 있어서는 펠라기우스 논쟁으로 알려져 있다. 펠라기우스 (Pelagius, 418)는 영국 혹은 아일랜드의 수도사였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켈리스투스 (Caelistus)와 줄리아누스(Julianus) 두 사람이 가장 열정적인 지지자였다. 펠라기우스의 주장 가운데 인간의 죄와 자유의지 그리고 은총에 관하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죄는 인간 본성의 상태에서나 의지의 경향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은 그의 후손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행위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펠라기우스는 원죄의 교리 혹은 대대로 전달되는 죄된 성향에 관한 가르침을 배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반대로 선택할 수 있는 힘 혹은 이른바 현실적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옳은일을 행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능력을 가진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옳은 율법을 부과하였은즉 인간은 그것을 성취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인간이 죄된 생활을 극복해 나가는 것은 불가피한일이 아니다. 펠라기우스의 은총에 관한 가르침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 및 자유의지에 관한 견해와일치되어 있었다. 펠라기우스는 진정한 의미의 은총을 믿지 않았다. 그는 은총은 영적 능력에 미치는 하나님의 세력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은총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이성을 계발시켜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며 그리하여 자신의 능력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은총은 돕는 힘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인간은 그러한 도움 없이도 옳은일을 행할 수가 있으므로 은총은 절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단지 상대적 의미에 있어서만 필요한 것이라고 펠라기우스는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役事)는 단지 인간 의지의 바른 행위를 도와주는데 지나지 않는다. 기독자의 완전은 그러므로 개인이 덕성과 선행을 쌓아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참된 기독교적 생활의 필수적인 근거로 신생(新生)된 마음이 요구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어거스틴의 공격으로 벌어진 논쟁은 기독교에 관한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입장의 대립이었다. 결국 펠라기우스주의는 412년 칼테이지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펠라기우스의 추종자였던 켈리스투스가 파문당함으로써 교회에 의하여 배격되었으며 또한 418년에 열린 칼테이지 종교회의와 제 3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인 431년의 에베소 회의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는 정죄를 당하였다. 인간론에 대하여는 펠라기우스 논쟁 이후에도 반펠라기우스 (Semipelagius)논쟁에서 계속되었고 그 후에도 교회사를 통하여 줄기차게 대두되었던 문제이다. 은총의 필요성을 상대화하고 그리스도의 속죄 공로를 격하 혹은 무시케 하는 낙관적인 인간론은 기독교의 뿌리를 흔드는 엄히 경계해야 할 기독교의 이단성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