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5년10월31일(화) 08시17분57초 KST 제 목(Title): [캡쳐]강 원룡의 신과 인간에 대한 통찰 하나비비에서 갈무리하여 올립니다. Posted By: wonsuk (너는 지금 어디에?) on 'Religion' Title: 강 원룡의 신과 인간에 대한 통찰 Date: Mon Oct 30 00:55:34 1995 오늘 도서관에서 강 원룡 목사의 자서전 '빈들에서'를 읽었다. 그가 겪어온 우리 근대사가 아주 재미 났다. 특히 그가 '하나님'과 '민족의 운명'을 모두 어깨에 짊어 지고 살아온 이엿기에 그가 겪은 일이 시대의 핵심을 말 해주는 것 같앗다. 근데 말할려는건 이 책광고가 아니라... 그가 맺는 말에서 한 정신적 궤적이 나에게 더 흥미를 자아낸다. 그게 지금 나의 관심 하고도 맞닿아 잇어서 그런가?? 그는 만주에서 태어나 기도교를 믿기 시작 햇는데, 그때 그의 생각에 비친 하나님은 유교가정에서 경험한 그지 없는 아버지나 할아버지 보다 더 엄격한 훨씬 더 무서운 심판주 엿단다. 그때 그는 제사도 안 지내고 술도 안 마시고 하여간 아주 " 계율 "에 충실한 신자 엿단다. 그것은 심판의 하나님의 이미지 였 다. 만주 용정 중학 시절, 그는 독생자 에수 그리스도 에게로 관심의 초점이 옮기어 간다. 그는 가난하고 헐벗은 이를 구하는 일에 눈을 뜨게 되고 이때 "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엇다. 또 마태복음 25장 31절의 " 그들과 함께 내가 있으니 그들을 위해 베푸는 사랑이 곧 나를 위해 베푸는 것이다 " 라는 말은 그를 착한 일에 대한 상벌주의나 악한일을 하면 지옥 간다는 식의 유아적 생각에서 해방 시켜 주엇다고 고백한다. 해방후 민족이 겼는 아픔과 상실 속에서 그는 가난에 대한 투쟁이 온정적인것인 것에 머룰러서는 안되고 사회 구조의 악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그때 그는 라인 홀트 니버를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이' 읽었다. 이 과정은 '심판의 하나님' 에서 '정의의 하나님' 으로의 전이 엿다. 전쟁과 사회악 교회의 위선적 행위는 그를 곤혹 스럽게 한다. 죽음과 고난, 부정의 문제는 그의 큰 화두 엿다. 그는 캐나다 유학을 통해 틸리히와 도스토에프스키에게 해답의 실마리를 얻는다. 그것은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 (갈 5:6)' 이었다. 그는 수직으로 이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와 수평적으로 이어진 이웃과의 관계가 동시에 열려진것이 엇고 끊임 는 수평을 유지 하고자 햇다고 말한다. 그는 '성서'와 신문'을 한꺼 번에 읽엇다. 하지만 둘의 차이는 잊지 않앗다고 한다. 이 차이의 증폭은 1970년대 급진적인 사회운동과의 만남에게 이루아 진다. 그는 그들과 정의의 문제에 동의 하면서도 그들이 정의만을 최고 선으로 생각 하는 나머지 대중의 증오심을 동원 하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던졌다. 그가 취한 입장은 '절대선'이 아니라 '보다 적은 악' 이라는 점진적 개혁의 자세 였다. 그에게 이제 등장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랑의 하나님' 이었다. 이제 그의 화두는 '정의'에서 '화해'와 '조화'로 변해 간다. 그는 한국교회를 크게 세분류로 나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강조 하는 '보수파'와 말구유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억눌린 자의 편에서 싸우다 죽은 에수에 촛점을 두는 '진보파', 성령의 능력을 강조 하며 기복적 성격을 띠는 '성령파'로. 그에게 중요하게 떠오른 교리는 바로 기독교의 온전성 (wholeness)를 강조한 삼위일체 설이엇다. 이 화해의 생각은 그가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선구적으로 시작한 근거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의 폐쇠성, 독단성에 대해 크게 걱정 하는 사람이다. 그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거나 '나로 말미 암아 서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 '는 하나님은 교회의 좁은 울타리에 속해 잇는 현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를 하나의 형상으로 고정 시킴으로서 우상화 하고 있다고 말한다. ' 하나님은 사랑 이시다 ( 요한 4:8) "는 이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전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유지해온 위대한 사랑의 에너지 이다. 예수는 데이아르 드 사르댕 말대로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는 '(롬 3:9) 세상에 '사랑의 인력권을 형성한 인물' 이다.그는 '내가 네 안에 , 네가 내 안에 , 그리고 사랑하는 곳 어디에나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성령의 역사를 약속 한다. 그는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다. 그는 이러한 배타의 벽을 인간 중심의 사유에서 생명 중심의 사고로의 전환을 함으로서 더욱 넓힌다. 불교와의 대화가 중요한 의미로 떠오르고 성 프란체스코의 행적과 사상이 부각 되는 것이다. 그의 사상 궤적을 보면 심판의 하나님 - 정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으로 의 전이가 보인다. 나는 그 분의 전이가 그의 신앙의 성숙도의 잣대라고 느껴진다. 사람들에 따라 세계와 하늘과 이웃과 관계하는 방식은 여러가지 다. 종교인 가운데도 그가 관계하는 방식은 매우 유아적인데서 ( 상벌의 하나님 ) 성숙한 경지에 이르기 가지 다양한 걸 쉽게 본다. 한국 기독교에서 , 내 인상에, 사랑의 하나님의 단계는 아직 보편적이 아니지 않나? 그 우명한 배타주의를 벗어 버리고 자유롭게 되는 경지에는 누가 하래서 가 아닌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 ' 하늘이 곧 인간'인 말은 아직 쉽게 나오는 말은 아닌가 싶다. 그가 '시회경제적'인 헤석에 완강히 저항 하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드높은 인간의 이상과 저불어 사랑의 힘을 과소 평가 한다. 그것은 쉽게 역행주의, 실용주의, 권력주의로 변화 한다. 그는 언급 하고 잇지 않지만 하나님이 사랑 임을 실현 하는 단계는 아마 기독교가 가장 투명하게 되어서 그 레테루의 중요성을 알지 못할 경지 일것이다. 그것은 나는 '불교도 이자 기독교인' 이며 '하나님 조차 잊어 버린' 중생들이 하늘과 땅을 교회나 절로 삼고 '다만 사랑 하고 사는 ' 세상이 아닐까? ********** 갈무리 끝 --,--`-<@ 매일 그대와 아침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잠이 들고파.. Till the rivers flow up stream | Love is real \|||/ @@@ Till lovers cease to dream | Love is touch @|~j~|@ @^j^@ Till then, I'm yours, be mine | Love is free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