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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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luvhurtz (  송 훈)
날 짜 (Date): 2003년 7월  8일 화요일 오전 06시 49분 59초
제 목(Title): 청부(淸富)와 훌륭한 거부(巨富) 곁에서 서




청부(淸富)와 훌륭한 거부(巨富) 곁에서 서성대는 예수
한종호  

이 세상에 누가 가난으로 쩔쩔 매면서 살고 싶을까? 누가 또한 부유한 삶을 
거부하고 싶어할까? 그런데 진정 양심적으로, 깨끗하게 부자가 되는 길이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복임을 확인할 수 있기만 한다면, 
그러한 부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세상살이에서도, 신앙 안에서도 모두 성공할 수 
있는 길일 텐데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가 
대조되는 세상, 그래서 누구나 다 부자 아빠가 되고 싶어하는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인의 양심은 어디를 향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금욕적 물질관 vs 물질의 풍요=복 
김동호 목사의 『깨끗한 부자』와 강준민 목사의 좬형통의 원리를 상속하라좭는 
두 책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들이 고뇌하는 물질의 문제에 대하여 ‘청부’와 
‘형통’이라는 관점으로 우리들에게 그 대답을 내놓고 있다. “깨끗한 
부자”와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 잘 되어 간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구호도 
없을 것이다. 손가락질받는 부자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존경을 한 
손에 거머쥘 방도가 있다면 그야말로 ‘짱’이다. 양손의 떡이다. 
게다가 믿음만 좋으면 그저 영적 성숙만이 아니라 물질적 형통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판국에 마다할 까닭이 없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뭐 
문제인가, “잘 벌어서 잘 쓰면 되지”라는 주장, 또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데 시비거리가 될 수 없다. 물질에 대한 탐욕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있는 ‘기복주의’라는 비난도 이렇게 면할 수 있다. 신앙과 물질이 모두 
풍요하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태, 실로 ‘종교적 엑스터시’가 아니지 않는가? 
신앙이라는 것이 기뻐야지, 늘 주눅 들고 빌빌거리고 물질적으로도 영 시원치 
않고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그런 신앙생활을 
하겠는가? 그러니 김동호 목사와 강준민 목사의 논지는 사뭇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믿음으로 록펠러와 같은 거부가 되고, 그도 부족하여 신앙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떠받들림을 받는 위치에 오른다면, 최상의 성공이 된다. 그리고 
그 성공이 곧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복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는 상황에 
이르면, 그의 현세적 삶에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는 셈이 된다. 
하지만 이 책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깊이 살펴보면, 부유하지 못한 이들이 
겪어야 하는 고뇌가 자칫 그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결과로 인식될 수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빈부 차이의 해결에는 전혀 관심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다. 잘살지 못하는 것은 다 믿음의 중심에 제대로 된 
물질관이 없는 탓이며, 사용만 잘하면 모두에게 감격적인 즐거움이 되는데 
신학적 견해가 왜곡되는 바람에 엉뚱하게 부자와 강한 자를 비난이나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뿐만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현실에서 ‘부’의 문제가 인간에게, 그리고 인류의 
삶에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그 뿌리를 보지 않고 그 누림에만 
주목함으로써 자칫 부유한 자들에게 양심의 고통을 덜어주고 부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이 이른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집약되어 부유함이 하나님의 은총을 확인하는 명백한 증거처럼 
내세워질 수 있는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이 부자와 강한 자에게 신학적 면죄부를 발행하는 것이 된다면, 
그래서 이들에게 양심의 고뇌를 할 필요가 없게 해주면서 지금 사는 것이 다 
그런 대로 하나님 안에서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식이 된다면 이것은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아름다운 부(富)가 과연 무엇인지, 그래서 그 부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세상에 기독교 신앙의 빛을 발하는 것이 되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에서 물질의 문제 
기독교 신앙에서 물질의 문제는 크게 나누어 보면, 첫째, 금욕적 물질관과, 
둘째, 물질의 풍요와 복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나뉜다. 기독교 역사에서 오랜 
세월, 세속에 대한 부정,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긍정은 물질에 대한 금욕적 
자세를 낳았으며, 그로써 자연 청부보다는 청빈이 신앙인의 종교적 덕목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과 ‘물질의 신’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금욕적 물질관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질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 되면 자연 그 물질에 대한 탐욕이 자라고 그로써 물질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예 그럴 소지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깨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서구 사회가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을 
밟아 나가면서였다. 금욕주의적 자세가 하나의 엄격한 종교 윤리적 기준으로 
작용할 경우, 부를 축적하는 행위는 정죄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물질을 손에 넣는 행위, 그로써 세상에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은 
신앙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이를 교리적 확신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칼빈의 은총관이 자본주의 초기 태동에 필요한 상업주의적 발상과 자세를 
기르게 되었다는 점을 갈파한 막스 베버의 논리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한 
결과였다. 그는 자본주의 발전과 개신교의 물질관, 은총관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자본주의적 물질관의 뿌리를 개신교의 신학적 관점에서 
찾았다. 즉 중세 가톨릭 교리는 금욕주의적 물질관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의 
물질적 축적보다는 교회의 물질적 축적에 치중하게 만든 반면, 가톨릭에 반기를 
든 개신교의 경우, 그 주체세력인 초기 부르주아 계급의 물질적 기반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이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신앙인들에게 
물질의 축적이 신앙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열심히 노동하고 함부로 
쓰지 않고 잘 모아 부유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명백한 현실적 증거라는 논리가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교리는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보다 발전해 나가면서 아예 물질적 
풍요가 곧 복이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나갔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이른바 
근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와 같은 ‘물질의 
풍요=복’이라는 등식의 기복주의적 신학이 유포되었던 것을 돌이켜봐도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물질의 풍요가 신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바로 이러한 신학적 정당성으로 
물질적 풍요에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을 받지 않게 된 이들 중 일부가 교회를 
살찌우기 시작했으며 대형교회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보면, 부의 
문제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피할 수 없는 핵심적 사안의 하나임을 확인하게 
된다. 
아무튼 이렇게 물질적 부유함이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을 옹호하는 논리도 
초기의 유치한 기복주의에서 이제는 좀더 체계화해가는 경향을 보인다. 기도의 
내용이나 하나님의 은총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물들 모두가 다 현세의 물질적 
형통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흐름처럼 되어 가고 있는 것은 그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사회적 징후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1997년 IMF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사회가 물질적 안정에 얼마나 갈급해 오고 있었는가를 생각할 
때, 이 문제를 신앙적으로 정리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 교회와 목회자는 소위 
‘인기’가 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예수께서는 과연 어떤 물질관을 
가지고 계셨는지,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물질에 대한 자세를 어떻게 
결론지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일깨우는 것이다. 

김동호 목사의 “깨끗한 부자” 
김동호 목사의 청부론(淸富論)은 유명하다. 그는 이 문제를 놓고 공개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글도 적지 않게 썼다. 또한 이를 주제로 하여 설교도 한다. 
그러니 그는 청부론 전문가라고 할 만하다. 뿐만아니라, 종교인의 부유함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 쉬운 상황에서 그는 전혀 위선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내놓고 이를 신학적으로 옹호한다. 그의 논지는 매우 분명하다. 물질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물질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부자, 강자로 만드셔서, 그렇게 
주어진 물질로 세상을 바로 세우도록 권세를 주셨다는 신학적 논리를 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물질을 복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물질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임받는 은사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논지는 기복주의가 아니다. 
복과 물질적 성공을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김동호 목사의 
청부론은 기존의 탈금욕적 물질관과 그 격을 달리한다. 그는 금욕적 물질관도 
거부하고, 기복주의적 물질관도 부정한다. 
그는 이렇게 그의 논지를 시작한다. 

기독교인들의 돈에 대한 신학과 신앙은 대개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물질을 터부시하는 유교적인 물질관이며, 다른 하나는 물질을 축복으로 여기는 
기복적인 물질관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물질관으로는 기독교의 물질관을 
설명할 수 없다. 기독교인 가운데 기독교의 물질관이 기복적 물질관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물질을 터부시하는 유교적 물질관과도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의 
물질관이 기복적인 물질관도, 그렇다고 해서 돈을 터부시하는 유교적인 
물질관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는 자신의 물질관, 즉 돈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밝힌다. 

돈은 복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누구나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돈은 복이 아니라 은사라고 했다. 신앙인으로서 물질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물질은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큼 
중요하지도 않다. 

하여 김동호 목사는 이 모든 기준의 개념을 소유 가치와 존재 가치로 대별한다. 
에리히 프롬의 좬소유냐 존재냐좭에서 정리된 개념을 따라 그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존재 가치로 본다. 그리고 이 존재 가치가 실현된 부자를 청부의 모델로 
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부자 중에 소유형의 인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 중에도 삶의 의미와 목적을 존재에 두고 사는 
사람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사람이 욥이다. 욥은 
소유가 많은 부자였으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단지 소유에만 두고 사는 소유형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유 가치를 팔아 존재 가치를 높이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부자가 된 이를 그는 ‘의로운 부자’라고 
부른다. ‘의로운 부자’란 “자기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 큰 돈을 벌고 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게 될 때 그 부유함은 세속의 
부유함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는 은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로운 
부자가 있는 한 부자에 대한 편견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이 세상은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편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부하고 강한 
자들에게도 똑같은 편견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강하고 부한 자들을 무조건 악한 
사람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나 이것 또한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편견만큼이나 옳지 않다. 

이러한 논의에 따라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예수 믿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욕심내고 도전해야 할 것은 우리가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어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 … 좋은 차를 타고 넓은 
집에서 사는 것을 무조건 비판적으로 보는 세상은 절대로 발전할 수 없다. 
부함과 강함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눈을 가져라. 부함과 강함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버려라. 할 수 있는 대로 강한 
자가 되라. 높은 자가 되라. 부한 자가 되라. 뛰어난 사람이 되라. 그렇게 
되기를 힘쓰라.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 로마 시민권을 쓴 것처럼 부함과 강함을 
주님을 위해 선용하라. …`돈에 대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반듯한 믿음의 
자세를 갖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즉시 천국 열쇠를 주셔서 우리 마음대로 이 
땅에서도 풀고 매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부자도 되고 권력자도 될 것이다.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부자와 권력자가 
될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런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결국 김동호 목사의 핵심 논지는 물질적 부유함과 사회정치적 권세의 획득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필요한 은사이니,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더욱 
강렬하게 이를 얻어 의롭게 선용하는 복을 누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돈, 
물질에 대한 접근은 그를 대하는 사람의 자세가 신앙적으로 바로 서 있기만 
하다면 그야말로 그 때문에 세상이 더욱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그의 ‘청부론’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돈과 권력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돈과 권력을 제대로 된 사람이 쥐고 있으면 세상이 다 잘 
될 수 있으니 제대로 된 사람들은 이러한 돈과 권력을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획득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 사명을 지니라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이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권세도 있는 존재가 그 마음과 
영혼까지도 선하고 의로워서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세상을 선하고 의롭게 
만들어 가기 위해 쓴다면 그야말로 나무랄 데가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청부가 가능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일이 우선되어야 
첫째, 그는 한국 사회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정직하고 양심적이며 올바른 
방식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현실에 눈을 감고 있다. 열심히 정직하게 자신의 
땀과 수고를 바치는 노동자들이 청부를 꿈꿀 수 있다면, 김동호 목사의 
이야기는 옳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이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자신의 노동으로 
누구나 부러워할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청부(淸富)는 기본적으로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그가 먼저 주의를 집중시켜야 할 바는 올바른 방식의 부의 축적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의 문제이다. 한국 사회에서 부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정직하게,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충분히 지급하면서 부자가 
된 경우가 얼마나 될까? 청부를 논하려면, 바로 그러한 청부가 가능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일이 우선이다. 공정한 경쟁, 정직한 거래, 정당한 임금 지급, 
투기경제의 제거, 초국적 독점 자본의 횡포를 저지하는 일 등등 청부가 진정 
가능한 현실을 이루어내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앞서야 하는데 그에게서 그런 
점은 발견되지 못한다. 

의로운 부자들의 
당연한 권리(?) 
둘째, 오늘날 한국 사회처럼 나날이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적 신앙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만을 위해 그 많은 재산을 사용하고도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최상의 저택에 최상의 물질적 장식과 넓은 땅에 대한 
부자들의 독점욕은 끝 간 데를 모른다. 그런데 김동호 목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제대로 쓰기만 하면 이러한 누림은 문제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의로운 부자들의 당연한 권리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최상의 물질 
환경 자체가 그의 물질을 올바로 쓰고 있지 않은 증거이다. 온전한 신앙 양심을 
가진 종교인이라면, 지도자라면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그리고 바로 이러한 빈부격차를 줄이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자세를 갖는 것이 온당하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요구했던 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개인이 쓸 
만한 것을 넘치게 가지고 있는 물질의 용도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행동 원칙을 
보여준다. 부자는 부의 개인적 용도가 그 도를 넘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 부는 부족한 남에게 넘겨주어야 마땅하다. 예수는 부자 청년에게 
바로 이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부자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주는 역할 
셋째, 무엇보다도 김동호 목사의 청부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부자들의 양심을 
치는 강력한 말씀의 요구가 약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칫, 그의 논리가 약간의 
선행을 통해서 부자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주는 역할을 할 위험이 있다. 
부자들의 영혼은 이미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부자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풍요한 물질에 둘러싸여 
있으면, 그 물질의 풍요가 주는 안락함에 젖게 되고 이 세상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일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만일 그러한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면 부로 안락을 누리는 일은 그의 양심을 치는 일이 되어, 
그렇게 할 수 없게 된다. 
진정 그의 말대로 기독교 신앙인들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 살아야 한다. 그 
존재가 지향하는 바가 하나님 나라와 의라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수백 번, 
수천 번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꿈과 목표를 위해 자신을 던지면 
나머지 필요한 물질과 권세는 자연 주어져서 그 주어진 까닭대로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의 절대적 우선권에 
대한 신앙적 인식이 강렬하지 않으면, 부는 언제나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청부론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그 인생의 모습에 
대한 신학적 설득력이나 성서적 꿈의 전개가 부족하다.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어가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짓밟으며 강자들이 약자들을 능멸하는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온전하지 못하면, 그의 청부론은 부를 추구하는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 주는 꼴이 될 수 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그리하면’을 믿는가, 믿지 못하는가가 더욱 
핵심적인 신앙의 축이다. 그의 말대로, “예수 믿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욕심 
내고 도전해야 할 것은 우리가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어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존재가 곧 강한 자요, 부한 자인 것이다. 진정 강한 자, 진정 부한 자의 
의미는 이로써 달라진다. 
우리는 없으나 있는 자요, 약하나 강한 자이며, 죽은 듯하나 영원히 산 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 믿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욕심 내고 도전해야 할 것은 
우리가 물질의 풍족 여부를 떠나 이미 그 마음과 꿈이 부하며 그의 믿음이 강해 
그 어떤 고난의 와중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활기차고 용기 있게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미 청부, 청빈의 문제를 
초월하여 그 스스로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실현시키면서 사는가가 최고의 
관심사이자 가치가 될 것이다. 실로 진정한 ‘청부’는 가진 것이 없어도 그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 나라의 꿈으로 부유한, 그래서 돈과 권세가 없어도 
‘예수의 이름으로’ 믿음의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 안에서 세워야 할 진정한 부자가 아니겠는가? 

강준민 목사의 
“형통의 원리를 상속하라” 
강준민 목사의 경우는 김동호 목사와는 달리 부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의 논지는 보다 노골적이다. 그는 아예 내놓고 “거부가 되는 
법”-그 앞에 ‘훌륭한’이라는 말을 달긴 했으나 -을 내세운다. 그의 논지 
안에서 거부가 되는 것과 형통해지는 것은 다르지 않다. 김동호 목사나 강준민 
목사 모두 부와 권세가 나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섬김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나, 특히 강준민 목사의 경우, 보다 중요한 초점은 
부하고 강한 자가 되는 법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는 록펠러를 예로 들면서 그가 최고의 부자이면서 십일조 생활을 열심히 
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러나 록펠러를 비롯한 미국의 대자본 소유주들이 
세계적 독점자본의 주도자이자 미국 노동자들과 세계 약소민족들의 삶을 
희생시킨 세력에 속한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가령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회사가 지구촌 수많은 곳에서 미국의 무기를 앞세워 식민지를 경영하는 일에 
앞장을 섰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외 팽창정책의 배후에 힘을 발휘해 
온 것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자들이 아무리 십일조를 많이 한다 해도 그것은 이미 부의 축적 
과정과 부의 사용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며, 인류 사회에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록펠러 재단은 자신의 그 같은 사회적 
이미지를 포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작업을 벌이곤 하지만, 그 본질에 서는 
문제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강준민 목사는 형통의 원리에 따라 자아상을 조절하면 그것이 곧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 부자가 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해서 관찰해 
보십시오. 집이 크고 아름답습니다. 정원도 아름답습니다. 전망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사는데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자신이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거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거부가 되는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상 이상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어떤 세일즈맨이 한 달에 3,000 달러 버는 자아상을 가졌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자아상을 바꾸지 않는 한 3,000 달러 이상의 돈을 벌지 
못합니다.… 타는 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상 
이상의 차를 타지 못합니다. 좋은 차를 타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하면 그 차를 
타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훌륭한 거부는 그 자신이 훌륭한 거부의식과 자아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 된다는 것이다. 거부로 사는데서 그에 걸맞은 자아의식이 있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큰 부자로 살고 있다는 주장이다. 고급 차를 못 타는 것은 
결국 그런 수준의 차를 탈 만한 자신으로 스스로를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대목에까지 이르게 되면 솔직히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이러한 자아상의 근거를 성서의 요셉에서 찾는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 쉽게 성공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자아상 
때문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할 때에도, 감옥에서 옥살이할 
때에도 국무총리가 되는 자아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에 따라 
사는 것뿐이었고 국무총리는 그러한 삶의 결과였다. 요셉에게 주어진 자아상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지 세속의 국무총리가 아니었다. 역시,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이지 훌륭한 거부로서의 자아상이 아니며, 자신은 
고급 차를 타고 다닐 만하다고 여기는 자기 최면적 자아상 확립에 있지 않다. 
실로 이와 같은 강준민 목사의 논지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와 그에 따른 계층적 위화감은 결국 자기가 어떤 자아상을 가지고 
사는가의 문제의 차이일 뿐 사회경제적 모순이나 기타 여러 가지 불합리한 부의 
축적 구조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수십 평이 넘는 거대 
아파트에 살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집에 살 수 있는 자아상을 충분히 갖지 못한 
것이지 아파트 투기 경제로 인한 아파트 값 폭등은 요인이 되지 못한다. 아무리 
남편과 아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벌어도 전세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고물이 다 된 
중고차를 겨우 끌고 사는 것도 모두 자기 자아상이 ‘부자’로서의 권리를 가진 
자아상을 갖지 못한 까닭이 되고 만다. 불편한 서민 주택에 살고 있는 것도 다 
크고 화려한 저택에 사는 자신의 자아상을 갖지 못한 결과이며, 결론적으로 
제가 못나서 그런 것이지 어디 다른 것에 탓을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식이 되면 노동자들이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임금투쟁을 하는 것도 다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것 하지 말고 부자로 살아가는 자아상을 얌전하게 
잘 갖고 있기만 해도 되는데 괜히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 된다. 근본적인 
빈부격차와, 부의 정의로운 분배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마당에, 아무리 자아상이 
그럴싸해도 그것은 현실에서 곧 좌절을 가져오고 만다는 것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이다. 

마치 경영원리를 
강의하는 것인 양 착각 
그는 김동호 목사와 다를 바 없이 존재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는 한다. 

훌륭한 거부란 물질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존재가 넉넉한 사람이란 소유로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고 이를 완성하는 
방법에 대한 제시로 일관해 있다. 한편으로는 존재 가치의 중요성을 가진 삶을 
거론하면서도 “물질의 풍요로 성공하는 삶”을 목적하고 있음을 내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책은 마치 경영원리를 강의하는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한꺼번에 투자하지 말고 분산해서 심으십시오. 그러나 너무 많이 분산해서는 
크게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많이 얻건 적게 얻건 관계없이 헌신할 것에는 헌신하고 그렇지 
않을 것은 그렇지 않도록 가르치셨다. 그 열매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열매의 진실성, 그 열매의 진정한 힘, 그 열매의 아름다움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크게 얻을 것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얻을 것인가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는 자가 복된 것이다. 그러나 강준민 
목사는 이러한 성서의 헤아림을 계산과 이득의 기준에 따른 사고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성서를 자본주의적 풍요의 교과서처럼 읽게 만들고 말았다. 그의 
책에는 이 세상의 고난과 핍박, 억울함, 부정의, 희생 등에 맞서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내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그에 필요한 용기와 의지와 의식에 
대한 언급 또한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강자의 횡포와 부자들의 착취, 그리고 이로 인한 약자들의 눈물과 고통에 대한 
성찰은 기본적으로 없다. 부와 강한 권세에 대한 예언자들의 질타, 그로써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해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바쳐야 할 것인지, 그로써 진정 
이 세상의 부유함이 모두의 것이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이 세상에서 돈도 손에 쥐고 신앙적 존귀함도 함께 쥐는 그런 기술에 대한 
가르침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과연 그가 말한 대로 온유하고 겸손하며 이웃의 
삶에 자신을 나누려는 이가 그토록 대단한 저택과 최상의 차를 타면서 이를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을까? 바로 옆의 이웃은 끼니를 잇지 못해 쩔쩔매고 
있으며,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으로 인해 그동안 수고하고 땀을 흘린 대가가 
그의 꿈을 이루는 데 턱없이 모자라는 현실에 대하여 그냥 입 다물 수 있을까? 

물질적으로 풍요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다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여기며 사는가에 따른 문제라고 하면서 자기가 다 알아서 하라고 할 수 
있는가? 잘못된 정치와 경제, 그리고 대외관계로 인해 이 땅의 가난한 민중들이 
더욱 피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도 여전히 그것은 자신의 자아상이 잘못된 
결과라고 강변할 수 있을까? 강준민 목사가 주장하는 이른바 ‘형통의 원리’란 
바로 그러한 사회적 모순에 눈을 감게 하면서 부자가 되려는 탐욕을 신앙적으로 
은폐하는 논리를 제공해 주고 마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이 땅의 삶이 무수한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주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정의로운 경제 공동체, 정의로운 분배 구조, 정의로운 국제 경제의 
관계 형성 등을 요구하고 이를 실현시켜나갈 노력은 이러한 강준민 목사의 
논지에선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건 상관없이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일에 신앙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쪽으로 그의 이야기가 
이바지하고 있다면 이는 실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과 대적하는 
것이다.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그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물질의 
신’을 숭배하기를 바라며, 그로써 우리의 믿음대로 살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파괴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므로 진실로 믿음이 있는 이들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그 물질의 풍요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두에게 공의롭게 주어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자신을 헌신할 것이다. 그것이 전제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주어진 조건이 차별성이 없는 가운데서 진정 아름다운 부를 
소유할 수 있는 현실을 만나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권리를 실현하는 개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전, 우리는 불평등한 세상에서 그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다 자기의 자아상이 잘 서 있어서 그런 줄로 아는 
이상하고 기괴한 신앙인들을 보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인들이 
모범적인 기독교 신앙인으로 추앙되어 무수한 사람들을 오도하는 결과에 
직면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물질의 신을 모두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우리의 신앙에서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루는 일에 있다. 그 열매로써 얻어지는 
부는 참되다. 그것은 의로운 과정과 의로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 한번 우리에게 훌륭한 거부, 깨끗한 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가르친 바가 있던가? 그렇지 않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러한 문제 자체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를 거부하도록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사는 이의 길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의 관심사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신 부는 그를 진정 부유하게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겪는 
빈곤 또한 그를 부유하게 할 것이다. 이것을 믿고 사는 자에게 ‘부’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의와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그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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