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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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tring (스컬리요원)
날 짜 (Date): 2002년 8월 11일 일요일 오전 05시 09분 13초
제 목(Title): 과학과 신앙에 대한 잡다한 단상



  1987년 지구로부터 수 십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강력한 초신성 폭발이 
있었다. 실제로는 아주 오래 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빛은 아주 먼 거리를 
여행하여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그 별의 폭발을 처음 
발견한 것은 천문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들이었다. 그 대강의 스토리는 
이러하다. 
  일단의 일본과 미국의 과학자들은 1980년대에 양성자라는 입자의 자연 붕괴를 
관찰하기 위하여 아주 정교하고 거대한 실험장치를 고안하여 땅속 깊은 곳에 
건설하였다. 사실 이 실험은 미국과 일본에 의해 거의 동시에 그리고 
독립적으로 수행되었다. 이 실험의 원래 목표는 아주 큰 수조 속에 담긴 물의 
수소원자를 구성하는 양성자들이 자연 붕괴할 때 나오는 중성미자라는 입자를 
검출하도록 계획된 것이다. 그런데 많은 돈을 들인 이 실험은 처음에 매우 
비관적이었다.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실험장치 내부에서는 어떤 흥미 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주 갑작스럽게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있는 미국과 일본의 검출기에서 동시에 많은 중성미자의 궤적과 
이벤트들이 쏟아져 나왔다. 과학자들은 당황스러워했다. 어느 날 이후 
갑작스럽게 그것도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연은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 해답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칠레의 한 천문학자에 의해 그러한 
일이 생긴 후 몇 시간 후에 아주 강력한 초신성의 폭발이 관측되었으며 이것은 
우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실험장치에서 발견된 중성미자들은 별의 폭발 
시 충격파에 의해 빛보다 먼저 지구에 도착한 별의 파편들로 판명되었다. 
과학자들은 원래의 통일장론 이라는 어려운 이론이 보여주고자 했던 양성자 
붕괴를 접어두고 새로이 우주와 극미 세계의 연결고리를 찾는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인류가 생겨나기 훨씬 전에 
지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 '멀리` 라는 말은 사실 적합하지 않다.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먼 거리이다. - 곳에서 어떤 별의 폭발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중성미자와 광자(빛)는 끝없는 암흑 속으로 퍼져나갔다. 지구라는 작은 
별에서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은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다.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쌓고 그것을 좀 더 우아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체계와 실험장치를 만들어 내었다. 아주 우연히도 그 빛의 다발들은 
지구라는 행성을 지나갔고, 그곳에 살고있던 인간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질량도 거의 없는 입자들을 발견하고 우주의 구조와 법칙에 대해 상상하며 
이야기한다. 이것은 소설가가 상상하기 힘든 지극히 큰 규모의 스케일이다.

 과학은 자연의 행동양식을 관찰하고 그 가운데서 어떤 일정한 규칙을 찾아내서 
그 규칙에 의해 다시금 자연을 기술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거기엔 가치 판단이 
들어설 여지가 거의 없다. 과학은 선악을 가리지 않으며 어떤 이념이나 
가치체계를 옹호하지 않는다.  물론 이말은 과학 안에 신의 섭리가 숨겨져 
있다고 믿는 이들에겐 예외가 될지도 모른다. 과학을 빌어서 성경과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말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창조론자라 불리는 이들은 진화론을 
이론적으로 비판하고 때로는 성경의 기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힘든 일을 
하기도 한다. 형평성의 측면에서 이들이 끼치는 영향도 있다.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잘 정립된 이론이 아니며, 그것을 마치 진실인양 가르치는 현재의 
교육체계는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미국의 캔사스 
주에서는 재작년에 진화론만을 가르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창조과학` 이란 것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과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 필요한 일인가? 왜냐하면 과학은 
수학과 같은 논리적 체계를 갖춘 언어로만 기술되는 
대상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태양의 움직임을 정지시킨 사건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일인가?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일인가? 
 
 아마도 신자가 창조과학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증거하기 위해 과학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건 더욱 
이상하지 않은가? 많은 과학자들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조화와 
통제력에 놀라워한다. 빗방울이 떨어져서 식물의 잎사귀를 맞고 가볍게 튀어 
오르는 일을 보고 놀라는 이들은 없지만 그 과정을 이해하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다. 대기가 없다면 -그러면 비가 생기지도 않았겠지만- 빗방울이 총알과도 
같이 모든 식물의 잎을 뚫어버릴 정도로 재앙이라는 것. 수소라는 눈에 보이지 
안는 원소가 산소와 함께 물이라는 우리에게 필수적인 축복을 만들어낸다는 
간단한 사실. 지구의 위치가 조금이라도 태양과 가깝거나 멀지라도 지구에는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 주기율표의 화학적 성질이 한 간결한 
미분방정식에 의해서 기술된다는 것을 알아낸 20세기 초의 몇몇 과학자들이 
극도로 흥분했을 만하다. 이런 거대한 지구환경의 유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생명체 그리고 유기물질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복잡한 메카니즘을 
필요로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만들어낸 이 지구상의 
질서를 감상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선물한 우리의 이성이 
자연을 이해하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 자연을 만들어 
내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든 사람이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과학자란 수많은 직업중의 하나일 뿐이다. 물론 
안타까운 사실은 있다. 많은 어린이들이 가졌던 과학자의 꿈을 나중에 크고 
나서는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던 것처럼 
과학자가 되겠다는 말은 현실적인 답변이 아니다. 우리시대에 만연해 있는 
미신과 비합리적인 사고 방식들은 지금이 과연 과학의 시대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조차도 돈을 내고 점을 
치며 오늘의 운세에 기분을 내맡긴다. 말씀보다는 신비적인 체험에 더욱 
놀라하며 그런 체험이 없으면 유약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도 한다. 

 괘씸한 자들은 따로 있다. 어떤 의사들은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하며, 어느 높은 교회의 아드님은 스포츠 찌라시를 만들어 여자 사진을 
판다. 유능한 기관 투자자는 무노동 이익의 꿈에 부푼 개미들의 푼돈을 
악착같이 긁어모으며, 어느 교수는 제자 논문의 제목만 읽고 자신의 이름을 
저널의 맨 위에 올린다. 그들은 비이성적이진 않지만 부도덕한 자들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과학이 아니다. 일부의 신자들이 욕먹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서 유능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유능함으로 자신의 뱃속만을 채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강한 자를 약하게,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믿는 자의 강함이란 돈이나 지식과 같은 세상의 가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없어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담대함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한없이 약하게 보이는 것이다. 

 신앙의 성장은 개인에게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신비로운 체험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체험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지난번 
설교 때에 들은 이야기다. 천사 같이 환한 얼굴과 은혜로운 목소리로 성가를 
부르는 한 집사님은 설교 시간만 되면 잠을 잔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환한 얼굴과 은혜로운 목소리로 성가를 부른다는 것이다. 
아픈 아들을 의사에게 보내는 것은 약한 믿음이라며 아들을 병원에 보내기를 
거부하는 어떤 '믿는자들' 도 있다. 과연 진정한 신앙의 성숙을 보여주는 
사례는 무엇일까? 나는 주님께서 사람의 인성(personality)을 변화시키신다고 
믿는다. 성숙한 믿음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킨다. 그건 미국인들처럼 
"아임 소리" 나 "땡큐"를 잘 말하는 그런 외형적 태도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을 이루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동물이며, 
이타적 모습 속에는 심리적 평안이라는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타적 유전자' 라는 책에서는 그러한 이기적인 인간 본성에 대하여 과학적인 
관점에서 잘 정리해 놓았는데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인류가 얻어낸 가장 큰 가치이며 우리 신앙의 종착역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신앙 문제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듯 하다. 
우리는 의심을 억누르는 것에 대해서만 많은 훈련을 받아왔다. 의심을 품으면 
왠지 벌을 받을 것 같다. 비판적인 사람이 되면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걱정조차 든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겉으로는 
한치의 의심이 없는 사람들이 믿음을 져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순식간에 타오른 사람이 순식간에 식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훈련해야 할 것은 의심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그런 의심의 근원을 하나님께 
진지하게 여쭈어 보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어떨까? 모세 오경 
-성경의 첫 다섯 권- 이 모세가 쓴 것이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다. 그는 문헌 
연구를 통해 모세 오경이 모세가 쓴 것이라는 주장은 단지 중세의 권위 있는 
종교가들에 의해 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모세 오경이 모세가 
쓰지 않았다는 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다는 것과 배치되지 않는 다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오해가 우리의 권위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것은 신앙의 퇴보가 아니다. 오히려 신앙의 퇴보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하여 마음을 닫아놓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들에 대해 반드시 
신학적인 접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의 양심은 삶과 신앙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한 친구는 내게 
신앙에서의 지나친 '자기 분석'은 해가 될 수 있다고 충고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없이 무지한 로봇과 같이 만드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의심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나는 과학을 좋아한다. 
그리고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의심하는 것은 내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은 그래서 항상 감동적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어떤 마음의 속박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여러 가지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거기에는 마음의 
평안함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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